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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성의 정문 역할을 한 대동문
2026-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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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성의 서쪽에 있는 보통문
2026-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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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최고의 경치를 볼 수 있는 을밀대
2026-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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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작은 이야기: 강주룡은 을밀대에…
2026-07-20
8
백제 초기 모습을 알려주는 풍납동 토성과…
2026-07-20
9
백제의 첫 번째 수도인 한강 유역 유적
2026-07-20
10
한성 백제의 수도, 풍납동 토성
2026-07-20
1
평양의 문화유산
2026-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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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몽의 무덤으로 알려진 동명왕릉
2026-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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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학궁터와 대성산성
2026-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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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성의 정문 역할을 한 대동문
2026-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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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성의 서쪽에 있는 보통문
2026-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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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최고의 경치를 볼 수 있는 …
2026-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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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작은 이야기: 강주룡은 …
2026-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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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초기 모습을 알려주는 풍납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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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첫 번째 수도인 한강 유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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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 백제의 수도, 풍납동 토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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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몽의 무덤으로 알려진 동명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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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성의 정문 역할을 한 대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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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최고의 경치를 볼 수 있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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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초기 모습을 알려주는 풍납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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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 백제의 수도, 풍납동 토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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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최고의 경치를 볼 수 있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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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작은 이야기: 강주룡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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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초기 모습을 알려주는 풍납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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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첫 번째 수도인 한강 유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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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 백제의 수도, 풍납동 토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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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의 문화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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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몽의 무덤으로 알려진 동명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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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학궁터와 대성산성
2026-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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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의 문화유산
주몽의 무덤으로 알려진 동명왕릉
안학궁터와 대성산성
평양성의 정문 역할을 한 대동문
평양성의 서쪽에 있는 보통문
평양 최고의 경치를 볼 수 있는 을밀대
역사 속 작은 이야기: 강주룡은 을밀대에 왜 올라갔을까?
백제 초기 모습을 알려주는 풍납동 토성과 몽촌토성
백제의 첫 번째 수도인 한강 유역 유적
한성 백제의 수도, 풍납동 토성
특별한 방어 시설을 갖추었던 몽촌토성
백제 초기 무덤 양식을 엿볼 수 있는 석촌동 고분군
토성은 어떻게 쌓았을까?
역사 속 작은 이야기: 사적지로 지정된 마을
고구려의 영토 확장을 알려주는 광개토 대왕릉비와 충주 고구려비
5세기 고구려의 발전
광개토 대왕릉비가 발견되기까지
광개토 대왕릉비의 내용
고구려비의 발견과 비문 내용
역사 속 작은 이야기: 광개토 대왕릉비의 비문에 관한 여러 주장들
황금의 나라 신라의 모습을 간직한 경주 대릉원
대릉원의 천마총과 황남대총을 발굴하다
신라에는 얼마나 많은 금관이 있었을까?
황남대총에 로만글라스가 묻힌 까닭은?
역사 속 작은 이야기: 신라 고분, 금관을 지켜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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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의 문화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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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문국립문화유산연구원“폐하! 지난번에 논의하신 것처럼 평양은 대동강 유역의 평야를 끼고 있어서 생산물이 풍부한 곳이고, 대동강을 통해 바다로 진출하기에도 유리한 곳이라고 생각됩니다.”“내 뜻도 그러하다. 이제 수도를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옮기도록 하라.”평양은 고구려의 세 번째 수도였어요. 장수왕 때 국내성을 대신해 새로운 수도가 된 이후 약 240여 년 동안 고구려의 수도로 번성했지요. 그래서 평양에는 고구려의 문화유산이 많이 남아 있어요. 당장은 가기가 어렵지만 통일이 된다면 많은 사람들이 찾는 여행 명소가 될 거에요. 우리 그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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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0
24
주몽의 무덤으로 알려진 동명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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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왕릉국립문화유산연구원평양시 남쪽 역포구역 용산리에 위치한 동명왕릉은 고구려 시조 주몽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어요. 부여에서 남쪽으로 내려온 주몽은 졸본(현재의 중국 랴오닝성 환런 지역)에 터를 잡고 기원전 37년에 고구려를 세웠어요. 이후 나라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던 주몽은 기원전 19년에 세상을 떠났어요. 그런데 졸본에 있어야 할 주몽의 무덤이 왜 평양에 있을까요?졸본에서 평양까지는 수백 킬로미터가 넘는 먼 거리거든요. 역사학자들은 5세기에 고구려가 두 번째 수도였던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수도를 옮길 때 시조 주몽의 무덤도 함께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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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0
23
안학궁터와 대성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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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학궁터와 안학궁 복원 모형동북아역사재단, 국사편찬위원회475년 고구려 장수왕이 수도를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옮겼을 때 궁궐이었던 안학궁은 우리 역사에서 가장 큰 궁궐로 알려져 있어요. 궁궐 전체는 마름모꼴로 한 변이 622m, 전체 둘레는 2,488m로 조선 시대 첫 번째 궁궐로 꼽히는 경복궁보다 넓었어요. 특히 안학궁터 발굴 조사에 따르면 안학궁에서 왕이 업무를 보던 중궁 1호 궁전의 전면 길이는 87m로 경복궁의 근정전보다 두 배 이상 큰 규모였어요. 안학궁은 567년 평원왕 때 장안성(평양성)으로 성을 옮길 때까지 왕이 거주하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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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0
22
평양성의 정문 역할을 한 대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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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문과 조선 시대 그림 속의 대동문국립문화유산연구원, 동북아역사재단고구려는 6세기 양원왕 때 군사적으로 방어에 훨씬 더 유리한 지형에 새로운 도성을 건설하기 시작했어요. 약 30년의 공사 끝에 기존 안학궁에서 남서쪽으로 약 8km 떨어진 장안성으로 새로 도성을 옮겼어요. 이 장안성이 바로 고구려의 마지막 도성으로 현재 평양성이라 불리는 곳이에요.대동문은 현재 평양시 대동문동에 있는데, 대동강변에 위치해서 붙여진 이름이에요. 고구려 평양성의 동쪽에 있는 문으로 대동강 남쪽을 연결하는 주요한 교통로였기 때문에 평양성의 여러 성문 가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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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0
21
평양성의 서쪽에 있는 보통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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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문국립문화유산연구원보통문은 대동문과 함께 옛 평양성을 지키던 문이었는데, 건립 초기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오래된 성문 중 하나에요. 대동강변에 있어서 대동문이라고 불린 것처럼 보통문도 보통강가에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에요. 보통강은 평양 시내를 가로지르는 강으로 대동강으로 흘러들어가는 작은 강(지류)이에요.지금의 성문은 조선 전기인 1473년 고쳐 지은 것인데, 평양성 서북쪽 방향으로 통하는 관문으로서 국방상·교통상 중요한 위치에 있어서 고구려 시대부터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매우 중요시되었어요. 보통문은 고려 시대 건축 양식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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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0
20
평양 최고의 경치를 볼 수 있는 을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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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밀대국립문화유산연구원현재 평양시 중구역 금수산 을밀봉 지역에 있는 을밀대는 6세기에 장안성(평양성)이 지어질 때 함께 지어진 정자랍니다. 을밀대는 언덕 벼랑 위에 지어졌는데, 11m 정도 높이의 돌로 쌓은 축대가 정자를 견고히 받치고 있어요. 현재의 건물은 조선 후기 숙종 때 축대를 보수하면서 고쳐 지은 것이지만, 경사면을 정리하여 돌로 석축을 쌓고 그 안쪽을 흙과 돌로 채워 넣는 고구려성의 특징을 볼 수 있답니다.을밀대라는 이름의 유래는 다양해요. 을밀이라는 이름을 가진 선녀가 이곳의 아름다운 경치에 반해 하늘에서 내려와 놀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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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0
19
역사 속 작은 이야기: 강주룡은 을밀대에 왜 올라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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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밀대국립문화유산연구원평양이라고 하면 고구려의 수도로서 평양성을 비롯해 대동문, 보통문, 을밀대 등 여러 문화유산이 떠오르지요. 그렇지만 문화유산뿐만 아니라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인물이 있어요. 바로 강주룡이라는 여성인데, 일제 강점기에 노동자 탄압에 맞서 싸웠던 인물이에요. 1901년 평안북도 강계에서 태어난 강주룡은 14세 때 가난에 쫓겨 가족과 함께 서간도로 이주했어요. 이후 결혼을 했지만 남편이 독립군 활동을 하다가 세상을 떠나면서 국내로 돌아왔어요.강주룡은 부모 형제의 생계를 위해 평양의 고무 공장에서 일하였는데, 어느 날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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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0
18
백제 초기 모습을 알려주는 풍납동 토성과 몽촌토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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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납동 토성(서울 송파구)문화재청“아파트 공사를 중단해야 한다고요?”“네. 그렇습니다. 유물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1997년, 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동 토성 주택가에서 아파트를 짓기 위해 터를 파던 포크레인이 멈추었어요. 땅속에서 백제 유물이 쏟아져 나왔거든요. 역사학자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어요. 이곳에서 다양한 백제 유물이 쏟아져 나온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뒤 이곳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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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0
17
백제의 첫 번째 수도인 한강 유역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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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는 수도를 세 번 옮겼어요. 그래서 수도 위치에 따라 한성 시대(기원전 18~475), 웅진 시대(475~538), 사비 시대(538~660)로 나누기도 하지요. 웅진성(공주)을 수도로 삼았던 시기를 웅진 시대, 사비성(부여)을 수도로 삼았던 시기를 사비 시대라고 해요. 그렇다면 한성 시대 수도는 어디였을까요?『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에서 내려온 온조가 백제를 세운 이후 백제의 수도는 하남 위례성이었다고 해요. 백제가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475년 웅진성으로 수도를 옮기기 전까지 왕이 나라를 다스리던 곳이지요.예전에는 하남 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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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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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 백제의 수도, 풍납동 토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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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동에는 국가에서 사적지로 지정한 마을이 있어요. 한성 백제의 수도로 추정되는 풍납동 토성 안에 있는 마을이지요.풍납동 토성은 일제 강점기였던 1925년 대홍수가 났을 때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어요. 성벽이 무너지면서 귀걸이, 청동 거울, 수막새, 유리구슬, 토기, 청동 초두 등이 발견되었어요. 음식을 끓일 때 사용하던 자루가 달린 청동 솥인 청동 초두는 다른 유물과 함께 항아리 속에 담겨 있었어요. 이러한 유물이 발굴되면서 풍납동 토성의 존재가 알려지게 되었지요.청동 초두국립중앙박물관풍납동 토성은 현재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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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0
15
특별한 방어 시설을 갖추었던 몽촌토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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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촌토성은 풍납동 토성 남쪽에 있는 성이에요. 백제 초기 수도는 두 개의 성으로 이루어진 것 같아요. 풍납동 토성이 북쪽에 있던 성이고, 몽촌토성은 남쪽에 있던 성인 거지요.몽촌토성은 1986년 아시안 게임과 1988년 올림픽을 개최하기 위해 경기장 등을 짓는 과정에서 존재가 제대로 알려지기 시작했어요. 올림픽 공원을 만들면서 공원 안에 있던 몽촌토성을 발굴했는데, 그 과정에서 깜짝 놀랄 일이 일어났어요.땅속에서 나오는 유물들이 예사롭지 않았거든요. 일반 백성들이 사용하던 물건이 아니었어요. 몽촌토성이 특별한 곳임을 알게 해주었지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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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0
14
백제 초기 무덤 양식을 엿볼 수 있는 석촌동 고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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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촌동은 돌이 많았던 마을로 ‘돌마리’라고 불렸어요. 돌무덤이 무너져 내리면서 돌이 많이 쌓여 있던 마을이지요. 일제 강점기에는 최소 89기 가량의 다양한 종류의 무덤이 있었다고 해요. 주변에 있는 방이동 고분군과 함께 백제 초기 무덤으로 추측되는 곳이지요.하지만 그 많던 무덤들은 보존되지 못하고 훼손되어 갔어요. 그 땅에서 사람들이 농사를 짓거나 집을 지었거든요. 1970년대 들어 발굴 작업이 이루어졌지만, 이 또한 제대로 된 발굴이 아니었어요. 도시 정비 사업을 위한 것이었지요. 무덤 속을 제대로 들여다보지도 못하고 덮어야 했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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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0
13
토성은 어떻게 쌓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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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납동 토성과 몽촌토성은 둘 다 흙으로 쌓은 성이에요. 성을 흙으로 쌓아 쉽게 무너졌을 것 같다고요? 많은 사람이 그렇게 생각할지 몰라요. 하지만 생각과 달리 무척이나 단단하고 튼튼하답니다. 오랜 시일이 지나도 성의 일부가 그대로 보존될 수 있을 정도지요.어떻게 흙으로 이런 튼튼한 성을 쌓을 수 있었을까요? 흙성을 쌓는 특별한 방법인 판축 공법 덕분이에요. 콘크리트 못지않게 단단하게 쌓을 수 있는 방법이지요. 판축 공법은 시루떡을 만드는 방법과 비슷해요. 시루떡 만들 듯이 흙을 층층이 다져가며 쌓아 올리는 방식이에요. 서로 다른 종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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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0
12
역사 속 작은 이야기: 사적지로 지정된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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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납동 토성은 1925년에 대홍수 때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지만 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서서히 잊혀갔어요. 당시 청동 초두는 조선 총독부 박물관에서 가져갔다고 해요.그러다 풍납동 토성의 존재가 다시 주목받는 일이 벌어졌어요. 1997년의 일이에요. 토성 안에서 아파트를 짓기 위한 공사가 시작되었어요. 터파기를 하자 그곳에서 백제 유물이 쏟아져 나왔어요. 하지만 제대로 된 보존 계획 없이 아파트가 들어서게 되었지요.세월이 흘러 주민들은 다른 땅에 아파트를 지으려는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지요. 국가에서는 이 지역을 발굴하고 보존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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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고구려의 영토 확장을 알려주는 광개토 대왕릉비와 충주 고구려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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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왕릉비(중국 지린성 지안시)국사편찬위원회“폐하! 왜의 군대가 저희 신라의 여러 성을 함락시키고 백성들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부디 구원병을 보내 저희를 도와주소서.”“알았다. 5만의 군대를 신라에 보내 왜군을 물리치도록 하라.”400년, 백제·가야·왜 연합군의 공격을 받은 신라가 다급히 고구려에 도움을 요청하였어요. 이에 광개토 대왕(재위 391~413)은 보병과 기병 5만을 신라에 보내어 백제·가야·왜 연합군 물리쳤어요. 이렇게 오래전 이야기가 어떻게 지금까지 전해질 수 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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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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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세기 고구려의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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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기 말에 왕위에 오른 광개토 대왕은 중국의 혼란한 상황과 안정된 왕권을 바탕으로 대규모 정복 활동을 펼쳤어요. 우선 그는 만주의 랴오둥 방면으로 영토를 확장하고자 했어요.당시의 랴오둥 지역은 동북아시아의 주도권을 잡는 데 있어 상당히 중요한 곳이었거든요. 왜냐하면, 랴오둥 지역이 중국과 고구려를 이어주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원과 물자가 풍부하였기 때문이지요.이러한 랴오둥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기회를 엿보던 고구려는 마침내 광개토 대왕 때 그 꿈을 이룰 수 있었어요. 랴오둥 지역을 차지한 덕분에 고구려는 군사력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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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0
9
광개토 대왕릉비가 발견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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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랜 옛날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의 시신을 묻는 무덤을 만들었어요. 그리고 무덤 앞에 그 인물이 살아있을 때의 활동이나 업적을 기념하는 글을 새긴 돌을 세워 놓았어요. 그 돌을 비석이라고 해요. 그냥 ‘비’라고도 하지요.고구려의 장수왕도 아버지 광개토 대왕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비석을 세웠어요. 이 비석이 바로 광개토 대왕릉비랍니다. 이 비석은 높이가 6.39미터, 무게가 37톤이나 되는 어마어마한 규모를 자랑해요. 동아시아에서 가장 큰 비석으로 알려져 있어요.414년(장수왕 2)에 세워진 광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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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0
8
광개토 대왕릉비의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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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 대왕릉비의 표면국사편찬위원회광개토 대왕릉비는 6.39미터나 되는 큰 화강암을 다듬지 않고 그대로 이용해서 만들어졌어요. 그래서 표면이 매끄럽지 않고 울퉁불퉁하지요. 그런데 비석 표면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울퉁불퉁한 표면에 반듯하게 그어진 바둑판 같은 선을 볼 수 있어요. 글자 간격을 균등하게 새기기 위해 가로 세로로 바둑판처럼 가는 선을 그어 공간을 만든 것이지요. 정말 고구려 사람들의 치밀함과 섬세함이 놀랍지 않나요?이러한 각각의 공간에 손바닥만 한 글자들이 새겨져 있는데, 자그마치 4면에 44행으로 총 1,775자나 되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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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0
7
고구려비의 발견과 비문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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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4월 8일, 당시 충청북도 중원군의 입석(立石)마을 입구 선돌에서 글씨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학자들이 모였어요. 마을을 지키는 신성한 돌로 여겨진 선돌은 1972년에 일어난 대홍수 때 쓰러졌었는데, 이 마을 청년들이 다시 세워 마을의 상징으로 삼고 있었어요. 이후 향토문화연구회 사람들이 이 선돌을 살펴보다가 글자를 발견하게 되었고,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들어 역사학자들에게 연락하게 된 것이지요.연락을 받고 부리나케 달려온 역사학자들이 돌에 낀 이끼를 걷어내고 탁본을 하였어요. 그러자 첫머리에서 ‘고려태왕(高麗太王)’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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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0
6
역사 속 작은 이야기: 광개토 대왕릉비의 비문에 관한 여러 주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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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 대왕릉비는 당시 동아시아 강국으로서 고구려의 위상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백제와 신라의 상황, 왜(일본)와의 관계 등도 알려주는 귀중한 유물이에요.그런데, 비석에 기록된 일부 내용을 두고 우리나라와 일본이 서로 다른 해석을 한 적이 있어요. 이는 일본의 역사 왜곡 문제로 확대되어 한국과 일본, 두 나라의 뜨거운 역사 분쟁으로 이어졌어요. 이는 광개토 대왕릉비의 비문에 있는 20여 자 정도 되는 짧은 문장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주장이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이죠.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아요.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以爲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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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0
5
황금의 나라 신라의 모습을 간직한 경주 대릉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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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대릉원(경북 경주시)“동쪽 끝에 있는 신라라는 나라에는 황금이 엄청 많다며?”“그러게 황금이 많아서 개나 원숭이의 목줄도 금으로 만든다고 하더군.”“정말 그 말이 사실일까?”우리나라에서 멀리 떨어진 서역 사람들에게 신라는 황금의 나라로 불렸어요. 이들은 신라를 집과 밥그릇도 금으로 만들만큼 금이 풍부한 나라로 상상했어요. 신라에는 서역 사람들이 상상한 만큼 정말 금이 많았을까요? 신라는 금을 어떻게 활용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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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0
4
대릉원의 천마총과 황남대총을 발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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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경주에는 왕과 왕비, 귀족의 무덤이 많이 있어요. 그중 가장 규모가 큰 고분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이 대릉원이에요. 넓은 벌판에 23개의 고분이 모여 있는 대릉원은 신라만의 독특한 풍경을 만들어 지나가는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답니다.대릉원의 한가운데에는 신라인이 만든 고분 중 가장 큰 황남대총이 있어요. 1973년 경주 개발 사업을 진행하던 정부는 고대 신라 문화의 비밀을 밝히기 위해 황남대총을 발굴하기로 했어요. 고고학자들을 중심으로 조사단이 만들어졌어요.고분 발굴을 맡은 조사단에게는 큰 고민이 있었어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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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0
3
신라에는 얼마나 많은 금관이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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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의 나라 신라! 이 말은 아주 오래 전부터 세상에 알려져 있었어요. 대릉원의 천마총과 황남대총을 발굴하고 나서야 그 모습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어요.다양한 신라의 금관①교동금관 ②황남대총 북분금관 ③금관총금관④천마총금관 ⑤금령총금관 ⑥서봉총금관문화재청금관은 금을 망치로 두드려 얇게 펴고 이를 잘라서 만들었어요. 관의 아래 부분에 둥근 테를 만들고, 나뭇가지(出) 모양과 사슴뿔 모양으로 금판을 잘라 금못으로 고정시켜 세웠어요. 그리고 굽은 옥과 작고 동그란 모양으로 금판을 오려 금실로 매달아 장식을 했어요. 금관 좌우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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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0
2
황남대총에 로만글라스가 묻힌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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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남대총 발굴 당시 금과 은으로 만든 유물과 함께 180여 개의 유리 조각들도 출토되었어요. 깨진 작은 유리 조각들은 처음에 크게 눈길을 끌지 못했어요. 하지만 원래 모습으로 복원하자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라고 말았어요.신라 고분에서 출토된 로만글라스문화재청복원된 유물은 새의 머리 모양을 한 유리병과 유리잔이었어요. 이 유리병은 유리 성분을 분석해 보니 옛 로마제국에서 만든 것이었어요. 1500여 년 전 신라에, 그것도 아시아 서쪽 끝에 있던 로마제국의 유리병이 동쪽 끝의 신라에서 발견되었으니 무척 신기한 일이었어요.유리는 5천 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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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0
1
역사 속 작은 이야기: 신라 고분, 금관을 지켜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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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릉원의 천마총과 황남대총 발굴에서 수많은 옛 신라의 유물들이 원래 모습 그대로 출토되었어요. 출토된 유물들을 통해 신라인들이 사용했던 물건과 제작 방법뿐만 아니라 멀리 떨어진 다른 문화와의 교류 등 신라 사회 모습을 생생하게 되살릴 수 있었어요. 이처럼 고분에 많은 신라의 유물들이 온전하게 남아있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요?삼국 시대를 살았던 옛 조상들은 사람이 죽어도 영혼이 있어 살아있을 때와 똑같이 생활한다고 믿었어요. 그래서 무덤을 만들 때 돌이나 벽돌로 방을 만들었어요. 그리고 방 안에는 널과 함께 무덤 주인이 사용할 여러 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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