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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산악과 우륵, 우리 전통 음악을 발전시…
2026-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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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왕산악, 거문고를 만들다
2026-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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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국의 가실왕, 가야금을 만들다
2026-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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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륵, 열두 곡의 가야금 연주곡을 만들다
2026-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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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륵, 신라로 건너가 제자를 기르다
2026-07-20
9
법흥왕, 신라 발전의 기반을 닦다
2026-07-20
10
율령을 만들어 널리 알리다
2026-07-20
1
이사부, 우산국을 정복하다
2026-07-20
2
지증왕, 나라의 기틀을 잡다
2026-07-20
3
우산국을 정벌하다
2026-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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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산악과 우륵, 우리 전통 음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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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왕산악, 거문고를 만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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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국의 가실왕, 가야금을 만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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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륵, 열두 곡의 가야금 연주곡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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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륵, 신라로 건너가 제자를 기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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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왕산악, 거문고를 만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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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증왕, 나라의 기틀을 잡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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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국을 정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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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산악과 우륵, 우리 전통 음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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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왕산악, 거문고를 만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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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국의 가실왕, 가야금을 만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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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륵, 열두 곡의 가야금 연주곡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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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륵, 신라로 건너가 제자를 기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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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흥왕, 신라 발전의 기반을 닦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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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령을 만들어 널리 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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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부, 우산국을 정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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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증왕, 나라의 기틀을 잡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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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국을 정벌하다
2026-07-20
고대사 500년대
이사부, 우산국을 정복하다
지증왕, 나라의 기틀을 잡다
우산국을 정벌하다
왕산악과 우륵, 우리 전통 음악을 발전시키다
고구려의 왕산악, 거문고를 만들다
가야국의 가실왕, 가야금을 만들다
우륵, 열두 곡의 가야금 연주곡을 만들다
우륵, 신라로 건너가 제자를 기르다
법흥왕, 신라 발전의 기반을 닦다
율령을 만들어 널리 알리다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불교를 공인하다
영토를 넓히고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다
법흥왕이라는 시호가 정해지다
성왕, 백제의 부활을 꿈꾸다
무령왕, 백제 부활의 토대를 쌓다
성왕, 사비를 건설하다
성왕, 백제의 옛 영토를 회복하다
성왕의 아쉬운 죽음
백제문화의 우수성과 대외 교류를 알려주는 무령왕릉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는 유일한 삼국 시대 고분
왕의 무덤을 지키는 동물이 있었어요.
무령왕릉에는 왕과 왕비가 함께 있어요
백제는 중국, 일본과 활발한 교류를 했어요
역사 속 작은 이야기: 무령왕릉 발굴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후회
진흥왕, 북한산에 순수비를 세우다
신라와 백제, 함께 고구려에 맞서다
관산성에서 백제와 신라가 맞서 싸우다
성왕이 관산성에서 죽다
백제의 마지막 도읍지 부여
성왕, 사비로 도읍을 옮기다
성왕의 원대한 꿈이 담긴 계획도시 사비
백제의 마지막 모습이 새겨진 부여 정림사지 5층석탑
역사 속 작은 이야기: 낙화암과 삼천 궁녀이야기는 진짜일까?
일본에 전해진 삼국 및 가야의 문화
삼국 및 가야의 문화 교류
왜에 전해진 백제 문화
왜에 전해진 고구려 문화
왜에 전해진 신라와 가야 문화
역사 속 작은 이야기: 삼국 시대 사람들이 주인공인 일본 축제
김유신, 황산벌의 5천 결사대를 넘어서다
의자왕의 독재와 백제의 혼란
계백에게 의지하는 의자왕
계백을 넘어선 김유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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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부, 우산국을 정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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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항 사자바위 투구바위(경북 울릉도)“신라에서 아주 크고 포악한 동물을 끌고 우리에게 오고 있다합니다.”“우산국 사람들 중에 큰 동물을 본 사람도 거의 없을텐데...”“신라와 맞서 싸우겠는가? 항복할 것인가?”신라의 군선들이 우산국을 정벌하기 위해 몰려오고 있어요. 이때 우산국은 어떤 선택을 했을까요? 신라는 동해 바다 한가운데 멀리 있는 우산국을 왜 정벌하고자 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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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0
42
지증왕, 나라의 기틀을 잡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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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는 진한의 12개 작은 나라 중 하나인 사로국에서 시작했어요. 사로국은 주변의 작은 나라들을 통합하며 점차 힘센 국가로 발전해 나갔어요. 사로국이 고대 국가로 나라의 기틀을 잡은 것은 지증왕 때였어요.사로국과 주변의 작은 나라들지증왕은 64세의 늦은 나이에 마립간이 되었어요. 즉위하자 지증왕은 왕의 호칭을 지증마립간에서 지증왕으로 바꾸었어요. 신라의 옛 이름인 사로국에서는 ‘왕’이라는 호칭 대신 귀한 사람을 뜻하는 ‘거서간’, 무당 또는 제사장을 뜻하는 ‘차차웅’, 연장자를 뜻하는 ‘이사금’, 대군장을 뜻하는 ‘마립간’ 등 신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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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0
41
우산국을 정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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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국은 지금의 울릉도로 동해에 있는 아주 작은 왕국이었지요. 크기는 사방이 1백리 정도였고, 대부분 경사가 급한 지형으로 이루어진 매우 험준한 섬이었어요. 위치도 육지에서 배를 타고 이틀은 가야 도달할 만큼 먼 거리에 있었어요. 그러한 지리적 특성 때문에 우산국은 신라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고 오랫동안 항복하지 않고 있었어요.울릉도지증왕이 우산국을 정벌하려고 계획하던 때 이사부가 하슬라주(지금의 강릉 지역)의 군주가 되었어요. 왕의 명을 받은 이사부는 군사와 군선을 준비하였어요.“우산국 사람들은 성질이 우둔하고도 사납소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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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0
40
왕산악과 우륵, 우리 전통 음악을 발전시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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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륵 동상(우륵박물관, 경북 고령군)고령군청“우리나라 전통악기 중 줄을 튕겨 소리를 내는 악기는 무엇이 있을까요?”“거문고와 가야금이요.”“맞아요. 거문고와 가야금은 아주 오래전에 만들어진 악기지요.”비슷하면서도 다른 두 악기가 만들어졌던 때는 언제일까요? 또 두 악기를 만든 사람은 누구이며, 이와 관련한 음악을 발전시킨 사람은 누구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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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0
39
고구려의 왕산악, 거문고를 만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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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문고는 술대라는 나무 막대기로 줄을 치면서 소리를 내는 악기에요. 고구려의 왕산악이 만들었다고 전해요. 기록에 따르면 3~4세기 즈음 중국 진에서 7줄로 된 칠현금이라는 악기를 고구려에 선물로 보냈대요. 하지만 이 악기의 소리 성질을 제대로 알 수 없어서 연주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지요.“칠현금을 연주하는 자에게 큰 상을 내리겠노라.”왕은 칠현금을 연주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았으나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러자 높은 벼슬자리에 있던 왕산악은 칠현금을 연주하기가 어려우니 악기의 본래 모양을 살리면서 고구려 사람들이 연주할 수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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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0
38
가야국의 가실왕, 가야금을 만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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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연맹은 신라와 백제 사이에 끼어 있었어요. 가야는 두 나라의 압력과 간섭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질 좋은 철을 수출하며 문화를 발전시켰지요. 음악 부문에서도 중요한 성과를 남겼어요. 바로 가야금과 그 연주곡을 만든 것이에요.가야의 가실왕은 중국 악기가 아닌, 우리 악기로 만든 음악을 듣고 싶었어요. 그래서 궁중의 악사들에게 악기를 만들게 했지요. 악사들은 중국 당의 악기인 쟁을 본떠 12줄의 현악기를 만들었어요. 그리고 악기 이름은 국가명 ‘가야’를 넣어 가야금이라고 지었어요.가야금의 12줄은 12달을 의미한다고 알려져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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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0
37
우륵, 열두 곡의 가야금 연주곡을 만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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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금을 만든 후 어느 날 가실왕은 궁중 악사인 우륵을 불렀어요.“나라의 방언이 서로 다른데, 음악이 어찌 한결같을 수 있겠는가? 가야금으로 연주할 수 있는 곡을 짓도록 하여라.”명령을 받은 우륵은 ‘하라가도’, ‘상가라도’ 등 12개의 연주곡을 지었어요. 12곡은 가야의 12개 지역을 뜻하는 것으로 보고 있어요. 우륵이 지은 12곡은 음악으로 가야의 여러 나라를 하나로 아우르려는 뜻에서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어요.가야금을 연주하는 우륵하지만 가야에서 그의 음악을 발전시키기에는 어려움이 있었어요. 532년에 이미 신라에 의해 금관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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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0
36
우륵, 신라로 건너가 제자를 기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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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륵은 가야의 운명이 다했다고 여겨 신라로 넘어가기로 마음먹었어요. 제자 이문과 함께 신라에 투항한 우륵은 신라 땅에서 자리 잡고 살았지요. 그의 연주 실력은 진흥왕에게까지 알려졌어요.음악에 관심이 많았던 진흥왕은 궁궐로 우륵을 불러들였어요. 우륵은 진흥왕 앞에서 연주했고, 왕은 감탄을 금치 못했어요. 진흥왕은 그에게 국원에 가서 살도록 했어요. 국원은 지금의 충주 지역이에요. 충주에 가면 탄금대라는 곳이 있는데, 탄금대는 ‘우륵이 가야금을 타던 곳’이라는 뜻이지요. 우륵은 계고를 비롯한 제자들에게 가야금 연주와 노래, 춤을 가르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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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0
35
법흥왕, 신라 발전의 기반을 닦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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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차돈 순교비국립경주박물관“짐이 오늘 신라를 위해 중요한 결정을 내리겠소, 불교를 정식으로 인정하고자 하오. 그대들의 생각은 어떻소?”“전하! 아니되옵니다. 이미 신라에는 많은 사람이 믿고 있는 토착신이 있사옵니다.”신라 법흥왕은 불교를 공식적으로 받아들이고 싶었으나 귀족들의 반대에 부딪혔어요. 이러한 상황에서 이차돈이 순교한 덕분에 신라에서 불교가 인정을 받게 되었지요. 법흥왕은 불교를 받아들이는 것을 비롯하여 어떤 정책을 펼쳤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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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0
34
율령을 만들어 널리 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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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법흥왕은 지증왕과 연제부인 박씨 사이에서 태어났어요. 정확한 기록이 없어서 그가 언제 태어났는지 알 수 없지만, 『삼국사기』, 『삼국유사』라는 역사책에 따르면 어릴 때 이름은 원종이었어요. 514년 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어요. 이후 27년 동안 신라를 다스렸지요. 키가 7척(약 170cm 정도로 추정됨) 정도이고, 성품이 너그러워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어요.법흥왕이 왕위에 올랐을 때는 귀족들의 힘이 매우 컸어요. 법흥왕은 나라의 발전을 위해서는 왕권이 강해져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우선 군사 업무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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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0
33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불교를 공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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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백제, 신라의 왕들은 자신의 권력을 강화함으로써 나라를 효율적으로 다스리고자 했어요. 삼국의 왕들은 자신의 권위를 세우고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새로운 종교가 필요하였지요. 이 무렵 중국에서 불교가 전해졌어요. 삼국 중 고구려는 4세기 후반 소수림왕 때 가장 먼저 불교를 수용했고, 얼마 후 백제도 4세기 후반 침류왕 때 불교를 받아들였어요.신라에도 5세기 전반에 불교가 전해졌어요. 하지만 신라는 불교를 정식으로 받아들이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왜냐하면 신라 귀족들이 오랫동안 믿어 왔던 기존의 토착 신앙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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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0
32
영토를 넓히고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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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흥왕은 여러 정책을 통해 권력을 강화한 뒤 눈을 돌려 영토 확장에 힘썼어요. 당시 신라 주변에는 고구려, 백제 외에 남쪽에 가야 연맹이 있었는데, 특히 법흥왕은 남쪽 지역에 관심을 기울였어요. 이러한 신라의 팽창에 부담을 느낀 대가야가 사신을 보내 결혼을 요청해왔어요. 법흥왕은 귀족 비조부의 여동생을 대가야의 이뇌왕과 결혼하도록 했어요. 여러 해가 지난 후 532년에는 금관가야의 왕이 세 아들과 함께 신라에 항복해왔어요. 금관가야의 항복은 신라가 낙동강과 남해안의 중요한 곳이었던 김해를 발판으로 가야의 여러 나라를 정복할 수 있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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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0
31
법흥왕이라는 시호가 정해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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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흥왕 때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불교는 이후 신라 사회의 발전에 큰 역할을 했어요. 불교를 통해 왕권을 강화하고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데 성공할 수 있었지요. 삼국을 통일한 후에도 불교는 더욱 발달했어요. 통일 신라는 그 땅을 불국토, 즉 부처님의 나라가 되려고 절, 불상, 탑 등을 많이 만들었어요. 이러한 불국토의 기반을 닦은 왕이 바로 법흥왕이었어요.540년 국왕이 세상을 떠나자 신하들은 불교를 흥하게 한 군주라는 뜻으로 ‘법흥’이라는 시호를 붙였어요. 여기서 ‘법’은 불교의 법 즉, 불법을 뜻해요. 시호란 왕이 세상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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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0
30
성왕, 백제의 부활을 꿈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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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문화단지(충남 부여군)“아니 우리 대왕께서 도읍을 또 옮기신다고 하는군!”“이번 천도는 한성에서 여기 웅진으로 온 것과는 다르지.”“그럼, 예전은 도망쳐 온 것이지만 이번 천도는 우리 백제가 더욱 강성해져서 옮기는 것이지 않은가.”고구려의 공격으로 첫 도읍인 한성을 잃은 지 50여 년이 지나 성왕은 백제의 왕이 되었어요. 성왕이 도읍을 웅진에서 사비로 옮기려고 하자 일부 귀족들이 반대를 했어요.또 새로 도읍을 만드는 일은 막대한 돈과 노동력이 들어가는 무척 힘든 일이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왕은 왜 도읍을 옮기려고 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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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0
29
무령왕, 백제 부활의 토대를 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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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는 고구려 장수왕에게 한성(위례성)을 빼앗기고 도읍마저 웅진(공주)으로 급히 옮겨야 했어요. 한성백제가 멸망할 때 무령왕은 열네 살이었어요. 무령왕은 백제가 전쟁에 패하고 개로왕이 고구려군에게 잡혀 죽임을 당하는 비참한 경험을 하였어요. 웅진에서 왕권 강화에 힘쓰던 동성왕이 반대 귀족 세력에 의해 살해되자 40세의 무령왕이 새로운 백제의 왕이 되었어요.왕이 된 무령왕은 ‘강한 백제를 만들어 고구려에게 꼭 복수를 할 것이다’라는 생각을 늘 갖고 있었어요. 무령왕은 귀족의 힘이 너무 커진 반면 왕권은 약해졌다고 생각해 귀족들의 힘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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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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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왕, 사비를 건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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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부활을 위해 애쓰던 무령왕이 백제를 다스린 지 22년 만에 생을 마감하자, 그의 아들인 성왕이 백제의 왕이 되었어요. 성왕은 지혜가 많고 과감하게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었다고 해요.성왕이 왕이 되었을 무렵 백제는 아버지 무령왕의 노력으로 이전 수준에 이를 정도로 나라의 힘이 커진 상태였어요. 무령왕 때에도 이미 스스로 “백제가 다시 강국이 되었다”고 중국에 내세울 정도였지요. 성왕은 아버지의 뜻을 이어서 신라와 동맹을 맺고 고구려와 맞서 싸웠어요. 또한 백성들의 생활을 더욱 안정시키고 왕권 강화를 위해 노력을 다했어요.성왕이 왕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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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0
27
성왕, 백제의 옛 영토를 회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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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비성은 백강에 의지해 만들었어요. 백강은 외적을 막는 역할도 했지만, 강폭이 넓고 수심이 깊어 큰 배가 드나들 수 있었어요. 성왕은 이런 백강의 특징을 이용해 사비성 강가에 항구를 만들었어요. 이 항구는 중국과 일본뿐만 아니라 서역의 먼 나라들과도 교류하는 국제항구가 되었어요.성왕은 이 국제항구를 중심으로 중국으로부터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고, 일본에는 불교를 비롯한 백제의 발전된 학문과 문화를 전해주었어요. 성왕의 노력으로 백제와 일본은 더욱 가까운 사이가 되었어요.사비천도와 여러 나라와의 교류를 통해 백제 제2의 전성기를 연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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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0
26
성왕의 아쉬운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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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유역을 되찾고 백제의 부활을 세상에 널리 알린 성왕의 운명은 여기까지였어요. 고구려와 함께 맞서던 신라 진흥왕이 중국과의 뱃길을 열기 위해 백제가 차지한 한강 하류 유역을 빼앗는 일이 벌어진 거예요. 성왕은 신라 진흥왕의 배신에 분노하며 군대를 일으켜 신라의 관산성을 공격했어요.그런데 제대로 싸워보기도 전에 어처구니없이 신라군에게 붙잡혀 죽고 말았어요. 성왕이 죽자 기가 꺾인 백제군은 신라군에게 크게 패하고 말았지요.사비(부여)로 도읍을 옮기고 백제 제2의 전성기를 연 성왕이 허무하게 죽지 않았다면 백제는 어떤 나라가 되었을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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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0
25
백제문화의 우수성과 대외 교류를 알려주는 무령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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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릉(충남 공주시)“장마가 시작되면 5, 6호 고분에 물이 들어갈 수 있으니 주변의 흙을 파내 물길을 내야 될 것 같습니다.”“예, 알겠습니다. 어! 그런데 여기에 또 다른 무덤의 입구가 있는 것 같아요.”1971년 7월, 백제 왕릉으로 추정되는 새로운 고분이 발견되었어요. 이 고분의 주인공은 누구일까요? 그리고 이곳에서 발견된 유물을 통해 백제의 어떤 모습을 알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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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0
24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는 유일한 삼국 시대 고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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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고분은 바로 무령왕릉으로 현재 충청남도 공주 송산리 고분군에 있는 7개의 고분 중 하나에요. 일제 강점기만 하더라도 공주 송산리 일대에는 백제의 왕 또는 귀족 무덤으로 보이는 고분이 30여 개나 있었다고 해요.공주의 옛 이름은 웅진으로 이 지역은 백제가 한성을 떠나 63년간 도읍으로 삼았던 곳이었거든요. 그런데 광복 후 무령왕릉이 발견되기 직전에는 6개의 고분만이 남아 있었어요. 고분의 명칭도 1호~6호분으로 숫자로만 불렸어요. 고분의 유물이 일제 강점기에 도굴되어 없었기 때문에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거든요.그 중 송산리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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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0
23
왕의 무덤을 지키는 동물이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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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7월 5일 고분이 처음 발견되고 3일 만인 7월 8일에 있었던 일이에요. 발굴단은 고분의 문을 열기 전에 먼저 제사를 지냈어요. 제사상에는 수박 한 덩어리와 북어 세 마리가 올려졌어요. 제사가 끝난 후 드디어 입구가 열렸어요. 제일 먼저 국립공주박물관장을 하던 분이 고분 안으로 들어갔어요.그런데 깜짝 놀랄만한 일이 벌어졌어요. 고분 입구에 돌로 만든 동물(석수)이 떡하니 버티고 있었던 것이에요. 마치 이 고분은 아무나 함부로 들어올 수 없다는 듯이 말이죠. 그리고 한 가지 더 놀라운 사실은 고분에 처음 들어갔던 분이 며칠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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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0
22
무령왕릉에는 왕과 왕비가 함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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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릉은 무령왕과 왕비가 함께 묻힌 무덤이에요. 그래서 무령왕의 유물 외에도 무령왕의 비가 사용하던 유물도 함께 발견되었어요. 대표적인 것으로 금으로 만든 관 장식(금제 관식)과 귀걸이, 은팔찌 등을 들 수 있어요. 먼저 왕비의 금제 관식은 무령왕의 금제 관식처럼 각각 2개씩 발견되었어요. 하지만 왕의 금제 관식과 모습이 조금은 달라요.무령왕의 금제 관식과 무령왕비의 금제 관식문화재청무령왕의 귀걸이는 무척이나 아름다워요. 귀걸이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조그마한 금 알갱이들이 계속 이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어요. 한편 무령왕비의 은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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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0
21
백제는 중국, 일본과 활발한 교류를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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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은 백제의 제25대 왕이 되었어요. 백제가 웅진성(공주)으로 도읍을 옮긴 지 26년 후인 501년의 일이지요. 무령왕 이전에는 동성왕이 백제를 다스렸어요. 동성왕에 이어 왕이 된 무령왕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했어요. 이를 위해 지방에 있는 담로라는 행정 구역 22곳에 왕족을 파견하여 지방세력을 통제했어요. 또 나라의 창고를 열어 백성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했어요.나라의 정치가 어느 정도 안정되자 무령왕은 중국 남쪽 땅에 있었던 양나라에 사신을 보냈어요. 그러자 양나라의 왕은 무령왕에게 ‘영동대장군’이라는 작호를 주었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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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0
20
역사 속 작은 이야기: 무령왕릉 발굴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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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에 이루어진 무령왕릉 발굴은 우리나라 고고학 역사상 최고의 사건이라고 해요. 그런데 정작 발굴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자신들이 한 일을 후회하고 있어요. 왜 그럴까요? 너무나 짧은 시간에 1차 발굴을 끝냈기 때문이에요.공주 송산리 고분군에서 왕릉으로 추정되는 무덤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기자들이 발굴 현장으로 모여들었어요. 그들은 서로 발굴 현장의 사진을 찍으려고 했어요. 그 과정에서 누군가가 청동 숟가락을 밟아 부러뜨리기도 했어요. 여기에 소문을 들은 일반 시민들도 찾아와 발굴 현장은 아주 혼잡스러웠어요.“사람들이 많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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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0
19
진흥왕, 북한산에 순수비를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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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봉(서울 종로구)“한강 하류를 차지하려면 백제와 전쟁을 벌여야 하는데...”“폐하! 아니 되옵니다. 백제와 동맹을 맺고 고구려와 맞선 지 벌써 백 이십년! 그 오랜 믿음을 저버리실 것이옵니까?”“신의도 중요하지만 신라가 더 커지려면 한강 하류는 꼭 필요합니다. 폐하! 작은 신의보다 신라를 위한 큰 결단을 내려주십시오.”신라 진흥왕은 강한 신라를 만들고 싶었어요. 신라는 백제의 성왕과 연합해 고구려를 공격해 한강 유역을 나눠가졌어요. 야망이 컸던 진흥왕이 백와 함께 한강 유역을 나눈 것에 만족했을까요? 백제와의 동맹은 계속되었을까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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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0
18
신라와 백제, 함께 고구려에 맞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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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동남쪽의 높은 산맥과 낙동강, 그리고 바다로 둘러싸인 신라는 너른 평야가 적고 여러 나라와 교류가 어려워 고구려나 백제보다 발전이 더디었지요.그러나 신라는 6세기에 접어들어 불교를 받아들이고, 율령을 반포하면서 나라의 기틀을 튼튼하게 잡아갔어요. 또한 화랑도를 규모가 큰 단체로 만들어 많은 인재를 길러냈지요. 나라를 정비한 신라는 진흥왕 때에 이르러 대외적으로 눈부신 발전을 이룩하였어요.한편 고구려 장수왕에게 한성을 빼앗기고 수도를 웅진으로 옮긴 백제가 다시 발전할 기반을 마련한 것도 6세기 무렵 성왕 때였지요. 성왕은 수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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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0
17
관산성에서 백제와 신라가 맞서 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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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배신에 화가 난 성왕은 당시 신라와 경쟁하고 있던 대가야, 그리고 교류가 많았던 왜의 군사들을 불러 관산성을 공격했어요. 관산성은 남쪽으로 추풍령을 넘으면 신라의 수도 금성으로, 대전의 서쪽 탄현을 넘으면 백제의 수도 사비로 바로 넘어갈 수 있는 군사적 요충지였어요.관산성의 위치관산성 전투는 3만 백제 연합군의 공격으로 시작되었어요. 백제 연합군의 격렬한 공세에 신라군이 밀리기 시작했어요. 다급해진 진흥왕은 고구려군에 맞서 한강 지역을 지키던 김무력(김유신의 할아버지)과 군사들을 관산성에 투입하였어요.구원군이 관산성에 도착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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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0
16
성왕이 관산성에서 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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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왕은 계속된 전투에 지쳐있을 태자와 군사들이 걱정되었어요. 또한 관산성의 상황을 직접 확인하고도 싶었어요. 성왕은 이들을 위로하기 위해 직접 50명의 호위 군사들과 함께 관산성으로 갔어요.성왕이 관산성으로 오고 있다는 정보가 김무력에게 은밀하게 전해졌어요. 김무력은 하늘이 준 기회라 생각했어요. 백제의 왕을 사로잡는다면 전쟁을 바로 끝낼 수 있었거든요. 김무력은 관산성으로 오는 길목에 군사들을 보내 조용히 기다리게 했어요.성왕은 태자를 만날 생각에 급히 말을 몰았어요. 성왕이 이용한 길은 백제 땅이었기에 크게 조심하지 않았어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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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0
15
백제의 마지막 도읍지 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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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림사지 오층석탑(충남 부여군)“우리의 도읍 한성을 고구려에게 빼앗기고 얼마나 서러웠던가. 우리가 다시 강국이 되어 도읍을 옮기니 나라 이름도 바꾸면 어떠하겠는가?”“백제는 원래 부여에서 시작된 나라이니 ‘남부여’라 하면 어떠하올런지요?“그렇다. 우리는 북방의 강국이었던 부여의 후손이다. 지금부터 우리나라를 ‘남부여’라 부르겠다.”강한 백제의 부활을 꿈꾸었던 성왕은 웅진(지금의 공주)에서 사비(지금의 부여)로 도읍을 옮겼어요. 부여는 다시 강국이 된 백제의 도읍지로 적당했을까요? 그곳에는 어떤 문화유산들이 남아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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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0
14
성왕, 사비로 도읍을 옮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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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첫 도읍지는 한강가의 한성(위례성)이었어요. 500여 년 가까이 고구려와 신라와 경쟁하며 발전하던 백제는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을 받아 한성을 빼앗기고 국왕마저 목숨을 잃었어요. 결국 백제는 고구려의 공격을 피해 급히 도읍을 웅진으로 옮겨야만 했어요(475년).웅진은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한쪽은 금강(백마강)에 의지하고 있어 외적을 막기에 유리한 곳이었어요. 반면에 땅이 좁고 금강이 자주 넘쳐흘러 나라를 다스리기에 불편함도 많았어요.공산성과 공주 일대 모습(충남 공주시)무령왕을 이어 백제를 이끌던 성왕은 강성해진 나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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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0
13
성왕의 원대한 꿈이 담긴 계획도시 사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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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왕은 사비에 부소산성을 중심으로 나성을 쌓았어요. 나성은 평야 지대에 있는 사비를 방어하기 위해 쌓은 성이에요. 나성은 흙 위에 나뭇잎과 나뭇가지를 놓고 다시 흙을 덮어 다지는 부엽공법으로 쌓았어요. 나뭇잎과 나뭇가지는 흙과 흙을 붙잡아 주고, 빗물이 빠지는 통로 역할을 해 성벽이 쉽게 무너지지 않게 해 주었어요.이중으로 도성을 방어하기 위해 만든 나성은 당시 고구려와 신라의 도성에는 없던 시설이었어요. 나성은 사비가 어떤 곳보다 더 안전하고 살기에 좋은 장소라는 것을 백성들에게 보여주었어요.왕궁의 뒤편에 위치한 부소산성은 외적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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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0
12
백제의 마지막 모습이 새겨진 부여 정림사지 5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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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가 멸망한 후 융성했던 사비의 많은 것들이 파괴되고 사라졌어요. 웅장했던 궁궐도, 공을 들여 만들었던 절과 탑도 모두 사라졌어요. 다만 정림사지 5층 석탑은 지금도 남아 세련된 백제의 멋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어요.정림사는 성왕이 사비로 도읍을 옮길 때 세운 절이에요.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왕궁의 정남쪽 도시 한가운데에 절을 세웠어요. 정림사 한가운데 만든 5층 석탑은 높이가 8m가 넘는 아주 큰 탑이에요. 익산 미륵사지석탑과 함께 지금까지 남아있는 백제 석탑 중 하나에요.정림사지 5층 석탑과 대당평백제국비명 탁본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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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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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작은 이야기: 낙화암과 삼천 궁녀이야기는 진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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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강에서 바라본 낙화암과 낙화암 꼭대기에 있는 백화정(부여군청)부소산성의 한편은 백마강에 의지하고 있어요. 부소산과 백마강이 만나는 곳에 낙화암이란 높은 절벽이 있어요. 낙화암에는 이야기 하나가 전해져 오고 있어요.“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을지언정 외적의 손에 죽지 않겠다.”나당연합군에 의해 사비성이 함락되었어요. 이때 성안에 있던 후궁과 궁녀들이 부소산성으로 도망을 가다 큰 바위에 이르렀어요. 궁녀들은 외적에게 희롱당하는 것을 거부하고 치마를 뒤집어쓰고 백마강으로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어요.이 이야기는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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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0
10
일본에 전해진 삼국 및 가야의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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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국보 제83호)과 고류사 목조미륵보살반가사유상문화재청, 문화유산채널“우리 백제에서 유행하는 불교를 이웃하고 있는 왜(일본)에도 전하도록 하라.”“네. 폐하! 불상과 불경을 전해주어 왜인들도 불교를 믿을 수 있게 하겠습니다.”삼국 시대에 백제는 불상이나 절을 짓는 방법 등 다양한 불교 문화를 왜(일본)에 전해주었어요. 그래서 일본의 불교 문화 발전에 큰 도움을 주었지요. 고구려, 신라도 왜에 여러 문화를 전해주었어요. 삼국 시대에 삼국이 일본에 전해준 문화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살펴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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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0
9
삼국 및 가야의 문화 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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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은 중국 및 서역과 교류하면서 문화를 발전시켰어요. 고구려는 지리적으로 가까운 중국 북조의 문화를 받아들였고, 바다를 통해 남조와도 교류하였어요. 또 중앙아시아의 여러 민족과도 활발히 교류하였지요.백제도 중국 동진을 비롯한 남조와 활발하게 교류하였어요. 신라는 초기에 고구려와 백제를 통해 중국 문화를 수용하였다가 한강 유역을 차지한 이후에는 중국과 직접 교류했어요. 가야도 바다를 통해 중국, 왜와 교류하면서 문화를 발전시켰어요.삼국은 나라의 발전을 위해 서로 경쟁 또는 협력하는 가운데 왜와도 관계를 맺었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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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0
8
왜에 전해진 백제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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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은 중국과 서역 외에도 동쪽으로 이웃해 있던 왜, 즉 지금의 일본과 교류했어요. 우리 조상들은 삼국 시대 이전부터 새로운 생활 터전을 개척하기 위해 왜로 건너갔고, 그 이후에는 왜의 요청으로 학자와 승려, 기술자들이 많이 건너갔지요. 그래서 일본 고대 문화의 유적과 유물 중에는 삼국의 영향을 받은 것들이 많답니다.칠지도는 4세기경 백제왕이 왜왕에게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칼이에요. 양쪽으로 뻗은 6개의 가지와 가운데 날을 합쳐 모두 7개의 갈래로 나뉘어 있어 칠지도라는 이름이 붙었어요. 길이 74.9cm의 칼 앞뒤 표면에는 62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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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0
7
왜에 전해진 고구려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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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나라 지역에는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인 7세기 말 또는 8세기 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다카마쓰 고분이 있어요. 이 고분의 벽에는 주름치마를 입은 여성들이 그려져 있어요.그런데, 허리에 띠를 맨 긴 저고리에 색동 주름치마를 입은 벽화 속 여인들의 모습은 고구려 수산리 고분의 벽화와 매우 비슷해요. 수산리 고분은 5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어요. 이처럼 왜는 백제뿐 아니라 고구려 문화의 영향도 많이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고구려 수산리 고분 벽화동북아역사재단일본 다카마쓰 고분 벽화동북아역사재단삼국 시대에 왜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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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0
6
왜에 전해진 신라와 가야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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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는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왜와 문화를 교류한 흔적이 많지 않아요. 백제와 아주 친하게 지냈던 왜의 입장에서는 백제와 적대적인 관계에 있던 신라를 대하기가 껄끄러웠을 거예요. 그러나 신라도 배 만드는 기술과 저수지 쌓는 기술 등을 왜에 전해 주었답니다.한편, 우리나라의 국립중앙박물관에는 금동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이 있어요. 일본의 국보 1호인 고류사 목조 미륵보살 반가사유상과 생김새가 매우 비슷한 것으로도 유명하죠. 그런데, 우리나라의 금동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은 어느 나라에서 만든 것인지 확실히 알 수가 없어요.그렇지만 역사학자들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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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0
5
역사 속 작은 이야기: 삼국 시대 사람들이 주인공인 일본 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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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11월, 일본의 오사카에서는 고대 한반도의 문화가 일본에 전해진 것을 기념하는 지역 축제가 열려요. 이 축제의 이름은 ‘시텐노사〔四天王寺〕왓소(ワッソ) 축제’이지요. 이 행사는 고대 일본의 국제 교류를 기념하는 의미에서 매년 열리고 있어요. ‘왓소’는 축제를 할 때 가마를 메고 ‘왓쇼이(ワッショイ)’라고 외치는 힘찬 구령에서 나온 것으로, 이 말의 어원은 한국어의 ‘왔소’라고 해요.이 축제는 수천 명의 행렬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요. 고구려의 승려 혜자를 선두로 하여 가야의 우륵, 백제의 왕인 등 삼국 시대에 왜로 건너와 선진 문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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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 황산벌의 5천 결사대를 넘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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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 묘(경북 경주시)“장군! 5만 군사를 한꺼번에 보낸다면 5천의 백제 군사야 쉽게 물리칠 수 있을 터인데 어찌 이리 시간만 보내고 계신지요?”“죽음을 각오한 백제군을 가볍게 보면 우리 군의 피해가 클 것이오. 우리 군대의 피해를 줄이면서 이길 방법은 없겠소?”황산벌에서 적은 수의 백제의 결사대에 맞선 김유신은 어떤 고민을 했을까요? 자신의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어떤 방법을 사용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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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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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왕의 독재와 백제의 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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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의자왕은 즉위 초기 고구려와 연합하여 신라 북쪽의 30개 성을 빼앗고, 대야성을 점령하면서 백제 중흥을 이루는 듯 하였어요. 그러나 의자왕은 귀족들을 정치에서 제외시키고 자신의 아들 41명을 최고 관직에 임명하는 등 가까운 사람 중심으로 나라를 운영하고자 했지요.의자왕이 권력을 독점하려하자 귀족 세력이 거세게 반발하였어요. 나라의 지도층은 분열되고 의자왕이 점차 사치에 빠지자 백제의 국력이 크게 약해졌어요.성충이나 흥수 같은 충신들이 의자왕의 잘못된 정치를 말리자 이들을 옥에 가두었어요. 이를 본 백성들의 마음도 점차 멀어져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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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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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백에게 의지하는 의자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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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심하던 의자왕과 귀족들은 결국 흥수의 말을 믿지 않았어요. 백제 조정에서 시간을 낭비하며 옥신각신 하는 사이에 당군은 해안을 수비하던 백제군을 물리치고 기벌포에 상륙하였고, 신라군은 탄현을 넘어 사비성으로 진격하고 있었어요.두 나라 군대의 빠른 움직임에 다급해진 의자왕은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거렸어요. 의자왕은 어쩔 수 없이 계백을 불러 5천 결사대로 김유신의 신라군을 막으라는 명령을 내렸어요. 적은 군사로 5만의 신라군을 막아야 하는 계백은 비장한 각오를 하였지요.“나라의 미래를 알 수 없다. 내 처와 자식들이 외적에게 잡혀 노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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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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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백을 넘어선 김유신
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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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벌에 도착한 신라군의 공격이 시작되었어요. 죽음을 각오한 백제군은 있는 힘을 다해 싸웠고, 네 번 싸워 네 번 모두 승리했어요. 예상보다 강한 백제군의 저항에 신라군의 피해가 늘어났어요.신라군의 피해가 커지자 김유신은 크게 당황했어요. 계속된 패전으로 군사들의 사기도 크게 떨어졌고, 게다가 당과 만나기로 약속한 날짜도 지키기 힘들어졌어요.고심하던 김유신은 화랑을 전장에 보내 싸우게 했어요. 김유신의 동생인 김흠순의 아들 반굴이 힘껏 싸우다 죽었어요. 반굴이 죽자 이번에는 김유신의 조카 김품일이 16세의 아들 관창을 시켜 선봉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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