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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한국의 역사, 지금나우, 1555-0001 &amp;gt; 고대사 &amp;gt; 고대사 400년대</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400s</link>
<language>ko</language>
<description>고대사 400년대 (2026-07-20 19:03:15)</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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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역사 속 작은 이야기: 신라 고분, 금관을 지켜내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400s/25</link>
<description><![CDATA[<p>대릉원의 천마총과 황남대총 발굴에서 수많은 옛 신라의 유물들이 원래 모습 그대로 출토되었어요. 출토된 유물들을 통해 신라인들이 사용했던 물건과 제작 방법뿐만 아니라 멀리 떨어진 다른 문화와의 교류 등 신라 사회 모습을 생생하게 되살릴 수 있었어요. 이처럼 고분에 많은 신라의 유물들이 온전하게 남아있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요?</p><p><br /></p><p>삼국 시대를 살았던 옛 조상들은 사람이 죽어도 영혼이 있어 살아있을 때와 똑같이 생활한다고 믿었어요. 그래서 무덤을 만들 때 돌이나 벽돌로 방을 만들었어요. 그리고 방 안에는 널과 함께 무덤 주인이 사용할 여러 물건을 함께 묻었지요. 벽에는 사신도나 생활모습을 담은 그림을 그려 넣었어요. 장례가 끝나면 방의 입구를 돌로 막고, 그 위로 돌이나 흙을 쌓아 무덤을 만들었어요.(굴식 돌방무덤/벽돌무덤)</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1782_6876.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1782_6876.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1782_6876.png" /><br style="clear:both;" />천마총 돌무지 덧널무덤의 구조</p><p><br /></p><p>신라의 무덤은 고구려나 백제와는 달랐어요. 돌 대신에 나무를 덧대어 공간을 만들고 그 안에 관을 넣었어요. 그리고 덧널 위에 냇가에서 가져온 돌을 쌓고, 또 그 위에 흙을 쌓아 마무리했어요. 고구려나 백제처럼 무덤 입구를 따로 만들지 않았다는 점도 큰 차이가 있어요.</p><p><br /></p><p>고분의 위치를 찾아낸 도굴꾼들은 무덤의 입구가 어디 있는지를 먼저 찾았어요. 입구만 찾으면 무덤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너무 쉬운 일이었어요. 그러다보니 고구려나 백제의 고분은 도굴꾼에게 쉬운 약탈 대상이 되었어요. 안타깝게도 고구려와 백제의 수많은 유물들이 도굴꾼에 의해 사라져버렸어요.</p><p>그러나 신라의 고분은 입구가 따로 없고, 어디를 파더라도 빠른 시간 안에 흙과 돌을 파헤칠 수가 없었어요. 고분을 찾은 도굴꾼들은 무덤 속에 값진 유물들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군침만 흘릴 수밖에 없었지요.</p><p><br /></p><p>오랜 세월 도굴꾼으로부터 안전하게 유물을 지킨 신라의 고분! 고분은 세상 밖으로 신라의 문화유산을 온전하게 드러내며, 지금 우리에게 옛 신라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어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19:03:15+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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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황남대총에 로만글라스가 묻힌 까닭은?</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400s/24</link>
<description><![CDATA[<p>황남대총 발굴 당시 금과 은으로 만든 유물과 함께 180여 개의 유리 조각들도 출토되었어요. 깨진 작은 유리 조각들은 처음에 크게 눈길을 끌지 못했어요. 하지만 원래 모습으로 복원하자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라고 말았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1597_057.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1597_057.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1597_057.png" /><br style="clear:both;" />신라 고분에서 출토된 로만글라스</p><p>문화재청</p><p><br /></p><p>복원된 유물은 새의 머리 모양을 한 유리병과 유리잔이었어요. 이 유리병은 유리 성분을 분석해 보니 옛 로마제국에서 만든 것이었어요. 1500여 년 전 신라에, 그것도 아시아 서쪽 끝에 있던 로마제국의 유리병이 동쪽 끝의 신라에서 발견되었으니 무척 신기한 일이었어요.</p><p><br /></p><p>유리는 5천 년 전 지중해 동쪽 연안에서 생활하던 상인들이 우연히 처음 발견했어요. 그리고 기원전 1세기 쯤 이 지역의 유리 장인들이 ‘대롱불기’라는 기술을 개발하면서 본격적으로 유리그릇이 제작되기 시작했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1625_3159.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1625_3159.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1625_3159.png" /><br style="clear:both;" />대롱불기로 유리그릇 만들기</p><p><br /></p><p>‘대롱불기’는 녹은 유리 덩어리를 금속관(대롱) 끝에 매달고, 입으로 바람을 불어넣어 유리를 부풀려 그릇을 만드는 기술이에요. 유리 장인들은 대롱불기 기술로 얇고 투명한 유리그릇을 만들 수 있었고, 다양한 모양의 유리제품을 대량생산할 수 있게 되었어요. 이 기술은 로마에 전해졌고, 로마와 함께 유리그릇은 전 세계로 수출되었어요.</p><p>남아 있는 기록이 없어 유리그릇들이 어떻게 신라까지 와서 고분에 묻혔는지는 알 수 없어요. 다만 초원길이나 바닷길 등 당시 동서양을 이어주던 교역로를 통해 중국과 고구려를 거쳐 신라에 들어왔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어요.</p><p><br /></p><p>지금도 유리그릇에 대해 풀지 못한 수수께끼가 많이 남아있어요. 하지만 왕과 함께 묻힌 유리그릇들을 통해 당시 신라인들이 금과 함께 유리그릇을 매우 귀하게 여겼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또한 먼 옛날부터 우리나라가 멀리 떨어진 서역이나 로마와도 연결되어 있었다는 것을 유리그릇은 증명하고 있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1650_8243.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1650_8243.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1650_8243.png" /><br style="clear:both;" />동서교역로</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19:01:00+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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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신라에는 얼마나 많은 금관이 있었을까?</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400s/23</link>
<description><![CDATA[<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1297_0036.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1297_0036.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1297_0036.png" /><br style="clear:both;" /> </p><p><br /></p><p><br /></p><p>황금의 나라 신라! 이 말은 아주 오래 전부터 세상에 알려져 있었어요. 대릉원의 천마총과 황남대총을 발굴하고 나서야 그 모습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1335_18.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1335_18.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1335_18.png" /><br style="clear:both;" />다양한 신라의 금관</p><p>①교동금관 ②황남대총 북분금관 ③금관총금관</p><p>④천마총금관 ⑤금령총금관 ⑥서봉총금관</p><p>문화재청</p><p><br /></p><p>금관은 금을 망치로 두드려 얇게 펴고 이를 잘라서 만들었어요. 관의 아래 부분에 둥근 테를 만들고, 나뭇가지(出) 모양과 사슴뿔 모양으로 금판을 잘라 금못으로 고정시켜 세웠어요. 그리고 굽은 옥과 작고 동그란 모양으로 금판을 오려 금실로 매달아 장식을 했어요. 금관 좌우에는 길게 드리개를 붙여 꾸몄지요.</p><p>이런 모양의 금관은 4세기 중반 마립간(신라왕을 부르는 말로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이란 명칭도 사용)이 신라를 다스리던 시대에 만들어졌어요. 마립간이 신라를 다스리던 시기 고분 속에서 금관을 비롯해 관모, 관모장식, 허리띠, 팔찌, 귀걸이, 반지, 목걸이 등 많은 금제 장식품이 쏟아져 나왔어요. 신발과 그릇을 비롯한 다양한 생활 도구도 금으로 만들어 함께 묻었죠. 같은 시기의 고구려와 백제, 그리고 중국과 비교해도 금으로 만든 물건의 종류나 양이 엄청 많았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1376_8236.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1376_8236.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1376_8236.png" /><br style="clear:both;" />다양한 종류의 금제품들</p><p>문화재청</p><p><br /></p><p>금관은 6세기 중반 이후 마립간에서 왕이 다스리는 나라가 되면서 사라졌어요. 황남대총과 같이 큰 규모의 돌무지 덧널무덤도 함께 사라졌어요. 신라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p><p>나라 임금의 명칭을 왕으로 처음 바꾼 사람은 지증왕이었어요. 나라의 기초를 튼튼히 다진 지증왕을 이어 법흥왕과 진흥왕이 나라를 다스리면서 신라의 국력은 크게 성장하였어요. 그 힘으로 고구려와 백제를 공격해 영토도 크게 넓혔고, 불교를 받아들이면서 나라는 크게 안정되었어요.</p><p><br /></p><p>왕의 힘을 키우고자 했던 마립간 시기 왕들은 화려한 금관을 만들어 자신의 권위를 주위에 과시하고자 했어요. 그러나 국력이 이전보다 더욱 강해지자 일부러 자신을 과시할 필요가 없었어요. 게다가 불교가 나라의 종교가 되고 장례 문화도 바뀌면서 더 이상 금관을 만들 필요도 사라졌어요. 신라가 나라의 기틀을 쌓아가면서 금관이 나타났어요. 그러나 신라가 강성해지자 금관도 사라졌어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18:56:28+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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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대릉원의 천마총과 황남대총을 발굴하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400s/22</link>
<description><![CDATA[<p>신라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경주에는 왕과 왕비, 귀족의 무덤이 많이 있어요. 그중 가장 규모가 큰 고분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이 대릉원이에요. 넓은 벌판에 23개의 고분이 모여 있는 대릉원은 신라만의 독특한 풍경을 만들어 지나가는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답니다.</p><p><br /></p><p>대릉원의 한가운데에는 신라인이 만든 고분 중 가장 큰 황남대총이 있어요. 1973년 경주 개발 사업을 진행하던 정부는 고대 신라 문화의 비밀을 밝히기 위해 황남대총을 발굴하기로 했어요. 고고학자들을 중심으로 조사단이 만들어졌어요.</p><p><br /></p><p>고분 발굴을 맡은 조사단에게는 큰 고민이 있었어요. 2년 전에 무령왕릉을 단 하루 만에 급하게 발굴한 일이었어요. 사라진 옛 백제 역사를 되살릴 수 있는 기회를 어리숙한 발굴로 망쳐버렸던 일이 떠올랐어요. 무령왕릉보다 더 거대한 황남대총을 함부로 발굴할 수는 없었어요.</p><p><br /></p><p>고민 끝에 조사팀은 황남대총 옆의 작은 고분을 시험 삼아 발굴해 보기로 했어요. 그 고분은 표면이 손상되고 흙이 무너져 있어서 도굴꾼에 의해 훼손되었을 것이라 조사단은 예상했어요.</p><p>고분을 감싸고 있던 흙을 조금씩 걷어냈어요. 흙을 모두 걷어내자 그 밑에는 많은 돌들이 쌓여 있었어요. 돌을 하나씩 들어내자 예상 밖의 일이 벌어졌어요. 시험 삼아 발굴한 작은 고분에서 금관을 비롯해 금제 허리띠, 금제 관모, 목걸이 등 수많은 유물들이 쏟아져 나온 것이에요. 도굴되지 않고 온전히 보존된 신라 왕릉이었던 것이지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1048_482.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1048_482.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1048_482.png" /><br style="clear:both;" />천마총 출토 유물</p><p>①금관 ②금제 허리띠 ③금제 관식 ④장니 천마도</p><p>문화재청</p><p><br /></p><p><br /></p><p><br /></p><p>많은 유물 중에서 이전에는 볼 수 없던 특별한 유물이 한 점 출토되었어요. 그것은 ‘장니 천마도’에요. 장니란 말을 탄 사람의 옷에 흙이 튀지 않도록 안장 양쪽에 매단 기구로, 말다래라고도 해요. 자작나무껍질로 장니를 만들고, 그 위에 하늘을 나는 흰색 빛깔의 멋진 천마를 그려 넣은 유물이었어요. 천마도는 옛 신라인의 그림솜씨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유물이에요. 그래서 고분의 이름도 ‘천마총’이라 지었답니다.</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1080_5097.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1080_5097.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1080_5097.png" /><br style="clear:both;" />말다래의 모습</p><p><br /></p><p><br /></p><p><br /></p><p>그런데 왕의 무덤이라 추측하면서도 이름에 ‘릉’이 아닌 ‘총’을 썼을까요? ‘총’은 발굴한 유물로 보아 왕의 무덤으로 보이지만 정확한 이름을 알 수 없는 경우에 사용을 해요.</p><p><br /></p><p>천마총을 통해 자신감을 쌓은 조사단은 드디어 2년 4개월이 걸린 황남대총의 발굴을 시작했어요. 황남대총은 무덤의 봉우리가 두 개였어요. 조사단은 먼저 북쪽 무덤부터 발굴을 했어요.</p><p><br /></p><p>크기가 가장 큰 황남대총은 발굴된 유물의 양도 천마총 보다 훨씬 많았어요. 유물을 통해 먼저 만든 남쪽 무덤이 왕의 것이고, 북쪽 무덤은 왕비의 무덤으로 밝혀졌어요. 사람의 뼈와 함께 금관, 장신구, 무기, 그릇, 유리병 등 수많은 유물이 출토되었어요. 거의 썩어 없어졌지만 화려한 비단옷을 입고 있었다는 것도 알 수 있었어요.</p><p><br /></p><p>황남대총의 유물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왕비의 금관이었어요. 왕비도 금관을 사용했다는 것을 새로 알게 되었어요. 하지만 더 특이한 것은 금관의 재료였어요. 왕의 것은 구리판에 도금을 해 만든 금동관인데, 왕비의 것은 순금으로 만든 금관이었어요. 왜 왕비의 관을 왕의 관보다 더 좋은 재료로 만들었는지는 아직도 수수께끼로 남아있어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18:51:37+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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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em>
<title>황금의 나라 신라의 모습을 간직한 경주 대릉원</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400s/21</link>
<description><![CDATA[<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0837_1508.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0837_1508.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0837_1508.png" /><br style="clear:both;" />경주 대릉원(경북 경주시)</p><p><br /></p><p>“동쪽 끝에 있는 신라라는 나라에는 황금이 엄청 많다며?”</p><p><br /></p><p>“그러게 황금이 많아서 개나 원숭이의 목줄도 금으로 만든다고 하더군.”</p><p><br /></p><p>“정말 그 말이 사실일까?”</p><p><br /></p><p>우리나라에서 멀리 떨어진 서역 사람들에게 신라는 황금의 나라로 불렸어요. 이들은 신라를 집과 밥그릇도 금으로 만들만큼 금이 풍부한 나라로 상상했어요. 신라에는 서역 사람들이 상상한 만큼 정말 금이 많았을까요? 신라는 금을 어떻게 활용했을까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18:47:29+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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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역사 속 작은 이야기: 광개토 대왕릉비의 비문에 관한 여러 주장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400s/20</link>
<description><![CDATA[<p>광개토 대왕릉비는 당시 동아시아 강국으로서 고구려의 위상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백제와 신라의 상황, 왜(일본)와의 관계 등도 알려주는 귀중한 유물이에요.</p><p><br /></p><p>그런데, 비석에 기록된 일부 내용을 두고 우리나라와 일본이 서로 다른 해석을 한 적이 있어요. 이는 일본의 역사 왜곡 문제로 확대되어 한국과 일본, 두 나라의 뜨거운 역사 분쟁으로 이어졌어요. 이는 광개토 대왕릉비의 비문에 있는 20여 자 정도 되는 짧은 문장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주장이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이죠.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아요.</p><p><br /></p><p><br /></p><p>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以爲臣民</p><p><br /></p><p>한자로 된 이 문장을 일본 학자들은 ‘왜(일본)가 신묘년(391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제를 격파하여 신민(신하와 백성)으로 삼았다.’라고 풀이하였어요. 그러나 우리나라 학자들은 다르게 해석을 하였어요. 광개토 대왕릉비가 광개토 대왕의 업적을 기념하는 내용이므로 백제와 신라를 격파한 주체는 당연히 고구려라고 해석을 하였지요.</p><p>한편, 북한의 학자들은 고구려가 왜를 격퇴하였으며, 백제가 왜와 연결하여 신라를 침략하여 신하와 백성으로 삼았다고 보았어요. 즉 백제가 친하게 지내던 왜를 끌어들여 신라를 침략하였고, 이후 고구려가 백제와 왜를 격퇴했다는 내용이지요.</p><p><br /></p><p>반면, 재일(在日) 역사학자 이진희는 비가 일본에 의해 조작되었다고 주장하면서 학계의 주목을 받았어요. 즉, 19세기 말에 일본이 사람을 만주에 보내 광개토 대왕릉비의 비문을 파괴하고 석회를 바른 후 다시 새겨 비문을 조작했다는 것이었어요. 그러나 비석을 연구하는 한 중국 학자는 당시 일본인에 의한 비문 조작은 없었다고 주장하기도 했어요.</p><p><br /></p><p>19세기 말 광개토 대왕릉비가 다시 발견될 당시, 일본은 한반도를 침략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래서 옛 가야 지역에 임나일본부라는 기관을 설치하고 백제와 신라를 정복하였다는 것(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였는데, 광개토 대왕릉비의 내용을 그 증거로 내세우려 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현재 일본이 주장한 임나일본부설은 부정되고 있어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18:44:43+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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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em>
<title>고구려비의 발견과 비문 내용</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400s/19</link>
<description><![CDATA[<p>1979년 4월 8일, 당시 충청북도 중원군의 입석(立石)마을 입구 선돌에서 글씨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학자들이 모였어요. 마을을 지키는 신성한 돌로 여겨진 선돌은 1972년에 일어난 대홍수 때 쓰러졌었는데, 이 마을 청년들이 다시 세워 마을의 상징으로 삼고 있었어요. 이후 향토문화연구회 사람들이 이 선돌을 살펴보다가 글자를 발견하게 되었고,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들어 역사학자들에게 연락하게 된 것이지요.</p><p><br /></p><p>연락을 받고 부리나케 달려온 역사학자들이 돌에 낀 이끼를 걷어내고 탁본을 하였어요. 그러자 첫머리에서 ‘고려태왕(高麗太王)’이란 글자가 선명히 드러났지요. ‘고려(高麗)’는 고구려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지요. 마을의 수호신 역할을 하던 선돌이 갑자기 한반도 유일의 고구려비로 탈바꿈하는 순간이었어요.</p><p><br /></p><p>이 비석은 충청북도 중원군에서 발견된 고구려비라는 의미로 ‘중원고구려비’로 이름 붙여졌어요. 이후 중원군이 충주시와 합쳐지면서 비석의 명칭이 ‘충주 고구려비’로 바뀌게 되었지요.</p><p><br /></p><p>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충주 고구려비에는 비의 네 면에 한자로 총 칠백여 자가 새겨져 있어요. 그러나 비, 바람 등 세월의 흔적에 의해 많은 글자가 닳아서 지금은 이백여 자만 읽을 수 있답니다. 그 내용 중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아요.</p><p>고구려 대왕이 신라 매금(신라 왕)을 만나 영원토록 친선을 맺기 위해 중원(충주)에 왔으나 … 동이(동쪽의 오랑캐) 매금에게 옷을 내려 주었다.</p><p><br /></p><p>- 충주 고구려비 -</p><p><br /></p><p>충주 고구려비에는 신라의 왕을 ‘동이(동쪽 오랑캐) 매금(마립간)’이라 표현하고 있어요. 아울러 신라의 왕과 신하를 고구려로 불러들여 관리들이 입는 옷을 나누어 준 사실도 기록되어 있어요. 이를 통해 5세기 장수왕 때 고구려가 적극적인 남진 정책을 실시하여 백제를 밀어내고 한강 유역을 장악하였음을 알 수 있지요.</p><p><br /></p><p>또한 고구려가 신라의 왕과 신하를 고구려로 불러들일 정도로 신라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음도 알 수 있어요. 충주 고구려비를 통해 우리는 고구려가 주변국을 거느리며 동아시아의 강대국으로 성장했고, 고구려 중심의 천하관을 과시하였음을 엿볼 수 있답니다.</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18:43:08+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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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광개토 대왕릉비의 내용</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400s/18</link>
<description><![CDATA[<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0491_2055.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0491_2055.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0491_2055.png" /><br style="clear:both;" />광개토 대왕릉비의 표면</p><p>국사편찬위원회</p><p><br /></p><p>광개토 대왕릉비는 6.39미터나 되는 큰 화강암을 다듬지 않고 그대로 이용해서 만들어졌어요. 그래서 표면이 매끄럽지 않고 울퉁불퉁하지요. 그런데 비석 표면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울퉁불퉁한 표면에 반듯하게 그어진 바둑판 같은 선을 볼 수 있어요. 글자 간격을 균등하게 새기기 위해 가로 세로로 바둑판처럼 가는 선을 그어 공간을 만든 것이지요. 정말 고구려 사람들의 치밀함과 섬세함이 놀랍지 않나요?</p><p>이러한 각각의 공간에 손바닥만 한 글자들이 새겨져 있는데, 자그마치 4면에 44행으로 총 1,775자나 되는 한자가 새겨져 있어요. 정말 대단하지요?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그중 150자 정도는 닳아서 어떤 글자인지 해석이 안 된다고 하네요.</p><p><br /></p><p>그럼 광개토 대왕릉비의 4개 표면에 있는 글자들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까요?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광개토 대왕릉비의 비문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어요. 비문의 첫 번째 부분에는 추모왕(주몽)의 고구려 건국 이야기, 그리고 유리왕(유리명왕)·대주류왕(대무신왕)부터 광개토 대왕에 이르는 왕들의 계보와 업적 및 비석을 세우게 된 배경 등이 기록되어 있어요.</p><p><br /></p><p>두 번째 부분에는 광개토 대왕의 정복 활동과 정복한 곳을 둘러본 내용 등이 시간순으로 기록되어 있어요. 세 번째 부분에는 광개토 대왕의 무덤을 지키는 사람들의 명단과 무덤을 지키는 규정 등이 기록되어 있지요.</p><p><br /></p><p>한편, 광개토 대왕릉비에는 광개토 대왕의 정복 활동을 비롯해 당시 고구려 사람들이 자신들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는 기록이 있어요. 아래의 내용을 통해 동아시아의 강대국으로 성장한 고구려가 스스로 천하의 중심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지요.</p><p><br /></p><p>시조 추모왕(주몽)이 나라를 세웠다. 시조 주몽은 북부여에서 태어났는데, 하늘의 아들이다. … (왕의) 은혜로운 덕이 하늘까지 미쳤고 세력은 온 세계에 떨쳤다. (나쁜 무리를) 쓸어 없애니, 백성들이 편안히 살게 되었다. … 백잔(백제)과 신라는 옛날부터 (고구려에) 속한 백성으로 조공을 바쳐 왔다.</p><p><br /></p><p>- 광개토 대왕릉비 -</p><p><br /></p><p>광개토 대왕릉비의 첫머리에 적힌 글을 통해 고구려인이 자신들을 하늘의 자손이라고 생각하였음을 알 수 있어요. 또 광개토 대왕을 정복한 지역의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는 존재로 묘사하였음도 확인할 수 있어요. 그리고 백제와 신라가 고구려에 종속된 나라라고 생각하고 조공을 받았다는 기록도 보이네요. 이처럼 당시 고구려인은 자신들의 나라가 백제와 신라를 거느리며 동아시아의 독자적인 세력을 가진 강대국으로 자부했음을 짐작할 수 있지요.</p><div><br /></div>]]></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18:41:46+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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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광개토 대왕릉비가 발견되기까지</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400s/17</link>
<description><![CDATA[<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0277_6066.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0277_6066.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0277_6066.png" /><br style="clear:both;" /> </p><p><br /></p><p><br /></p><p>아주 오랜 옛날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의 시신을 묻는 무덤을 만들었어요. 그리고 무덤 앞에 그 인물이 살아있을 때의 활동이나 업적을 기념하는 글을 새긴 돌을 세워 놓았어요. 그 돌을 비석이라고 해요. 그냥 ‘비’라고도 하지요.</p><p>고구려의 장수왕도 아버지 광개토 대왕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비석을 세웠어요. 이 비석이 바로 광개토 대왕릉비랍니다. 이 비석은 높이가 6.39미터, 무게가 37톤이나 되는 어마어마한 규모를 자랑해요. 동아시아에서 가장 큰 비석으로 알려져 있어요.</p><p><br /></p><p>414년(장수왕 2)에 세워진 광개토 대왕릉비는 668년에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돌보는 사람 없이 방치되었어요. 이후 조선 세종 때 만들어진 ‘용비어천가’에 이 비석에 대해 조금 소개한 내용이 있어요. ‘용비어천가’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업적을 노래한 시인데,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 땅에 아주 큰 비석이 있다고 서술되어 있어요.</p><p><br /></p><p>조선 성종 때 편찬된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고구려의 장군총을 금나라 황제의 묘로 잘못 소개한 글이 있어요. 이 서적에도 광개토 대왕릉비의 존재에 대해 소개하고 있어요. ‘용비어천가’처럼 비석의 주인공에 대한 내용은 없고 단순히 옛 금나라 땅에 큰 비석이 있다는 것만 서술되어 있어요.</p><p><br /></p><p>이처럼 조선 전기의 일부 기록에 따르면 당시 사람들은 광개토 대왕릉비의 존재는 알았지만, 고구려의 비석이 아니라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 황제의 비석이라고 잘못 알고 있었어요. 왜냐하면, 당시 조선인들은 만주 지역이 여진족의 땅이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p><p>그래서 그곳에 있는 광개토 대왕릉비를 직접 조사하거나 비문 내용을 확인하지는 않았어요. 여기에 17세기 이후 만주족은 자신들이 세운 청나라가 일어난 만주 지역을 신성한 곳이라고 여겨 사람이 살지 못하는 지역으로 만들었지요. 그래서 비석의 존재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묻히게 되었지요.</p><p><br /></p><p>광개토 대왕릉비가 다시 발견된 것은 1876년(고종 13) 이 지역에 청나라의 행정구역이 설치되면서예요. 1877년 이 지역의 책임자로 온 어느 청나라 관리가 이끼로 덮여 있던 광개토 대왕릉비를 발견했어요. 그는 광개토 대왕릉비 중에서 이끼가 덮여 있지 않은 일부를 탁본하였어요.</p><p><br /></p><p>탁본은 비석에 새겨진 글자를 알기 위해 먹을 이용해 종이에 글자를 본뜨는 방법을 말해요. 당시 청나라 관리는 자신이 뜬 탁본을 여러 사람에게 소개하였는데, 탁본 내용을 통해 광개토 대왕릉비의 존재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0335_5979.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0335_5979.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0335_5979.png" /><br style="clear:both;" /> </p><div><br /></div>]]></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18:39:04+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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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5세기 고구려의 발전</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400s/16</link>
<description><![CDATA[<p>4세기 말에 왕위에 오른 광개토 대왕은 중국의 혼란한 상황과 안정된 왕권을 바탕으로 대규모 정복 활동을 펼쳤어요. 우선 그는 만주의 랴오둥 방면으로 영토를 확장하고자 했어요.</p><p><br /></p><p>당시의 랴오둥 지역은 동북아시아의 주도권을 잡는 데 있어 상당히 중요한 곳이었거든요. 왜냐하면, 랴오둥 지역이 중국과 고구려를 이어주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원과 물자가 풍부하였기 때문이지요.</p><p><br /></p><p>이러한 랴오둥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기회를 엿보던 고구려는 마침내 광개토 대왕 때 그 꿈을 이룰 수 있었어요. 랴오둥 지역을 차지한 덕분에 고구려는 군사력이 더욱 막강해졌어요. 광개토 대왕은 강한 군사력을 앞세워 활발한 정복 전쟁을 이어나갔어요.</p><p>이후 고구려는 동쪽으로 숙신과 동부여를 정복하고, 남쪽으로 백제를 공격해 임진강과 한강 상류 지역을 차지했어요. 그리고 신라의 구원 요청을 받아들여 군대를 보내 백제·가야·왜 연합군을 물리치고 한반도 남부지역에도 영향력을 확대했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0067_9418.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0067_9418.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0067_9418.png" /><br style="clear:both;" />5세기 고구려의 세력 확대</p><p><br /></p><p><br /></p><p><br /></p><p>광개토 대왕의 활발한 정복 활동 덕분에 고구려는 장수왕(재위 413～491) 때 이르러 전성기를 맞이했어요. 5세기 초에 즉위한 장수왕은 아버지 광개토 대왕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수도인 국내성 부근에 광개토 대왕릉비를 세웠어요. 이어 427년에는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수도를 옮겼어요. 국내성에 기반을 둔 귀족들의 세력을 약화시켜 왕권을 강화하고, 바닷길을 이용해 보다 적극적인 국제 교류를 펼치기 위해서였지요.</p><p><br /></p><p>평양으로 천도한 이후 장수왕은 남쪽으로의 영토 확장을 계획하고 남하 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했어요. 먼저 백제를 공격해 수도를 함락시킨 뒤 남한강 유역으로 진출했지요. 이로써 고구려의 세력 범위는 랴오둥 지역에서부터 한반도 중부 지역까지 이르게 되었어요.</p><p><br /></p><p>이러한 사실은 당시 고구려가 한반도 중부 지역을 차지한 뒤에 세운 충주 고구려비를 통해 잘 알 수 있어요. 비문에서는 고구려를 ‘태왕(太王)의 나라’로, 신라를 ‘고구려 아래에 있는 동쪽 오랑캐[東夷]’로 기록하고 있는데, 고구려왕이 신라의 왕과 신하들에게 의복을 주었다는 내용도 담겨 있답니다.</p><p><br /></p><p>지금부터 동북아시아 최강국을 이룩한 고구려 광개토 대왕과 장수왕의 업적을 알려주는 광개토 대왕릉비와 충주 고구려비에 대해 자세히 알아볼까요?</p><div><br /></div>]]></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18:34:54+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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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고구려의 영토 확장을 알려주는 광개토 대왕릉비와 충주 고구려비</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400s/15</link>
<description><![CDATA[<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39889_947.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39889_947.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39889_947.png" /><br style="clear:both;" />대왕릉비(중국 지린성 지안시)</p><p>국사편찬위원회</p><p><br /></p><p>“폐하! 왜의 군대가 저희 신라의 여러 성을 함락시키고 백성들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부디 구원병을 보내 저희를 도와주소서.”</p><p><br /></p><p>“알았다. 5만의 군대를 신라에 보내 왜군을 물리치도록 하라.”</p><p>400년, 백제·가야·왜 연합군의 공격을 받은 신라가 다급히 고구려에 도움을 요청하였어요. 이에 광개토 대왕(재위 391～413)은 보병과 기병 5만을 신라에 보내어 백제·가야·왜 연합군 물리쳤어요. 이렇게 오래전 이야기가 어떻게 지금까지 전해질 수 있었을까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18:31:52+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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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역사 속 작은 이야기: 사적지로 지정된 마을</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400s/14</link>
<description><![CDATA[<p>풍납동 토성은 1925년에 대홍수 때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지만 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서서히 잊혀갔어요. 당시 청동 초두는 조선 총독부 박물관에서 가져갔다고 해요.</p><p><br /></p><p>그러다 풍납동 토성의 존재가 다시 주목받는 일이 벌어졌어요. 1997년의 일이에요. 토성 안에서 아파트를 짓기 위한 공사가 시작되었어요. 터파기를 하자 그곳에서 백제 유물이 쏟아져 나왔어요. 하지만 제대로 된 보존 계획 없이 아파트가 들어서게 되었지요.</p><p>세월이 흘러 주민들은 다른 땅에 아파트를 지으려는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지요. 국가에서는 이 지역을 발굴하고 보존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어요. 아파트를 세우려는 주민들과 국가 사이에 갈등이 생겼지요.</p><p><br /></p><p>이후 긴 시간 동안 대화와 타협의 과정을 거치면서 이 마을은 사적지로 정해졌어요. 10여 년에 걸친 발굴 조사도 진행되었지요. 이후 백제 초기 수도로 추정할 수 있는 유물이 발굴되기 시작했어요. 땅속 깊숙이 숨겨져 있던 백제의 역사가 세상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거랍니다.</p><p><br /></p><p>백제 초기 수도인 풍납동 토성과 몽촌토성, 그리고 그 주변 유적을 살펴보니 백제의 역사를 조금 더 알 수 있게 되었지요? 앞으로 발굴과 복원이 제대로 이루어진다면 우리는 백제 초기의 역사를 조금 더 생생하게 만날 수 있게 될 거예요. 우리 앞에 펼쳐질 백제 역사를 함께 기대해 보아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18:15:20+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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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토성은 어떻게 쌓았을까?</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400s/13</link>
<description><![CDATA[<p>풍납동 토성과 몽촌토성은 둘 다 흙으로 쌓은 성이에요. 성을 흙으로 쌓아 쉽게 무너졌을 것 같다고요? 많은 사람이 그렇게 생각할지 몰라요. 하지만 생각과 달리 무척이나 단단하고 튼튼하답니다. 오랜 시일이 지나도 성의 일부가 그대로 보존될 수 있을 정도지요.</p><p>어떻게 흙으로 이런 튼튼한 성을 쌓을 수 있었을까요? 흙성을 쌓는 특별한 방법인 판축 공법 덕분이에요. 콘크리트 못지않게 단단하게 쌓을 수 있는 방법이지요. 판축 공법은 시루떡을 만드는 방법과 비슷해요. 시루떡 만들 듯이 흙을 층층이 다져가며 쌓아 올리는 방식이에요. 서로 다른 종류의 흙을 다지고 다져 한층 한층 쌓아 올렸지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38805_4349.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38805_4349.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38805_4349.png" /><br style="clear:both;" />판축기법으로 토성을 쌓는 모습(한성백제박물관)</p><p><br /></p><p>또 하나의 비밀은 나뭇가지나 나뭇잎 등을 섞어 쌓는 부엽 공법이에요. 네모난 나무틀을 만든 다음 진흙을 부어 단단하게 다졌어요. 그 위에 나뭇잎이나 나뭇가지를 쌓고, 다시 진흙 쌓기를 반복해 여러 층을 쌓아 올렸어요. 나뭇가지나 나뭇잎을 흙 사이에 다져 넣으면 흙이 쓸려나가는 것을 막아준다고 해요. 이렇게 성을 쌓은 뒤 성벽을 덧대어 쌓았지요. 반질반질한 강돌을 넣기도 했어요.</p><p><br /></p><p>어때요? 풍납동 토성과 몽촌토성이 오랜 세월 동안 무너지지 않고 잘 보존된 이유를 알겠지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18:14:02+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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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백제 초기 무덤 양식을 엿볼 수 있는 석촌동 고분군</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400s/12</link>
<description><![CDATA[<p>석촌동은 돌이 많았던 마을로 ‘돌마리’라고 불렸어요. 돌무덤이 무너져 내리면서 돌이 많이 쌓여 있던 마을이지요. 일제 강점기에는 최소 89기 가량의 다양한 종류의 무덤이 있었다고 해요. 주변에 있는 방이동 고분군과 함께 백제 초기 무덤으로 추측되는 곳이지요.</p><p>하지만 그 많던 무덤들은 보존되지 못하고 훼손되어 갔어요. 그 땅에서 사람들이 농사를 짓거나 집을 지었거든요. 1970년대 들어 발굴 작업이 이루어졌지만, 이 또한 제대로 된 발굴이 아니었어요. 도시 정비 사업을 위한 것이었지요. 무덤 속을 제대로 들여다보지도 못하고 덮어야 했어요. 무덤 아래로 지하 차도를 만들기까지 했어요. 안타깝게 돌을 쌓아 만든 돌무지무덤 4개를 비롯해 땅을 움푹 파서 시신을 묻은 움무덤 등 8기만 복원돼 남게 되었지요.</p><p><br /></p><p>돌무지무덤 중에는 규모가 상당히 큰 무덤이 있어요. 바로 3호 무덤이지요. 3단으로 돌을 쌓아 만든 무덤으로 바닥 지름이 50m나 돼요. 학자들은 높이가 더 높았을 것으로 이야기하기도 해요.</p><p><br /></p><p>이 무덤은 과연 누구의 무덤일까요? 이 정도 큰 규모라면 무덤 주인은 꽤 신분이 높은 사람이었을 것 같아요. 백제의 전성기를 이끈 근초고왕(재위 346~375)의 무덤이 아닐까 하고 추측하기도 해요. 하지만 어떤 정확한 증거도 나오지는 않았어요. 무덤 안에서 백제 토기, 청자 조각, 금으로 만든 장식 등이 발굴되었어요. 적어도 왕족의 무덤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게 하는 유물이지요.</p><p>무덤을 자세히 보세요. 어디서 본 듯하죠? 장군총과 같은 고구려의 돌무지무덤과 비슷하지요. 두 나라 무덤 구조가 비슷한 이유는 백제를 세운 사람이 고구려 출신이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해요. 석촌동 고분 발굴 조사가 진행되면서 새로운 돌무지무덤 20여 기가 발견되었어요. 무덤 안에서는 백제의 역사를 알려주는 여러 가지 유물도 출토되었어요.</p><p><br /></p><p>한편 석촌동 고분군 근처에는 방이동 고분군도 있어요. 8기의 굴식돌방무덤(관을 넣는 돌로 만든 방과 외부로 통하는 통로를 만든 뒤 흙으로 덮은 무덤) 형태의 무덤이 모여 있지요. 처음에는 백제 초기 무덤이라는 의견이 우세했는데, 신라 무덤이라는 이야기도 있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38642_0742.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38642_0742.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38642_0742.png" /><br style="clear:both;" />석촌동 고분군(서울 송파구)</p><p>문화재청</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38666_5738.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38666_5738.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38666_5738.png" /><br style="clear:both;" />방이동 고분군(서울 송파구)</p><p>문화재청</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18:11:16+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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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특별한 방어 시설을 갖추었던 몽촌토성</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400s/11</link>
<description><![CDATA[<p>몽촌토성은 풍납동 토성 남쪽에 있는 성이에요. 백제 초기 수도는 두 개의 성으로 이루어진 것 같아요. 풍납동 토성이 북쪽에 있던 성이고, 몽촌토성은 남쪽에 있던 성인 거지요.</p><p>몽촌토성은 1986년 아시안 게임과 1988년 올림픽을 개최하기 위해 경기장 등을 짓는 과정에서 존재가 제대로 알려지기 시작했어요. 올림픽 공원을 만들면서 공원 안에 있던 몽촌토성을 발굴했는데, 그 과정에서 깜짝 놀랄 일이 일어났어요.</p><p><br /></p><p>땅속에서 나오는 유물들이 예사롭지 않았거든요. 일반 백성들이 사용하던 물건이 아니었어요. 몽촌토성이 특별한 곳임을 알게 해주었지요. 계속된 발굴 조사 결과 군대 막사로 추정되는 주거지와 저장 구덩이, 굽다리 접시, 세발 그릇, 기와, 철제 도구, 뼈 갑옷 등이 발굴되었어요. 이러한 유물과 유적을 통해 몽촌토성이 방어용 성이었음을 추측할 수 있었지요. 청자 조각이나 금동으로 만든 허리띠 장식 등은 중국과 교류가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유물이에요.</p><p><br /></p><p>강가의 편평한 곳에 쌓은 풍납동 토성과 달리 몽촌토성은 자연적인 지형인 언덕을 이용해 쌓은 성이에요. 성 밖에는 성내천 물길을 이용해 해자를 만들었어요. 해자는 적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한 특별한 시설이지요. 나무 목책을 둘렀던 흔적도 남아 있어요.</p><p><br /></p><p>성 가장 높은 곳에서 주위를 둘러보면 몽촌토성 일대가 한눈에 보여요. 이곳에서 내려다보면 적의 침입에 대비하기 좋은 구조란 걸 쉽게 알 수 있어요. 왕이 거처하면서 백성들을 다스리던 풍납동 토성과 달리, 몽촌토성은 외적의 침입과 같은 비상시에 수도를 방어하기 위한 군사적 성격이 강한 곳이었답니다.</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38455_8993.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38455_8993.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38455_8993.png" /><br style="clear:both;" />몽촌토성</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18:07:46+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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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한성 백제의 수도, 풍납동 토성</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400s/10</link>
<description><![CDATA[<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38211_9583.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38211_9583.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38211_9583.png" /><br style="clear:both;" /> </p><p><br /></p><p><br /></p><p>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동에는 국가에서 사적지로 지정한 마을이 있어요. 한성 백제의 수도로 추정되는 풍납동 토성 안에 있는 마을이지요.</p><p>풍납동 토성은 일제 강점기였던 1925년 대홍수가 났을 때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어요. 성벽이 무너지면서 귀걸이, 청동 거울, 수막새, 유리구슬, 토기, 청동 초두 등이 발견되었어요. 음식을 끓일 때 사용하던 자루가 달린 청동 솥인 청동 초두는 다른 유물과 함께 항아리 속에 담겨 있었어요. 이러한 유물이 발굴되면서 풍납동 토성의 존재가 알려지게 되었지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38242_2407.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38242_2407.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38242_2407.png" /><br style="clear:both;" />청동 초두</p><p>국립중앙박물관</p><p><br /></p><p><br /></p><p><br /></p><p>풍납동 토성은 현재 전하는 우리나라 토성 중 가장 규모가 크지요. 성벽 높이가 건물 5층 높이인 11m가량으로 북서쪽에 한강을 끼고 만들어졌어요. 강가에 있어서 한강을 통해 바다로 나가 중국을 비롯한 주변국과 교류하기 좋았어요.</p><p><br /></p><p>성안 경당 지구에서는 초대형 건물터와 기와, 건물 주춧돌 등 관청이나 궁궐에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유물이 발굴되었어요. 건물 기둥을 꾸미던 장식품은 이곳에 지어진 건물이 특별한 건물이었음을 보여주지요. 수도로 추정되는 곳답게 자갈이 깔린 꽤 넓은 도로도 발견되었어요.</p><p><br /></p><p>백제 관직 이름인 ‘대부(大夫)’라고 쓰인 토기, 제사용 그릇, 시루, 큰 항아리, 유리 공예품 등 수만 점의 유물이 발굴되었어요. 제사에 쓰였을 것으로 추측되는 말뼈도 구덩이에 많이 묻혀 있었어요. 중국의 청자 대접, 중국 동전인 오수전도 나왔어요. 바다 건너 중국과 활발히 교류했음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유물이지요.</p><p><br /></p><p>풍납동 토성은 한마디로 백제의 보물 창고와 같았어요. 풍납동 토성 발굴을 통해 기록에만 존재하던 한성 백제의 모습을 우리의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게 되었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38273_1295.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38273_1295.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38273_1295.png" /><br style="clear:both;" />풍납동 토성 복원 모형(한성백제박물관)</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38292_1524.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38292_1524.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38292_1524.png" /><br style="clear:both;" />‘대부(大夫)’라는 글씨가 새겨진 토기</p><p>국립중앙박물관</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18:05:01+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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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em>
<title>백제의 첫 번째 수도인 한강 유역 유적</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400s/9</link>
<description><![CDATA[<p>백제는 수도를 세 번 옮겼어요. 그래서 수도 위치에 따라 한성 시대(기원전 18~475), 웅진 시대(475~538), 사비 시대(538~660)로 나누기도 하지요. 웅진성(공주)을 수도로 삼았던 시기를 웅진 시대, 사비성(부여)을 수도로 삼았던 시기를 사비 시대라고 해요. 그렇다면 한성 시대 수도는 어디였을까요?</p><p><br /></p><p>『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에서 내려온 온조가 백제를 세운 이후 백제의 수도는 하남 위례성이었다고 해요. 백제가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475년 웅진성으로 수도를 옮기기 전까지 왕이 나라를 다스리던 곳이지요.</p><p><br /></p><p>예전에는 하남 위례성이 어디인지 의견이 분분했어요. 한성 백제의 흔적을 알 수 있는 유물이 발굴되기 전이어서 백제 초기 수도가 어디라고 정확히 이야기할 수 없었지요.</p><p><br /></p><p>그런데 1925년 일어난 ‘을축년 대홍수’로 한강 주변에 물이 차올랐다가 빠졌어요. 그때 한강 곁에 있던 지금의 풍납동 지역 토성 일부가 무너져 내려 묻혀 있던 백제 초기 유물이 발견되었어요. 하남 위례성의 존재가 나타나기 시작한 거예요.</p><p>몇십 년 뒤인 1997년 풍납동 일대에 아파트 단지 공사가 진행되자 다시 술렁이기 시작했어요. 공사 중에 백제 초기 것으로 보이는 유물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에요. 공사는 중단되고, 발굴 작업이 진행되었어요. 그러면서 풍납동 주변이 백제의 수도였고, 풍납동 토성이 백제의 왕성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어요.</p><p><br /></p><p>풍납동 토성에서 가까운 올림픽 공원에도 또 하나의 토성이 있어요. 바로 몽촌토성이지요. 풍납동 토성과 함께 백제 수도의 성으로 추정되는 곳이에요. 몽촌토성 가까이에는 백제 초기 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곳도 남아 있어요. 바로 석촌동 고분군과 방이동 고분군이지요.</p><p><br /></p><p>풍납동 토성과 몽촌토성, 그리고 석촌동 고분군 등은 한성 백제 시대 수도 위치와 당시 백제가 어떤 나라였는지 보여준답니다. 지금부터 한강 유역의 백제 유적을 돌아보며 백제 초기 모습이 어땠는지 알아볼까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17:59:47+09:00</dc:date>
</item>


<item>
<title>백제 초기 모습을 알려주는 풍납동 토성과 몽촌토성</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400s/8</link>
<description><![CDATA[<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37717_5465.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37717_5465.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37717_5465.png" /><br style="clear:both;" />풍납동 토성(서울 송파구)</p><p>문화재청</p><p><br /></p><p>“아파트 공사를 중단해야 한다고요?”</p><p><br /></p><p>“네. 그렇습니다. 유물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p><p><br /></p><p>1997년, 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동 토성 주택가에서 아파트를 짓기 위해 터를 파던 포크레인이 멈추었어요. 땅속에서 백제 유물이 쏟아져 나왔거든요. 역사학자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어요. 이곳에서 다양한 백제 유물이 쏟아져 나온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뒤 이곳은 어떻게 되었을까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17:55:31+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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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em>
<title>역사 속 작은 이야기: 강주룡은 을밀대에 왜 올라갔을까?</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400s/7</link>
<description><![CDATA[<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37414_721.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37414_721.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37414_721.png" /><br style="clear:both;" />을밀대</p><p>국립문화유산연구원</p><p><br /></p><p><br /></p><p><br /></p><p>평양이라고 하면 고구려의 수도로서 평양성을 비롯해 대동문, 보통문, 을밀대 등 여러 문화유산이 떠오르지요. 그렇지만 문화유산뿐만 아니라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인물이 있어요. 바로 강주룡이라는 여성인데, 일제 강점기에 노동자 탄압에 맞서 싸웠던 인물이에요. 1901년 평안북도 강계에서 태어난 강주룡은 14세 때 가난에 쫓겨 가족과 함께 서간도로 이주했어요. 이후 결혼을 했지만 남편이 독립군 활동을 하다가 세상을 떠나면서 국내로 돌아왔어요.</p><p><br /></p><p>강주룡은 부모 형제의 생계를 위해 평양의 고무 공장에서 일하였는데, 어느 날 갑자기 공장 사장이 공장 노동자들의 임금을 깎겠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했어요. 그래서 강주룡은 동료들과 함께 사장의 부당한 행위를 반대하며 일을 그만두고 항의하는 파업 시위를 했어요. 그러자 공장 사장은 일본 경찰을 동원해 이들을 쫓아냈어요.</p><p><br /></p><p>“평원고무공장 사장이 이 앞에 와서 임금을 내리겠다는 선언을 취소하기 전까지 결코 내려가지 않겠습니다.”</p><p><br /></p><p>1931년 5월 29일 아침, 평양의 대표 유적지인 을밀대 지붕 위에서 한 여성이 소리쳤어요. 바로 강주룡이었어요. 그녀는 공장 사장의 부당한 행위를 여러 사람들에게 알리고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12m나 되는 높은 을밀대 지붕까지 올라갔던 것이죠. 목이 터져라 노동자의 권리를 지켜달라는 그녀의 외침도 결국 9시간 만에 끝나게 되었어요. 일본 경찰에 의해 끌려 내려오고 말았지요.</p><p>비록 을밀대 지붕 위에서의 저항 운동은 일본 경찰에 의해 중단되었지만 그녀는 결코 멈추지 않았어요. 계속해서 단식을 이어나가며 임금 깎은 것을 되돌릴 것을 요구했지요. 며칠 뒤 그녀는 건강이 악화되어서 풀려났지만, 몇 달 만에 사망했어요. 비록 그녀의 노력은 당장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그녀의 외침은 큰 울림이 되어 이후의 노동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37496_5479.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37496_5479.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37496_5479.png" /><br style="clear:both;" /><br style="clear:both;" /> </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17:51:43+09:00</dc:date>
</item>


<item>
<title>평양 최고의 경치를 볼 수 있는 을밀대</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400s/6</link>
<description><![CDATA[<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37182_633.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37182_633.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37182_633.png" /><br style="clear:both;" />을밀대</p><p>국립문화유산연구원</p><p><br /></p><p><br /></p><p><br /></p><p>현재 평양시 중구역 금수산 을밀봉 지역에 있는 을밀대는 6세기에 장안성(평양성)이 지어질 때 함께 지어진 정자랍니다. 을밀대는 언덕 벼랑 위에 지어졌는데, 11m 정도 높이의 돌로 쌓은 축대가 정자를 견고히 받치고 있어요. 현재의 건물은 조선 후기 숙종 때 축대를 보수하면서 고쳐 지은 것이지만, 경사면을 정리하여 돌로 석축을 쌓고 그 안쪽을 흙과 돌로 채워 넣는 고구려성의 특징을 볼 수 있답니다.</p><p>을밀대라는 이름의 유래는 다양해요. 을밀이라는 이름을 가진 선녀가 이곳의 아름다운 경치에 반해 하늘에서 내려와 놀았다는 설화가 있고, 또 다른 설화에 따르면 6세기 무렵 고구려 을지문덕 장군의 아들인 을밀 장군이 이곳을 지키며 싸웠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아직까지 확실한 이름의 유래는 알려진 바 없지요.</p><p><br /></p><p>을밀대가 유명한 것은 그곳에서 바라보는 평양의 경치가 정말 아름답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예부터 ‘평양 8경(평양의 아름다운 경치 여덟 가지)’의 하나로 꼽히는 곳이었지요. 그중에서도 우리 조상들은 을밀대의 봄 풍경을 평양 8경 중 으뜸으로 쳤다고 해요. 봄날 을밀대에 오르면 대동강가의 풍경은 물론 평양의 넓은 평야와 주변의 봉우리에 만발한 꽃을 한눈에 볼 수 있지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17:46:36+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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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em>
<title>평양성의 서쪽에 있는 보통문</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400s/5</link>
<description><![CDATA[<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37041_1818.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37041_1818.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37041_1818.png" /><br style="clear:both;" />보통문</p><p>국립문화유산연구원</p><p><br /></p><p><br /></p><p><br /></p><p><br /></p><p>보통문은 대동문과 함께 옛 평양성을 지키던 문이었는데, 건립 초기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오래된 성문 중 하나에요. 대동강변에 있어서 대동문이라고 불린 것처럼 보통문도 보통강가에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에요. 보통강은 평양 시내를 가로지르는 강으로 대동강으로 흘러들어가는 작은 강(지류)이에요.</p><p>지금의 성문은 조선 전기인 1473년 고쳐 지은 것인데, 평양성 서북쪽 방향으로 통하는 관문으로서 국방상·교통상 중요한 위치에 있어서 고구려 시대부터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매우 중요시되었어요. 보통문은 고려 시대 건축 양식을 보여주고 있어요. 그 이유는 조선 시대 이후 여러 차례의 전쟁을 거치면서도 불타지 않고 기존 모습을 유지한 덕분이지요.</p><p><br /></p><p>보통문은 광덕문으로도 불리거나 아침해를 다시 본다는 뜻을 지닌 ‘우양관(又陽關)’이라는 별명도 있었어요. 또 조선 시대에는 ‘신문(神門)’, 즉 귀신같은 문이라고도 불렸대요. 왜냐하면 임진왜란 당시 조선과 명의 연합군이 왜군으로부터 평양성을 되찾기 위한 전투를 벌일 때 불화살이 문에 어지러울 정도로 날았으나 끝내 불에 타지 않아서 그때부터 사람들이 귀신같은 문이라고 불렀다는 이야기가 전해와요.</p><p><br /></p><p>이뿐만이 아니었어요. 6·25 전쟁 때 심하게 폭격을 당한 평양에서 전쟁이 끝났을 때 시내에 온전한 건물이 딱 두 채뿐이었는데, 하나가 은행 건물이고 나머지 하나가 바로 이 보통문이었다고 해요. 정말 귀신같은 문이라고 할 수 있겠죠?</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17:44:32+09:00</dc:date>
</item>


<item>
<title>평양성의 정문 역할을 한 대동문</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400s/4</link>
<description><![CDATA[<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36891_836.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36891_836.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36891_836.png" /><br style="clear:both;" />대동문과 조선 시대 그림 속의 대동문</p><p>국립문화유산연구원, 동북아역사재단</p><p><br /></p><p><br /></p><p><br /></p><p>고구려는 6세기 양원왕 때 군사적으로 방어에 훨씬 더 유리한 지형에 새로운 도성을 건설하기 시작했어요. 약 30년의 공사 끝에 기존 안학궁에서 남서쪽으로 약 8km 떨어진 장안성으로 새로 도성을 옮겼어요. 이 장안성이 바로 고구려의 마지막 도성으로 현재 평양성이라 불리는 곳이에요.</p><p><br /></p><p>대동문은 현재 평양시 대동문동에 있는데, 대동강변에 위치해서 붙여진 이름이에요. 고구려 평양성의 동쪽에 있는 문으로 대동강 남쪽을 연결하는 주요한 교통로였기 때문에 평양성의 여러 성문 가운데 가장 중요하게 여겨졌어요. 대동문 누각에는 ‘읍호루(揖灝樓)’라고 씌어 있는 현판이 붙어 있는데, ‘문의 누각에서 손을 내밀어 대동강의 맑은 물을 떠 올린다.’라는 뜻을 갖고 있어요. 주변 경치와 어울리는 멋진 이름이지요.</p><p>하지만 현판의 멋진 뜻과는 달리 대동문은 여러 차례 전쟁으로 인해 불타는 아픔을 겪었어요. 고려 시대 거란의 침입으로 불탔다가 다시 지어졌고, 조선 시대 병자호란 때에도 불탔어요. 그래서 지금의 문은 조선 후기 인조 때 다시 지어진 것이에요. 이 뿐만이 아니었어요. 6·25 전쟁 때 폭격을 맞아 허물어졌는데, 그 이후에 보수 공사를 해서 지금에 이르고 있어요.</p><p><br /></p><p>고려 시대 기록에 따르면 문 앞에 반원 형태의 옹성이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남아 있지 않아요. 다시 지어질 때 생략된 것이지요. 조선 시대에 그려진 ‘평양성도’ 그림에서는 옹성이 갖춰진 형태의 대동문을 볼 수 있어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17:42:16+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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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안학궁터와 대성산성</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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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36660_3806.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36660_3806.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36660_3806.png" /><br style="clear:both;" />안학궁터와 안학궁 복원 모형</p><p>동북아역사재단, 국사편찬위원회</p><p><br /></p><p><br /></p><p><br /></p><p>475년 고구려 장수왕이 수도를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옮겼을 때 궁궐이었던 안학궁은 우리 역사에서 가장 큰 궁궐로 알려져 있어요. 궁궐 전체는 마름모꼴로 한 변이 622m, 전체 둘레는 2,488m로 조선 시대 첫 번째 궁궐로 꼽히는 경복궁보다 넓었어요. 특히 안학궁터 발굴 조사에 따르면 안학궁에서 왕이 업무를 보던 중궁 1호 궁전의 전면 길이는 87m로 경복궁의 근정전보다 두 배 이상 큰 규모였어요. 안학궁은 567년 평원왕 때 장안성(평양성)으로 성을 옮길 때까지 왕이 거주하던 궁성으로 사용되었는데, 현재는 궁터만 남아있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36713_5192.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36713_5192.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36713_5192.png" /><br style="clear:both;" />평양의 문화 유적</p><p><br /></p><p><br /></p><p><br /></p><p>고구려는 주변 나라의 침략에 대비한 방어 체제가 독특했어요. 평소에는 평지성에서 생활을 하다가 전쟁이 나면 평지성 옆에 있는 산성으로 주민들을 대피시키고 이곳에서 침략 세력에 맞서 장기전을 하였어요. 이처럼 고구려는 평지성-산성을 짝을 지어 방어 체제를 만들었지요. 평양 천도 후에도 이러한 체제는 계속 유지되었어요. 평소에는 안학궁에서 생활하다가 외적이 침입해 오면 맞서 싸우기 위해 옆에 대성산성을 쌓았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36742_8584.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36742_8584.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36742_8584.png" /><br style="clear:both;" />대성산성 성벽(평양직할시 대성구역)</p><p>동북아역사재단</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17:39:16+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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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주몽의 무덤으로 알려진 동명왕릉</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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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36356_6859.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36356_6859.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36356_6859.png" /><br style="clear:both;" />동명왕릉</p><p>국립문화유산연구원</p><p><br /></p><p>평양시 남쪽 역포구역 용산리에 위치한 동명왕릉은 고구려 시조 주몽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어요. 부여에서 남쪽으로 내려온 주몽은 졸본(현재의 중국 랴오닝성 환런 지역)에 터를 잡고 기원전 37년에 고구려를 세웠어요. 이후 나라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던 주몽은 기원전 19년에 세상을 떠났어요. 그런데 졸본에 있어야 할 주몽의 무덤이 왜 평양에 있을까요?</p><p><br /></p><p>졸본에서 평양까지는 수백 킬로미터가 넘는 먼 거리거든요. 역사학자들은 5세기에 고구려가 두 번째 수도였던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수도를 옮길 때 시조 주몽의 무덤도 함께 옮긴 것으로 추정하고 있어요. 왜냐하면 현재 동명왕릉의 무덤 형식을 볼 때 4∼5세기의 것으로 보이거든요.</p><p><br /></p><p>고구려의 무덤은 초기에 돌무지무덤이 유행하다가 나중에는 굴식 돌방무덤으로 바뀌었어요. 동명왕릉은 이 두 가지 요소가 다 있어서 두 무덤 양식이 바뀌는 과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36398_6963.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36398_6963.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36398_6963.png" /><br style="clear:both;" />고구려의 초기 무덤(돌무지무덤 양식의 산성하고분군)과 굴식 돌방무덤의 구조</p><p>동북아역사재단, 국사편찬위원회</p><p><br /></p><p><br /></p><p><br /></p><p>무덤의 구조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2단의 돌로 만든 기단 위에 흙을 쌓아 올린 돌기단 흙무덤이에요. 기단돌의 높이는 1.5m, 현재 남아 있는 봉분(흙으로 덮인 부분)의 높이는 6.5m로서 무덤의 높이가 8.15m에 이르는데, 원래는 1m 정도 더 높았던 것으로 보고 있어요. 무덤의 내부는 널길을 거쳐 앞돌방, 널(관)이 있는 널방으로 되어 있어요. 널방의 벽과 천장에는 연꽃무늬의 벽화가 그려져 있는데, 안타깝게도 대부분 떨어지거나 지워져 없어지고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어요.</p><p><br /></p><p>비록 고구려는 7세기에 나당 연합군의 공격으로 멸망했지만, 동명왕릉은 그 이후에도 많은 사람들에 의해 보호받았어요. 기록에 따르면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에도 고구려 시조의 무덤이라고 하여 매년 후하게 제사를 지냈다고 해요.</p><p><br /></p><p>유엔(UN)의 산하기구인 유네스코(UNESCO)에서는 보존할 가치가 있는 세계적인 문화유산을 매년 지정하고 있어요. 이를 유네스코 세계유산이라고 하지요. 북한에는 2개의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있는데, 첫 번째가 2004년에 지정된 ‘고구려 고분군’이고, 두 번째가 2013년에 지정된 ‘개성의 역사 기념물과 유적’이에요. 동명왕릉은 ‘고구려 고분군’에 속한 약 30개의 무덤 중 하나랍니다.</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17:33:34+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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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평양의 문화유산</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400s/1</link>
<description><![CDATA[<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35858_1734.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35858_1734.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35858_1734.png" /><br style="clear:both;" />대동문</p><p>국립문화유산연구원</p><p><br /></p><p>“폐하! 지난번에 논의하신 것처럼 평양은 대동강 유역의 평야를 끼고 있어서 생산물이 풍부한 곳이고, 대동강을 통해 바다로 진출하기에도 유리한 곳이라고 생각됩니다.”</p><p><br /></p><p>“내 뜻도 그러하다. 이제 수도를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옮기도록 하라.”</p><p>평양은 고구려의 세 번째 수도였어요. 장수왕 때 국내성을 대신해 새로운 수도가 된 이후 약 240여 년 동안 고구려의 수도로 번성했지요. 그래서 평양에는 고구려의 문화유산이 많이 남아 있어요. 당장은 가기가 어렵지만 통일이 된다면 많은 사람들이 찾는 여행 명소가 될 거에요. 우리 그때를 기다리며 평양의 여러 문화유산을 살펴보도록 해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17:25:06+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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