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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한국의 역사, 지금나우, 1555-0001 &amp;gt; 고대사 &amp;gt; 고대사 500년대</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500s</link>
<language>ko</language>
<description>고대사 500년대 (2026-07-20 22:36:22)</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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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계백을 넘어선 김유신</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500s/43</link>
<description><![CDATA[<p>황산벌에 도착한 신라군의 공격이 시작되었어요. 죽음을 각오한 백제군은 있는 힘을 다해 싸웠고, 네 번 싸워 네 번 모두 승리했어요. 예상보다 강한 백제군의 저항에 신라군의 피해가 늘어났어요.</p><p><br /></p><p>신라군의 피해가 커지자 김유신은 크게 당황했어요. 계속된 패전으로 군사들의 사기도 크게 떨어졌고, 게다가 당과 만나기로 약속한 날짜도 지키기 힘들어졌어요.</p><p><br /></p><p>고심하던 김유신은 화랑을 전장에 보내 싸우게 했어요. 김유신의 동생인 김흠순의 아들 반굴이 힘껏 싸우다 죽었어요. 반굴이 죽자 이번에는 김유신의 조카 김품일이 16세의 아들 관창을 시켜 선봉에 서게 하였어요.</p><p><br /></p><p>“계백은 어디 있느냐? 비겁하게 숨어있지 말고 정정당당하게 나와서 나와 결판을 내자.”</p><p><br /></p><p>호기롭게 창을 휘두르며 백제군 진영을 휘젓던 관창은 백제군에게 사로잡혀 계백 앞으로 끌려왔지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4502_93.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4502_93.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4502_93.png" /><br style="clear:both;" />계백과 관창(백제군사박물관)</p><p><br /></p><p>계백이 투구를 벗게 하니 관창이 어리고 또한 용기가 있음을 아끼어 차마 죽이지 못하였어요.</p><p><br /></p><p>“신라에게 우리 백제가 대적할 수 있겠는가? 어린 소년도 이와 같거늘 하물며 장정들이랴!”</p><p><br /></p><p>계백은 속으로 탄식하며 관창을 돌려보냈어요. 신라군으로 돌아간 관창은 아버지 품일에게 간단히 인사만 한 후 말을 타고 또다시 백제군으로 쳐들어갔어요. 그리고 다시 사로잡혔지요.</p><p><br /></p><p>“내 너를 살려 보내줬거늘 어찌 다시 온 것이냐? 나의 머리를 베고 싶다면 더 커서 장수가 된 후에 다시 찾아오너라.”</p><p>“또 나를 살려 돌려보낸다면 날카로운 창과 말을 준비해 다시 올 것이다. 그대에게 패했으니 더는 욕보이지 말고 죽여라.”</p><p><br /></p><p>계백은 어쩔 수 없이 관창의 목을 베어 말에 실어 신라군 진영으로 보냈어요. 관창의 목을 본 신라군은 어린 화랑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며 분노하였어요. 이런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김유신이 때맞춰 신라 군사들에게 외쳤지요.</p><p><br /></p><p>“신라의 군사들이여! 어린 화랑들이 죽음으로서 나라에 충성을 다하고 있거늘 그대들은 어찌 백제군을 두려워하여 몸을 사린단 말인가. 이들의 죽음 앞에 그대들은 부끄럽지도 않단 말인가? 그대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싸워준다면 내 오늘 밤 백제를 쳐서 없앨 것이다!”</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4541_4348.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4541_4348.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4541_4348.png" /><br style="clear:both;" />신라군과 백제군의 전투</p><p>백제군사박물관</p><p><br /></p><p>관창의 장렬한 죽음을 본 신라군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어요. 5만의 군사가 물밀 듯이 백제군을 공격하였어요. 황산벌은 성난 신라군과 나라의 최후를 막으려는 백제군의 함성과 비명으로 가득 찼어요. 그러나 적은 수의 백제군은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어요. 하루 동안 벌어졌던 황산벌 전투는 결국 백제군의 패전으로 끝났어요. 계백도 부하들과 함께 황산벌에서 전사하고 말았지요.</p><p><br /></p><p>마지막 희망이었던 계백의 5천 결사대가 패하자 나당 연합군을 막을 백제의 군대는 더 이상 없었어요. 이윽고 백제의 수도 사비성이 나당 연합군에게 포위되었고, 얼마 저항도 못하고 함락되었지요. 사비성에서 웅진성으로 도망갔던 의자왕도 곧 항복하고 말았어요. 700여 년 동안 유지되어온 백제의 역사는 결국 황산벌 전투 이후 허무하게 막을 내리고 말았어요.</p><p><br /></p><p>김유신의 지략으로 신라군은 계백을 넘어 오랜 백제와의 승부를 낼 수 있었어요. 만약 신라군이 계백의 백제군에게 큰 피해를 입었다면 전쟁은 어떤 방향으로 전개되었을까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4571_0292.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4571_0292.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4571_0292.png" /><br style="clear:both;" />황산벌의 모습</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22:36:22+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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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계백에게 의지하는 의자왕</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500s/42</link>
<description><![CDATA[<p>고심하던 의자왕과 귀족들은 결국 흥수의 말을 믿지 않았어요. 백제 조정에서 시간을 낭비하며 옥신각신 하는 사이에 당군은 해안을 수비하던 백제군을 물리치고 기벌포에 상륙하였고, 신라군은 탄현을 넘어 사비성으로 진격하고 있었어요.</p><p><br /></p><p>두 나라 군대의 빠른 움직임에 다급해진 의자왕은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거렸어요. 의자왕은 어쩔 수 없이 계백을 불러 5천 결사대로 김유신의 신라군을 막으라는 명령을 내렸어요. 적은 군사로 5만의 신라군을 막아야 하는 계백은 비장한 각오를 하였지요.</p><p>“나라의 미래를 알 수 없다. 내 처와 자식들이 외적에게 잡혀 노비가 될까 염려가 된다. 살아서 치욕을 당하는 것보다 죽어서 혼이라도 편한 것이 나을 것이다.”</p><p><br /></p><p>계백은 처와 자식을 모두 죽이고 5천 결사대와 함께 황산벌로 출전하였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4207_8636.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4207_8636.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4207_8636.png" /><br style="clear:both;" />백제군과 목책(백제군사박물관)</p><p><br /></p><p>계백은 신라군이 황산벌에 도착해 먼저 수비하기에 좋은 세 곳을 골라 목책을 세웠어요. 계백은 결사대에게 큰 소리로 비장하게 외쳤어요.</p><p><br /></p><p>“지난 날 구천은 5천 명으로 오나라 70만의 무리를 격파하였다. 오늘 마땅히 힘써 싸워 승리함으로써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자.”</p><p><br /></p><p>“와! 와!”</p><div><br /></div>]]></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22:30:28+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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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의자왕의 독재와 백제의 혼란</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500s/41</link>
<description><![CDATA[<p>백제 의자왕은 즉위 초기 고구려와 연합하여 신라 북쪽의 30개 성을 빼앗고, 대야성을 점령하면서 백제 중흥을 이루는 듯 하였어요. 그러나 의자왕은 귀족들을 정치에서 제외시키고 자신의 아들 41명을 최고 관직에 임명하는 등 가까운 사람 중심으로 나라를 운영하고자 했지요.</p><p><br /></p><p>의자왕이 권력을 독점하려하자 귀족 세력이 거세게 반발하였어요. 나라의 지도층은 분열되고 의자왕이 점차 사치에 빠지자 백제의 국력이 크게 약해졌어요.</p><p><br /></p><p>성충이나 흥수 같은 충신들이 의자왕의 잘못된 정치를 말리자 이들을 옥에 가두었어요. 이를 본 백성들의 마음도 점차 멀어져 갔지요.</p><p><br /></p><p>혼자서 백제를 공격할 만한 힘이 없었던 신라는 오래 전 당에 지원군을 요청하였어요. 김춘추가 지원군을 요청한지 16년 만에 당이 군대를 보내면서 나당 연합군이 만들어졌어요. 백제가 흔들리는 틈을 노린 것이었어요.</p><p><br /></p><p>당의 13만 대군을 태운 배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백제를 향했어요. 목적지는 백제의 수도 사비를 끼고 흐르는 백강(지금의 금강) 하구의 기벌포였어요. 이에 발맞춰 김유신이 이끄는 5만의 신라 군사들도 탄현을 향해 출정하였어요.</p><p>나당 연합군이 백제로 오고 있다는 소식이 백제 의자왕에게 전해졌어요. 의자왕은 감옥에 갇혀있던 흥수에게 사람을 보내 어떻게 방어해야할지를 물었어요.</p><p><br /></p><p>“기벌포와 탄현은 우리나라 요충지로 한 명의 군사와 한 자루의 창을 가지고도 1만 명을 막을 수 있는 곳입니다. 군사를 보내 두 곳을 철통같이 지키소서.”</p><p><br /></p><p>기벌포는 바닷물이 빠지면 넓은 갯벌이 생겨나 군사들이 상륙하기가 어렵고 수비하기에 좋은 곳이었어요. 탄현도 높고 좁은 골짜기로 이어져 있었는데, 이곳으로 신라군을 유인하여 공격한다면 적은 수의 군사로 손쉽게 큰 피해를 줄 수 있는 곳이었지요. 하지만 몇몇 신하들은 반대하였어요.</p><p><br /></p><p>“많지 않은 군사를 둘로 나누는 것은 스스로 패전을 부르는 방법입니다. 흥수는 죄인입니다. 임금과 나라를 원망하는 자의 말을 믿을 수 없습니다.”</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4060_214.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4060_214.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4060_214.png" /><br style="clear:both;" />기벌포, 탄현, 황산벌의 위치</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22:27:52+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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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김유신, 황산벌의 5천 결사대를 넘어서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500s/40</link>
<description><![CDATA[<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3893_0981.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3893_0981.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3893_0981.png" /><br style="clear:both;" />김유신 묘(경북 경주시)</p><p><br /></p><p>“장군! 5만 군사를 한꺼번에 보낸다면 5천의 백제 군사야 쉽게 물리칠 수 있을 터인데 어찌 이리 시간만 보내고 계신지요?”</p><p><br /></p><p>“죽음을 각오한 백제군을 가볍게 보면 우리 군의 피해가 클 것이오. 우리 군대의 피해를 줄이면서 이길 방법은 없겠소?”</p><p><br /></p><p>황산벌에서 적은 수의 백제의 결사대에 맞선 김유신은 어떤 고민을 했을까요? 자신의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어떤 방법을 사용했을까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22:25:07+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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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em>
<title>역사 속 작은 이야기: 삼국 시대 사람들이 주인공인 일본 축제</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500s/39</link>
<description><![CDATA[<p>매년 11월, 일본의 오사카에서는 고대 한반도의 문화가 일본에 전해진 것을 기념하는 지역 축제가 열려요. 이 축제의 이름은 ‘시텐노사〔四天王寺〕왓소(ワッソ) 축제’이지요. 이 행사는 고대 일본의 국제 교류를 기념하는 의미에서 매년 열리고 있어요. ‘왓소’는 축제를 할 때 가마를 메고 ‘왓쇼이(ワッショイ)’라고 외치는 힘찬 구령에서 나온 것으로, 이 말의 어원은 한국어의 ‘왔소’라고 해요.</p><p>이 축제는 수천 명의 행렬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요. 고구려의 승려 혜자를 선두로 하여 가야의 우륵, 백제의 왕인 등 삼국 시대에 왜로 건너와 선진 문화를 전해준 인물로 분장한 사람들이 시텐노사라는 절까지 행진하지요. 장대한 행렬은 쇼토쿠 태자를 비롯한 문무 대신 등 일본을 대표하는 인물로 분장한 사람들의 영접을 받으며 시텐노사에 도착하면 끝이 난답니다.</p><p><br /></p><p>이러한 것을 보면 삼국의 문화가 얼마나 많이 왜에 전해졌는지 짐작할 수 있지요. 혹시 여러분이 일본을 여행하게 되면 그 여행지에 한반도에서 건너온 문화가 있는지 살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추억이 될 수 있어요. 한번 찾아보면 생각보다 꽤 많은 것들이 일본에 전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거예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3703_4419.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3703_4419.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3703_4419.png" /><br style="clear:both;" />시텐노사[四天王寺] 왓소(ワッソ) 축제 모습</p><p>문화체육관광부 해외문화홍보원</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22:21:56+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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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em>
<title>왜에 전해진 신라와 가야 문화</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500s/38</link>
<description><![CDATA[<p>신라는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왜와 문화를 교류한 흔적이 많지 않아요. 백제와 아주 친하게 지냈던 왜의 입장에서는 백제와 적대적인 관계에 있던 신라를 대하기가 껄끄러웠을 거예요. 그러나 신라도 배 만드는 기술과 저수지 쌓는 기술 등을 왜에 전해 주었답니다.</p><p>한편, 우리나라의 국립중앙박물관에는 금동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이 있어요. 일본의 국보 1호인 고류사 목조 미륵보살 반가사유상과 생김새가 매우 비슷한 것으로도 유명하죠. 그런데, 우리나라의 금동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은 어느 나라에서 만든 것인지 확실히 알 수가 없어요.</p><p><br /></p><p>그렇지만 역사학자들은 금동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이 신라 또는 백제에서 만들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어요. 특히 일본의 목조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이 있는 고류사가 신라계 사람에 의해 세워졌다는 점, 신라에서 온 불상을 고류사에 모셨다는 『일본서기』의 기록, 한국에서 많이 나는 적송(붉은빛을 띤 소나무)으로 만들어진 사실 등으로 보아 신라에서 만들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3519_5186.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3519_5186.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3519_5186.png" /><br style="clear:both;" />삼국 시대 금동 미륵보살 반가 사유상과 일본 고류사 목조 미륵보살 반가 사유상</p><p>문화재청, 문화유산채널</p><p><br /></p><p>한편 모양이 섬세하고 치밀한 것이 특징인 일본의 토기 스에키는 모양이나 제작 기법이 가야의 토기와 비슷해요. 일본 고분에서 나오는 여러 가지 마구(말을 탈 때 필요한 도구)와 갑옷, 투구 등도 가야 고분에서 출토된 것과 아주 유사하지요. 이처럼 가야도 삼국과 마찬가지로 왜에 여러 문화를 전해주었답니다.</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3553_3343.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3553_3343.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3553_3343.png" /><br style="clear:both;" />가야의 토기와 일본의 스에키</p><p>한국교육학술정보원 에듀넷</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22:19:30+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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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왜에 전해진 고구려 문화</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500s/37</link>
<description><![CDATA[<p>일본 나라 지역에는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인 7세기 말 또는 8세기 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다카마쓰 고분이 있어요. 이 고분의 벽에는 주름치마를 입은 여성들이 그려져 있어요.</p><p><br /></p><p>그런데, 허리에 띠를 맨 긴 저고리에 색동 주름치마를 입은 벽화 속 여인들의 모습은 고구려 수산리 고분의 벽화와 매우 비슷해요. 수산리 고분은 5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어요. 이처럼 왜는 백제뿐 아니라 고구려 문화의 영향도 많이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3314_5992.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3314_5992.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3314_5992.png" /><br style="clear:both;" />고구려 수산리 고분 벽화</p><p>동북아역사재단</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3343_0916.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3343_0916.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3343_0916.png" /><br style="clear:both;" />일본 다카마쓰 고분 벽화</p><p>동북아역사재단</p><p><br /></p><p>삼국 시대에 왜로 건너가 문화를 전해준 사람 중에는 승려가 많았어요. 해박한 지식을 갖춘 지식인으로서 높은 수준의 문화를 전파하는 데 적임자였기 때문이지요. 왜로 건너간 삼국의 승려들은 왜 왕실의 융숭한 대접을 받았어요.</p><p>7세기 초에 고구려 승려 담징은 왜에 종이와 먹, 물감, 맷돌을 만드는 방법을 알려 주었어요. 또한 호류사라는 절의 금당 벽화는 고구려의 담징이 그렸다고 전하는데, 1949년 화재로 불에 탔으나 현재 일부 복원되어 있어요.</p><p><br /></p><p>고구려의 승려 혜자는 6세기 말에 왜로 건너가 요메이 국왕의 맏아들이자 왕위 계승 예정자인 쇼토쿠 태자의 스승이 되었어요. 당시 불교는 동아시아 문화권을 형성하는 중요한 문화적 매개체였기 때문에 쇼토쿠 태자는 혜자에게 불교의 깊은 진리를 배우고자 했던 것으로 짐작돼요.</p><p><br /></p><p>이 무렵 백제의 혜총도 일본으로 건너가 혜자와 마찬가지로 쇼토쿠 태자의 스승이 되었어요. 혜자와 혜총, 두 승려는 쇼토쿠 태자가 세운 호코사라는 절에 머무르면서 왜의 불교 발전에 큰 역할을 하였어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22:15:58+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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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em>
<title>왜에 전해진 백제 문화</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500s/36</link>
<description><![CDATA[<p>삼국은 중국과 서역 외에도 동쪽으로 이웃해 있던 왜, 즉 지금의 일본과 교류했어요. 우리 조상들은 삼국 시대 이전부터 새로운 생활 터전을 개척하기 위해 왜로 건너갔고, 그 이후에는 왜의 요청으로 학자와 승려, 기술자들이 많이 건너갔지요. 그래서 일본 고대 문화의 유적과 유물 중에는 삼국의 영향을 받은 것들이 많답니다.</p><p><br /></p><p>칠지도는 4세기경 백제왕이 왜왕에게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칼이에요. 양쪽으로 뻗은 6개의 가지와 가운데 날을 합쳐 모두 7개의 갈래로 나뉘어 있어 칠지도라는 이름이 붙었어요. 길이 74.9cm의 칼 앞뒤 표면에는 62개의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주요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아요.</p><p><br /></p><p><br /></p><p>이전에는 이런 칼이 없었는데 백제왕의 어진 지시를 받들어 왜왕에게 만들어 주노니 후세에 길이 전하라.</p><p><br /></p><p>당시 왜는 철기 문화 수준이 낮았기 때문에 백제의 철기 문화에 크게 의존하였어요. 백제에 온 왜의 사신이 돌아갈 때 쇳덩이 40개를 받았고, 그 후에도 백제가 칼과 거울을 왜에 보내 준 기록이 『일본서기』에 남아 있어요. 칠지도는 철을 매개로 하여 백제와 왜가 교류했다는 사실을 알려 주는 대표적인 유물이에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3020_9157.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3020_9157.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3020_9157.png" /><br style="clear:both;" />칠지도(일본 나라 이소노카미 신궁 소장)</p><p>동북아역사재단</p><p><br /></p><p>또한 백제는 4세기에 아직기가 일본 태자에게 한자를 가르쳤고, 왕인은 『논어』와 『천자문』을 전하고 가르쳤어요. 6세기에는 노리사치계를 파견하여 불상과 불경을 전해주며 불교를 전파하였어요.</p><p>일본에는 지금 남아 있는 건물 중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인 호류사라는 절이 있어요. 당시 7세기 초에 왜를 실질적으로 다스리던 쇼토쿠 태자가 지은 절인데, 백제와 고구려의 기술자들이 공사에 참여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어요. 그래서인지 백제의 정림사지 5층 석탑과 일본의 호류사 5층 석탑을 비교해 보면 재질과 규모는 다르지만 두 탑이 비슷한 모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어요.</p><p><br /></p><p>현재 호류사에 있는 불상과 공예품 역시 대부분 백제의 기술자들이 만들었다고 전해져요. 일본이 자랑하는 백제 관음상도 백제의 영향이 강한 불상이지요. 쇼토쿠 태자는 삼국과 중국의 불교 문화를 받아들여 일본에 아스카 문화라고 불리는 불교 문화를 꽃피웠어요.</p><p><br /></p><p>그런데, 백제는 왜 자신의 선진 문화를 왜에 전해주었을까요? 백제가 왜에 각종 문화를 전한 것이 단지 은혜를 베푸는 차원은 아니었어요. 삼국이 서로 나뉘어 다투던 시기에 백제는 왜와 긴밀한 군사적 동맹 관계를 맺고 고구려와 신라에 대항하였지요.</p><p><br /></p><p>이때 왜는 백제가 어려울 때마다 대규모의 군대를 파견하여 도왔어요. 어떤 이유에서 왜가 백제를 도왔을까요? 왜가 큰 이득도 없는데 무작정 의리 때문에 백제와 군사적 동맹 관계를 맺지는 않았겠죠?</p><p><br /></p><p>즉, 당시 문화 전파의 배경에는 군사적 지원이 필요한 백제와 선진 문물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는 왜의 계산이 깔려 있었다고 할 수 있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3059_4977.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3059_4977.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3059_4977.png" /><br style="clear:both;" />백제 정림사지 5층 석탑(충남 부여군)</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3150_848.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3150_848.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3150_848.png" /><br style="clear:both;" />일본 호류사 5층 목탑</p><p>동북아역사재단</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22:12:45+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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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삼국 및 가야의 문화 교류</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500s/35</link>
<description><![CDATA[<p>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은 중국 및 서역과 교류하면서 문화를 발전시켰어요. 고구려는 지리적으로 가까운 중국 북조의 문화를 받아들였고, 바다를 통해 남조와도 교류하였어요. 또 중앙아시아의 여러 민족과도 활발히 교류하였지요.</p><p><br /></p><p>백제도 중국 동진을 비롯한 남조와 활발하게 교류하였어요. 신라는 초기에 고구려와 백제를 통해 중국 문화를 수용하였다가 한강 유역을 차지한 이후에는 중국과 직접 교류했어요. 가야도 바다를 통해 중국, 왜와 교류하면서 문화를 발전시켰어요.</p><p><br /></p><p>삼국은 나라의 발전을 위해 서로 경쟁 또는 협력하는 가운데 왜와도 관계를 맺었어요. 참, 당시에 일본은 ‘왜’라는 이름으로 불렸어요. 고구려, 백제, 신라 등이 왜와 교류하는 과정에서 중국과 삼국의 선진 문물이 일본으로 전해져 일본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어요.</p><p><br /></p><p>특히 삼국 가운데 왜와 가장 친밀하게 지냈던 나라는 백제였어요. 그래서 백제가 여러 선진 문물을 일본에 전파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하였어요. 백제는 불교 경전, 불상 등을 전해주는 것은 물론 제작 방법까지 알려주어 일본의 불교 문화 발전에 기여하였지요. 당시 왜에서는 ‘백제 가람’이라는 절 짓는 건축 양식이 유행할 정도였다고 해요.</p><p>이 밖에 아직기, 왕인 같은 학자들이 왜로 건너가 한자와 유교 경전을 가르쳤고, 화가와 공예 기술자들도 왜에서 활동하였어요. 고구려에서는 담징이 일본에 종이와 먹을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2562_7061.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2562_7061.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2562_7061.png" /><br style="clear:both;" /> </p><p><br /></p><p><br /></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2635_8073.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2635_8073.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2635_8073.png" /><br style="clear:both;" />일본 호류사에 있는 백제 관음상</p><p>백제의 불교와 미술이 일본에 전파된 것을 알 수 있다.</p><p>동북아역사재단</p><p><br /></p><p><br /></p><p><br /></p><p>고구려의 승려 혜자는 왜에서 당시 정치적 실권을 갖고 있던 쇼토쿠 태자의 스승이 되었어요. 쇼토쿠 태자는 일본의 불교 문화를 꽃피운 인물인데, 아무래도 스승이었던 혜자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지요. 신라에서는 배 만드는 기술과 제방 쌓는 기술을 왜에 전해주었어요.</p><p><br /></p><p>가야 또한 철로 만든 갑옷을 비롯하여 토기 제작 기술을 전하였어요. 이와 같이 삼국과 가야의 문화는 왜의 문화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지요. 그러면 왜에 전해진 삼국 및 가야의 문화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볼까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2699_0724.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2699_0724.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2699_0724.png" /><br style="clear:both;" /> </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22:05:10+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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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일본에 전해진 삼국 및 가야의 문화</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500s/34</link>
<description><![CDATA[<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2193_4745.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2193_4745.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2193_4745.png" /><br style="clear:both;"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국보 제83호)과 고류사 목조미륵보살반가사유상</p><p>문화재청, 문화유산채널</p><p><br /></p><p>“우리 백제에서 유행하는 불교를 이웃하고 있는 왜(일본)에도 전하도록 하라.”</p><p><br /></p><p>“네. 폐하! 불상과 불경을 전해주어 왜인들도 불교를 믿을 수 있게 하겠습니다.”</p><p><br /></p><p>삼국 시대에 백제는 불상이나 절을 짓는 방법 등 다양한 불교 문화를 왜(일본)에 전해주었어요. 그래서 일본의 불교 문화 발전에 큰 도움을 주었지요. 고구려, 신라도 왜에 여러 문화를 전해주었어요. 삼국 시대에 삼국이 일본에 전해준 문화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살펴볼까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21:57:01+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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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역사 속 작은 이야기: 낙화암과 삼천 궁녀이야기는 진짜일까?</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500s/33</link>
<description><![CDATA[<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1986_9984.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1986_9984.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1986_9984.png" /><br style="clear:both;" />백마강에서 바라본 낙화암과 낙화암 꼭대기에 있는 백화정(부여군청)</p><p><br /></p><p>부소산성의 한편은 백마강에 의지하고 있어요. 부소산과 백마강이 만나는 곳에 낙화암이란 높은 절벽이 있어요. 낙화암에는 이야기 하나가 전해져 오고 있어요.</p><p><br /></p><p>“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을지언정 외적의 손에 죽지 않겠다.”</p><p><br /></p><p>나당연합군에 의해 사비성이 함락되었어요. 이때 성안에 있던 후궁과 궁녀들이 부소산성으로 도망을 가다 큰 바위에 이르렀어요. 궁녀들은 외적에게 희롱당하는 것을 거부하고 치마를 뒤집어쓰고 백마강으로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어요.</p><p>이 이야기는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어요. 삼국유사에는 궁녀들이 강으로 뛰어든 이 바위를 ‘타사암’이라 쓰고 있어요. 그런데 삼국유사의 기록은 사람들의 입과 입을 통해 전해지면서 궁녀들의 수가 갑자기 삼천 명으로 크게 늘어났어요. 바위 이름도 궁녀를 떨어지는 꽃에 비유하여 낙화암으로 바뀌었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2018_4689.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2018_4689.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2018_4689.png" /><br style="clear:both;" />낙화암 고란사 극락보전 벽화(충남 부여군)</p><p><br /></p><p>왜 궁녀들의 수가 갑자기 삼천 명으로 늘어났을까요? 백제보다 인구수가 5배나 많았던 조선 시대에도 궁녀는 가장 많았을 때조차 700명을 넘지 못했어요. 그런데 백제에 3천 명의 궁녀가 있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지요. 사람들은 삼국유사의 이야기를 더 부풀리고 과장해서 전한 것이에요.</p><p>이것은 아마도 백제가 멸망한 이유를 제대로 나라를 돌보지 않은 의자왕에게서 찾으려는 사람들의 마음이 반영된 결과로 보여요. 한때 총명하고 군사를 잘 이끌어 신라를 벌벌 떨게 했던 의자왕! 그는 외적에 나라를 빼앗긴 책임 때문에 죽어서도 오랜 시간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고 있는 셈이지요.</p><p><br /></p><p>백제의 마지막 수도 부여(사비)에는 강한 백제를 이끌던 성왕의 모습과 허무하게 나라를 잃은 의자왕의 모습이 모두 남아 있어요. 어떤 모습의 지도자가 나라를 이끌어야 부강해지고 백성들의 삶이 편안해질까요? 성왕과 의자왕, 백제의 두 국왕의 모습을 비교해 보면서 그 답을 찾아보아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21:53:55+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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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백제의 마지막 모습이 새겨진 부여 정림사지 5층석탑</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500s/32</link>
<description><![CDATA[<p>백제가 멸망한 후 융성했던 사비의 많은 것들이 파괴되고 사라졌어요. 웅장했던 궁궐도, 공을 들여 만들었던 절과 탑도 모두 사라졌어요. 다만 정림사지 5층 석탑은 지금도 남아 세련된 백제의 멋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어요.</p><p><br /></p><p>정림사는 성왕이 사비로 도읍을 옮길 때 세운 절이에요.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왕궁의 정남쪽 도시 한가운데에 절을 세웠어요. 정림사 한가운데 만든 5층 석탑은 높이가 8m가 넘는 아주 큰 탑이에요. 익산 미륵사지석탑과 함께 지금까지 남아있는 백제 석탑 중 하나에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1775_7384.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1775_7384.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1775_7384.png" /><br style="clear:both;" />정림사지 5층 석탑과 대당평백제국비명 탁본(국립중앙박물관)</p><p><br /></p><p>석탑의 1층 탑신과 옥개받침에는 '대당평백제국비명'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요. '당이 백제를 평정하여 비를 새긴다'는 뜻이죠. 신라와 연합해 백제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당의 총사령관 소정방이 자신의 공을 남기기 위해 새겨 놓은 것이에요.</p><p><br /></p><p>탑에는 총 2,126자를 새겼는데, 백제를 정벌한 까닭과 당 황제와 장수들을 칭찬하는 내용, 의자왕을 비롯해 백제인 포로와 영토의 처리 방법 등을 담고 있어요. 소정방은 백제 도읍의 한가운데에 있던 정림사의 석탑에 글자를 새겼어요. 이것은 백제가 멸망하였다는 것을 백성들에게 널리 알리고, 나라를 되찾으려는 백성들의 의지를 꺾고자 한 것이에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1807_8149.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1807_8149.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1807_8149.png" /><br style="clear:both;" />백제 오천결사대 충혼탑(충남 부여군)</p><p><br /></p><p>부여의 남쪽 끝에는 신라군에 맞서 싸우다 목숨을 잃은 계백과 오천결사대의 넋을 기리는 충혼탑이 세워져 있어요. 탑에는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전쟁터로 향하던 백제 병사들의 모습을 볼 수 있어요. 부여에는 적과 당당히 맞서 싸우다 목숨을 잃은 백제 병사들의 처절함과 나라 잃은 백성의 서러움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요.</p><div><br /></div>]]></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21:50:20+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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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성왕의 원대한 꿈이 담긴 계획도시 사비</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500s/31</link>
<description><![CDATA[<p>성왕은 사비에 부소산성을 중심으로 나성을 쌓았어요. 나성은 평야 지대에 있는 사비를 방어하기 위해 쌓은 성이에요. 나성은 흙 위에 나뭇잎과 나뭇가지를 놓고 다시 흙을 덮어 다지는 부엽공법으로 쌓았어요. 나뭇잎과 나뭇가지는 흙과 흙을 붙잡아 주고, 빗물이 빠지는 통로 역할을 해 성벽이 쉽게 무너지지 않게 해 주었어요.</p><p><br /></p><p>이중으로 도성을 방어하기 위해 만든 나성은 당시 고구려와 신라의 도성에는 없던 시설이었어요. 나성은 사비가 어떤 곳보다 더 안전하고 살기에 좋은 장소라는 것을 백성들에게 보여주었어요.</p><p><br /></p><p>왕궁의 뒤편에 위치한 부소산성은 외적이 침입해 왔을 때 피신하기 위해 만든 성이에요. 평상시에는 왕실의 정원으로도 사용되었어요.</p><p><br /></p><p>부소산성은 판으로 틀을 만들고 판 안에 서로 다른 흙을 교대로 넣어 다지는 판축공법으로 만든 토성이에요. 백제 사람들은 한성의 풍납토성과 웅진의 공산성도 이 방법을 이용하여 만들었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1422_7118.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1422_7118.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1422_7118.png" /><br style="clear:both;" />부소산성을 쌓는 백성들(백제문화단지)과 복원한 나성의 모습(충남 부여군)</p><p><br /></p><p>나성 안에는 왕궁을 지었어요. 사비의 왕궁 터는 오랫동안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었어요. 그러나 최근 부소산성 아래 관북리 유적이 발견되면서 발굴을 통해 왕궁 터를 추측할 수 있게 되었어요.</p><p><br /></p><p>관북리 유적에서는 왕궁으로 예상되는 대형 건물터와 나무로 지은 창고, 연못, 도로, 배수로가 발견되었어요. 출토된 유물 중에는 40m 길이의 수도관이 눈길을 끌었어요. 기와를 조립해 만든 관을 나무 수조에 연결한 것인데, 산에서 내려오는 물을 모아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만들었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1555_2784.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1555_2784.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1555_2784.png" /><br style="clear:both;" />관북리 대형 건물지(백제세계유산센터)와 관북리 수도시설(국립부여박물관)</p><p><br /></p><p>왕궁을 중심으로 10m가 넘는 남북도로와 동서도로도 확인되었어요. 도로의 좌우에는 하수구 시설도 있었어요. 하수구는 도랑을 파고 양 벽면에 두꺼운 판자를 대어 물이 잘 흘러가게 만들었어요. 잘 정비된 도로망과 집터, 그리고 수도시설을 통해 사비가 오랜 준비를 거쳐 세심하게 건설된 계획도시였음을 알 수 있어요.</p><p><br /></p><p>사비성 한쪽으로는 금강이 굽이쳐 흐르고 있어요. 금강은 사비 방어에 중요한 역할을 했어요. 그렇지만 성왕은 금강을 방어용으로만 사용하지 않았어요. 부소산 서쪽 기슭의 백마강 가에 구드래 선착장을 만들었어요. 구드래항을 이용해 백제는 일본, 중국과 교류를 하였어요. 구드래항은 중국과 일본, 그리고 고구려와 신라에서 온 다양한 사람들이 귀한 물건들을 서로 사고팔기 위해 북적거렸을 거예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1471_6305.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1471_6305.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1471_6305.png" /><br style="clear:both;" />부소산성 아래 구드래항의 현재 모습과 백제금동대향로(문화재청)</p><p><br /></p><p>사비의 능산리 절터에서 발견된 백제 금동 대향로를 통해서도 백제가 여러 나라와 교류했음을 알 수 있어요. 향로에는 16명의 사람과 39마리의 동물이 조각되어 있어요. 그중에는 호랑이와 사슴과 같이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었던 동물도 있지만, 코끼리와 원숭이처럼 우리에게 낯선 동물도 조각되어 있어요. 아마도 백제 사람들은 구드래항에서 만난 다른 나라 사람들을 통해 이 동물들에 대해 알게 되었을 거예요.</p><p><br /></p><p>넓은 세계와 교류하며 국제도시로서 크게 번성했던 사비는 강성한 백제를 원했던 성왕의 꿈이 담겨 있어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21:46:35+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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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성왕, 사비로 도읍을 옮기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500s/30</link>
<description><![CDATA[<p>백제의 첫 도읍지는 한강가의 한성(위례성)이었어요. 500여 년 가까이 고구려와 신라와 경쟁하며 발전하던 백제는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을 받아 한성을 빼앗기고 국왕마저 목숨을 잃었어요. 결국 백제는 고구려의 공격을 피해 급히 도읍을 웅진으로 옮겨야만 했어요(475년).</p><p><br /></p><p>웅진은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한쪽은 금강(백마강)에 의지하고 있어 외적을 막기에 유리한 곳이었어요. 반면에 땅이 좁고 금강이 자주 넘쳐흘러 나라를 다스리기에 불편함도 많았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0824_8694.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0824_8694.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0824_8694.png" /><br style="clear:both;" />공산성과 공주 일대 모습(충남 공주시)</p><p><br /></p><p><br /></p><p>무령왕을 이어 백제를 이끌던 성왕은 강성해진 나라의 힘에 걸맞은 도읍을 원했어요. 성왕은 사비를 주목했어요. 금강 하구에 위치한 사비에는 비교적 넓은 평야가 펼쳐져 백성들이 모여 살기에 좋은 곳이었어요.</p><p><br /></p><p>가까운 바다를 통해 중국이나 일본과 교류하기에도 좋은 곳이었지요. 궁궐을 짓고, 성을 쌓으며 오랜 기간 준비를 끝낸 성왕은 마침내 사비로 도읍을 옮겼어요(538년).</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0887_2646.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0887_2646.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0887_2646.png" /><br style="clear:both;" />백제의 천도</p><p><br /></p><p><br /></p><p>사비로 도읍을 옮긴 성왕은 백제를 더욱 체계적으로 정비해 갔어요. 무왕과 의자왕을 거치면서 백제는 더욱 강성한 나라가 되었어요. 신라에게 빼앗겼던 땅도 많이 되찾을 수 있었지요.</p><p><br /></p><p>하지만 신라와의 경쟁에서 앞선 의자왕이 승리에 취해 한눈을 파는 사이 신라와 당 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해 왔어요. 잦은 전쟁으로 국력이 약해지고, 백성의 믿음을 잃은 의자왕은 막강한 연합군에 맞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했어요. 사비를 버리고 웅진으로 피한 의자왕은 결국 항복을 하고 말았어요. 웅진을 떠나 사비에서 다시 일어난 백제가 다시 웅진으로 돌아가 나라를 잃고 만 것이에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1102_4501.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1102_4501.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1102_4501.png" /><br style="clear:both;" />백제 사비의 복원 모습(백제문화단지)</p><p><br /></p><p>지금의 부여라는 이름 속에는 강한 나라를 꿈꾸며 나라 이름을 ‘남부여’라 불렀던 성왕의 뜻이 남아 있어요. 북방의 강자였던 부여가 지금은 사라졌으나 한반도 안에 남아 그 이름을 전하고 있는 것이에요. 백제 중흥기와 마지막 역사를 모두 지켜본 부여! 그곳에 가면 무엇을 볼 수 있을까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1190_1038.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1190_1038.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1190_1038.png" /><br style="clear:both;" /> </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21:35:42+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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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백제의 마지막 도읍지 부여</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500s/29</link>
<description><![CDATA[<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0531_5887.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0531_5887.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0531_5887.png" /><br style="clear:both;" />정림사지 오층석탑(충남 부여군)</p><p><br /></p><p>“우리의 도읍 한성을 고구려에게 빼앗기고 얼마나 서러웠던가. 우리가 다시 강국이 되어 도읍을 옮기니 나라 이름도 바꾸면 어떠하겠는가?”</p><p><br /></p><p>“백제는 원래 부여에서 시작된 나라이니 ‘남부여’라 하면 어떠하올런지요?</p><p><br /></p><p>“그렇다. 우리는 북방의 강국이었던 부여의 후손이다. 지금부터 우리나라를 ‘남부여’라 부르겠다.”</p><p>강한 백제의 부활을 꿈꾸었던 성왕은 웅진(지금의 공주)에서 사비(지금의 부여)로 도읍을 옮겼어요. 부여는 다시 강국이 된 백제의 도읍지로 적당했을까요? 그곳에는 어떤 문화유산들이 남아 있을까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21:29:11+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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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em>
<title>성왕이 관산성에서 죽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500s/28</link>
<description><![CDATA[<p>성왕은 계속된 전투에 지쳐있을 태자와 군사들이 걱정되었어요. 또한 관산성의 상황을 직접 확인하고도 싶었어요. 성왕은 이들을 위로하기 위해 직접 50명의 호위 군사들과 함께 관산성으로 갔어요.</p><p><br /></p><p>성왕이 관산성으로 오고 있다는 정보가 김무력에게 은밀하게 전해졌어요. 김무력은 하늘이 준 기회라 생각했어요. 백제의 왕을 사로잡는다면 전쟁을 바로 끝낼 수 있었거든요. 김무력은 관산성으로 오는 길목에 군사들을 보내 조용히 기다리게 했어요.</p><p>성왕은 태자를 만날 생각에 급히 말을 몰았어요. 성왕이 이용한 길은 백제 땅이었기에 크게 조심하지 않았어요. 산길을 돌아 관산성에 도착할 무렵 숲 속에서 신라군이 쏟아져 나왔어요. 많은 신라군이 길목을 막고 기습 공격을 하자 성왕은 크게 당황하였어요. 적은 숫자의 군사들로 호위를 받던 성왕은 어처구니없이 신라군의 포로가 되고 말았어요.</p><p><br /></p><p>신라군의 지휘관이었던 도도라는 자가 말에서 내려 붙잡힌 성왕에게 두 번 절을 하고 말하였어요.</p><p><br /></p><p>“왕의 머리를 베게 하여 주소서”</p><p><br /></p><p>“내 목숨을 노비 출신 장수인 네 놈에게 맡길 수는 없다.”</p><p><br /></p><p>“우리나라 법에 따르면 서로의 맹세를 어긴 사람은 국왕이라 할지라도 마땅히 노비의 손에 죽을 수 있습니다.”</p><p><br /></p><p>“내 지금껏 뼈에 사무치는 고통을 참고 살아왔거늘. 구차하게 살고 싶지는 않다. 어서 베어라.”</p><p>성왕은 결국의 도도의 칼에 허무하게 목숨을 잃고 말았어요. 성왕이 처참하게 죽자 백제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지요. 이후 벌어진 전투에서 백제군은 크게 패하고 말았어요. 마지막 싸움에서 백제는 여러 장수와 3만 명에 가까운 군사를 잃는 대패를 했어요. 이로써 신라와 백제의 동맹은 완전히 깨어졌고, 이후 신라와 백제는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원수 사이가 되었지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0318_6989.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0318_6989.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0318_6989.png" /><br style="clear:both;" />신라군에게 붙잡히는 성왕</p><p><br /></p><p>관산성 전투에서 승리한 신라는 한강 유역에서 백제와 고구려를 모두 몰아내고 이 지역을 확실하게 지배할 수 있게 되었어요. 그리고 대가야를 정복하여 낙동강 유역을 차지하였지요. 또 동북쪽으로는 지금의 함경남도까지 진출했어요. 두 강과 함께 넓은 평야를 얻게 된 신라는 이전보다 더 강한 나라를 만들 수 있었어요.</p><p><br /></p><p>진흥왕은 새로 차지한 영토에 비석를 세워 신라의 승리를 기념하였어요. 서울 북한산에 있는 순수비도 진흥왕이 한강 유역을 점령한 후 이 지역을 돌아보며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이랍니다. 진흥왕은 순수비를 세운 후 북한산 꼭대기에 서서 한강을 바라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0349_0523.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0349_0523.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0349_0523.png" /><br style="clear:both;" />진흥왕 시기 신라의 영역</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21:26:08+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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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em>
<title>관산성에서 백제와 신라가 맞서 싸우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500s/27</link>
<description><![CDATA[<p>신라의 배신에 화가 난 성왕은 당시 신라와 경쟁하고 있던 대가야, 그리고 교류가 많았던 왜의 군사들을 불러 관산성을 공격했어요. 관산성은 남쪽으로 추풍령을 넘으면 신라의 수도 금성으로, 대전의 서쪽 탄현을 넘으면 백제의 수도 사비로 바로 넘어갈 수 있는 군사적 요충지였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0057_3388.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0057_3388.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0057_3388.png" /><br style="clear:both;" />관산성의 위치</p><p><br /></p><p>관산성 전투는 3만 백제 연합군의 공격으로 시작되었어요. 백제 연합군의 격렬한 공세에 신라군이 밀리기 시작했어요. 다급해진 진흥왕은 고구려군에 맞서 한강 지역을 지키던 김무력(김유신의 할아버지)과 군사들을 관산성에 투입하였어요.</p><p>구원군이 관산성에 도착해 힘을 합치자 신라군의 사기가 높아졌어요. 신라군과 백제군 사이에 관산성을 놓고 밀고 밀리는 큰 전투가 계속 이어졌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0087_6097.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0087_6097.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0087_6097.png" /><br style="clear:both;" />삼국 시대 공성전 모습(전쟁기념관)</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21:21:45+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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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em>
<title>신라와 백제, 함께 고구려에 맞서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500s/26</link>
<description><![CDATA[<p>한반도 동남쪽의 높은 산맥과 낙동강, 그리고 바다로 둘러싸인 신라는 너른 평야가 적고 여러 나라와 교류가 어려워 고구려나 백제보다 발전이 더디었지요.</p><p><br /></p><p>그러나 신라는 6세기에 접어들어 불교를 받아들이고, 율령을 반포하면서 나라의 기틀을 튼튼하게 잡아갔어요. 또한 화랑도를 규모가 큰 단체로 만들어 많은 인재를 길러냈지요. 나라를 정비한 신라는 진흥왕 때에 이르러 대외적으로 눈부신 발전을 이룩하였어요.</p><p><br /></p><p>한편 고구려 장수왕에게 한성을 빼앗기고 수도를 웅진으로 옮긴 백제가 다시 발전할 기반을 마련한 것도 6세기 무렵 성왕 때였지요. 성왕은 수도를 비좁은 웅진(공주)에서 넓은 벌판인 사비성(부여)으로 옮기고, 제도를 정비하고, 불교를 장려하였지요. 그리고 중국과 문물을 교류하였고, 왜와도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 불교를 비롯한 여러 문물을 전해 주었어요.</p><p><br /></p><p>마침내 이때 고구려에도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어요. 북방에서 세력을 키우던 돌궐이 고구려를 공격하였고, 왕위 계승을 놓고 벌인 귀족 간의 권력 다툼으로 고구려의 국력은 이전보다 훨씬 약해져 있었어요.</p><p>한때 고구려의 남하로 위기에 빠졌던 백제와 신라는 서로 동맹을 맺어 함께 고구려에 맞서고 있었지요. 내부의 안정을 꾀하고 힘을 기른 백제 성왕과 신라 진흥왕은 한강 유역을 되찾기 위해 함께 고구려를 공격했어요.</p><p><br /></p><p>신라와 백제는 정치적으로 혼란한 상황에 빠져있던 고구려를 상대로 쉽게 이길 수 있었어요. 그 결과 백제는 한강 하류 지역을, 신라는 한강 상류 지역을 차지했어요. 고구려에게 한성을 빼앗긴지 75년 만에 성왕의 노력으로 백제의 오랜 소원이었던 한강 유역을 되찾을 수 있었어요.</p><p><br /></p><p>고구려는 한강 유역을 빼앗겼지만, 북쪽에서 돌궐과 전쟁을 치르느라 백제와 신라의 공격에 빠르게 대처할 수 없었어요. 한강을 차지한 신라군은 동해안을 따라 계속 진격하여 함경도 지역까지 진출하였어요.</p><p><br /></p><p>백제 성왕도 한강을 건너 계속 진격해 평양을 공격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성왕은 진흥왕에게 함께 평양을 공격하자고 제안을 했지요. 이를 눈치 챈 고구려는 진흥왕에게 함경도 지역을 신라의 영토로 인정해 주는 대신 평양을 공격하지 말 것을 제안하였어요.</p><p><br /></p><p>진흥왕은 중국과 교류하기에 편리한 한강 하류의 땅이 반드시 필요했어요. 진흥왕은 결국 고구려와 손을 잡았어요. 120년 동안 계속된 동맹을 깨고 백제를 배신한 것이죠. 동맹을 깬 진흥왕은 백제를 공격하여 한강 하류의 모든 땅을 차지합니다.</p><div><br /></div>]]></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21:18:05+09:00</dc:date>
</item>


<item>
<title>진흥왕, 북한산에 순수비를 세우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500s/25</link>
<description><![CDATA[<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9731_7059.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9731_7059.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9731_7059.png" /><br style="clear:both;" />비봉(서울 종로구)</p><p><br /></p><p>“한강 하류를 차지하려면 백제와 전쟁을 벌여야 하는데...”</p><p><br /></p><p>“폐하! 아니 되옵니다. 백제와 동맹을 맺고 고구려와 맞선 지 벌써 백 이십년! 그 오랜 믿음을 저버리실 것이옵니까?”</p><p><br /></p><p>“신의도 중요하지만 신라가 더 커지려면 한강 하류는 꼭 필요합니다. 폐하! 작은 신의보다 신라를 위한 큰 결단을 내려주십시오.”</p><p><br /></p><p>신라 진흥왕은 강한 신라를 만들고 싶었어요. 신라는 백제의 성왕과 연합해 고구려를 공격해 한강 유역을 나눠가졌어요. 야망이 컸던 진흥왕이 백와 함께 한강 유역을 나눈 것에 만족했을까요? 백제와의 동맹은 계속되었을까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21:16:35+09:00</dc:date>
</item>


<item>
<title>역사 속 작은 이야기: 무령왕릉 발굴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후회</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500s/24</link>
<description><![CDATA[<p>1971년에 이루어진 무령왕릉 발굴은 우리나라 고고학 역사상 최고의 사건이라고 해요. 그런데 정작 발굴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자신들이 한 일을 후회하고 있어요. 왜 그럴까요? 너무나 짧은 시간에 1차 발굴을 끝냈기 때문이에요.</p><p>공주 송산리 고분군에서 왕릉으로 추정되는 무덤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기자들이 발굴 현장으로 모여들었어요. 그들은 서로 발굴 현장의 사진을 찍으려고 했어요. 그 과정에서 누군가가 청동 숟가락을 밟아 부러뜨리기도 했어요. 여기에 소문을 들은 일반 시민들도 찾아와 발굴 현장은 아주 혼잡스러웠어요.</p><p><br /></p><p>“사람들이 많이 모여서 사고가 날 수도 있어요. 지금부터 무령왕릉의 유물을 발굴해야겠습니다.”</p><p><br /></p><p>김원룡을 단장으로 한 발굴단은 무령왕릉을 즉시 발굴하기로 결정했어요. 그들은 무덤 안으로 들어가 첫 번째 유물인 청자를 꺼내기 시작한 후 하루 밤사이에 1차 발굴을 끝냈어요. 삼국 시대 고분 중 유일하게 무덤의 주인을 알 수 있는 무령왕릉은 이렇듯 너무나 성급하게 발굴이 이루어진 것이죠.</p><p><br /></p><p>무령왕은 백제 두 번째 도읍 웅진 시대를 이끌던 왕이에요. 지금 공주에 가더라도 무령왕릉의 내부를 직접 볼 수 없어요. 하지만 무령왕릉이 있는 송산리 고분군에는 무령왕릉의 내부를 그대로 만들어 놓은 전시관이 마련되어 있어요. 또 국립공주박물관에는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어요. 두곳에 가면 무령왕릉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답니다.</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20:38:27+09:00</dc:date>
</item>


<item>
<title>백제는 중국, 일본과 활발한 교류를 했어요</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500s/23</link>
<description><![CDATA[<p>무령왕은 백제의 제25대 왕이 되었어요. 백제가 웅진성(공주)으로 도읍을 옮긴 지 26년 후인 501년의 일이지요. 무령왕 이전에는 동성왕이 백제를 다스렸어요. 동성왕에 이어 왕이 된 무령왕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했어요. 이를 위해 지방에 있는 담로라는 행정 구역 22곳에 왕족을 파견하여 지방세력을 통제했어요. 또 나라의 창고를 열어 백성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했어요.</p><p>나라의 정치가 어느 정도 안정되자 무령왕은 중국 남쪽 땅에 있었던 양나라에 사신을 보냈어요. 그러자 양나라의 왕은 무령왕에게 ‘영동대장군’이라는 작호를 주었어요. 두 나라 사이는 점점 더 가까워졌지요.</p><p><br /></p><p>무령왕의 무덤이 벽돌로 만들어졌다는 거 기억하지요? 이러한 벽돌무덤이 중국 양나라의 무덤 양식이랍니다. 또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오수전도 양나라의 동전이구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7380_4674.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7380_4674.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7380_4674.png" /><br style="clear:both;" />백제와 교류한 양나라</p><p><br /></p><p>한편, 무령왕릉에서는 일본과 관련이 있는 유물도 나왔어요. 대표적인 것이 무령왕과 왕비의 나무 관이에요. 이 관을 만드는데 사용한 나무는 ‘금송’이라는 소나무인데 이는 일본에서 주로 자라는 것이라고 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7418_4868.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7418_4868.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7418_4868.png" /><br style="clear:both;" />무령왕릉 나무관(국립공주박물관)</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20:37:13+09:00</dc:date>
</item>


<item>
<title>무령왕릉에는 왕과 왕비가 함께 있어요</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500s/22</link>
<description><![CDATA[<p>무령왕릉은 무령왕과 왕비가 함께 묻힌 무덤이에요. 그래서 무령왕의 유물 외에도 무령왕의 비가 사용하던 유물도 함께 발견되었어요. 대표적인 것으로 금으로 만든 관 장식(금제 관식)과 귀걸이, 은팔찌 등을 들 수 있어요. 먼저 왕비의 금제 관식은 무령왕의 금제 관식처럼 각각 2개씩 발견되었어요. 하지만 왕의 금제 관식과 모습이 조금은 달라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7192_7984.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7192_7984.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7192_7984.png" /><br style="clear:both;" />무령왕의 금제 관식과 무령왕비의 금제 관식</p><p>문화재청</p><p><br /></p><p>무령왕의 귀걸이는 무척이나 아름다워요. 귀걸이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조그마한 금 알갱이들이 계속 이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어요. 한편 무령왕비의 은팔찌도 2개나 발굴되었어요. 이 팔찌에는 발톱이 셋인 용이 두 마리나 새겨져 있어요. 이러한 유물들을 통해 백제인이 금속을 다루는 솜씨가 매우 수준 높았음을 알 수 있어요.</p><p>금제 관장식을 쓰고 은팔찌와 금귀걸이를 찬 무령왕비는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한번 상상해보세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7226_0326.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7226_0326.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7226_0326.png" /><br style="clear:both;" />무령왕비 금귀걸이와 은팔찌</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20:33:56+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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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왕의 무덤을 지키는 동물이 있었어요.</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500s/21</link>
<description><![CDATA[<p>1971년 7월 5일 고분이 처음 발견되고 3일 만인 7월 8일에 있었던 일이에요. 발굴단은 고분의 문을 열기 전에 먼저 제사를 지냈어요. 제사상에는 수박 한 덩어리와 북어 세 마리가 올려졌어요. 제사가 끝난 후 드디어 입구가 열렸어요. 제일 먼저 국립공주박물관장을 하던 분이 고분 안으로 들어갔어요.</p><p><br /></p><p>그런데 깜짝 놀랄만한 일이 벌어졌어요. 고분 입구에 돌로 만든 동물(석수)이 떡하니 버티고 있었던 것이에요. 마치 이 고분은 아무나 함부로 들어올 수 없다는 듯이 말이죠. 그리고 한 가지 더 놀라운 사실은 고분에 처음 들어갔던 분이 며칠 전 꿈에서 멧돼지를 보았는데, 그 모습이 이 석수와 무척이나 비슷했다는 거예요.</p><p><br /></p><p>무령왕릉에서 나온 석수는 보통 진묘수라고도 불려요. 진묘수는 중국 신화에 나오는 상상의 동물이에요. 옛날 사람들은 진묘수를 무덤이나 궁궐 앞에 두면 나쁜 기운을 없애준다고 믿었어요. 무령왕의 진묘수는 커다란 코에 뭉뚝한 입을 가지고 있어요. 또 머리 위에는 철로 만든 뿔도 있는데 그 모습이 마치 닭벼슬처럼 보여요.</p><div><br /></div>]]></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20:30:55+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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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는 유일한 삼국 시대 고분</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500s/20</link>
<description><![CDATA[<p>이 고분은 바로 무령왕릉으로 현재 충청남도 공주 송산리 고분군에 있는 7개의 고분 중 하나에요. 일제 강점기만 하더라도 공주 송산리 일대에는 백제의 왕 또는 귀족 무덤으로 보이는 고분이 30여 개나 있었다고 해요.</p><p><br /></p><p>공주의 옛 이름은 웅진으로 이 지역은 백제가 한성을 떠나 63년간 도읍으로 삼았던 곳이었거든요. 그런데 광복 후 무령왕릉이 발견되기 직전에는 6개의 고분만이 남아 있었어요. 고분의 명칭도 1호~6호분으로 숫자로만 불렸어요. 고분의 유물이 일제 강점기에 도굴되어 없었기 때문에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거든요.</p><p><br /></p><p>그 중 송산리 6호분은 무령왕릉의 발견과 관계가 있어요. 이 고분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일제 강점기 공주의 한 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던 일본인이었어요. 그는 1938년 송산리 6호분을 발견했다고 조선 총독부에 알렸어요. 그러면서 유물이 전혀 없었다고 했지요. 그런데 정말 고분 안에는 유물이 없었을까요? 훗날 사람들이 6호분 내부를 자세히 조사해보니 빗자루로 뭔가를 쓸어낸 흔적이 있었다고 해요.</p><p>송산리 6호분은 무령왕릉처럼 벽돌로 만들어졌고 동서남북 4면에 도교의 방위신인 사신도가 그려져 있었어요. 무령왕릉이 발견되기 전까지 백제의 고분 중 유일한 벽돌무덤으로 인정받았어요. 이런 고분에 물이 차면 큰일이겠죠. 그래서 1971년 7월 장마에 대비해서 이 고분의 뒤편에 물길을 내는 작업을 하게 된 거예요.</p><p><br /></p><p>한참 작업을 하던 7월 5일, 흙을 퍼내던 삽에 ‘툭’하고 돌이 걸렸어요. 이상하게 여긴 사람들이 조심스럽게 흙을 파내자 무덤의 입구 같은 것이 보였어요. 무령왕릉이 비로소 세상에 드러난 것이죠. 무령왕릉은 주변의 고분과 달리 다행히 도굴되지 않은 상태로 발견되었어요.</p><p><br /></p><p>무령왕릉은 삼국 시대에 만들어진 고분 중 유일하게 무덤의 주인을 알 수 있는 고분이에요.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요? 무덤 입구에서 무령왕의 이름이 새겨진 네모반듯한 돌(지석)이 나왔거든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6904_7576.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6904_7576.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6904_7576.png" /></p><p>무령왕릉 지석<br /></p><p>국립공주박물관</p><p><br /></p><p>지석에는 ‘영동대장군인 백제 사마왕은 나이가 62세 되는 해 돌아가셨다.’라는 내용의 글이 새겨져 있어요. 이 중에서 ‘사마왕’이 바로 무령왕이 살아있을 때 불리던 이름이에요. ‘사마’는 일본어로 ‘섬(시마)’이라는 뜻이에요. 무령왕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왕의 명을 받고 일본으로 가던 중 일본 규슈 북쪽의 한 섬에서 무령왕을 낳았기 때문에 붙여진 거지요.</p><p>무령왕릉에서는 왕과 왕비의 금제관 장식을 포함해서 약 4,600여 점의 유물이 나왔어요. 그중 12건 17점의 유물이 국보로 지정되었어요. 자! 그럼 무령왕릉에 나온 대표적인 유물은 무엇이 있는지 살펴볼까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6968_0777.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6968_0777.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6968_0777.png" /><br style="clear:both;" /> </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20:29:38+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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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백제문화의 우수성과 대외 교류를 알려주는 무령왕릉</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500s/19</link>
<description><![CDATA[<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6650_6483.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6650_6483.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6650_6483.png" /><br style="clear:both;" />무령왕릉(충남 공주시)</p><p><br /></p><p>“장마가 시작되면 5, 6호 고분에 물이 들어갈 수 있으니 주변의 흙을 파내 물길을 내야 될 것 같습니다.”</p><p><br /></p><p>“예, 알겠습니다. 어! 그런데 여기에 또 다른 무덤의 입구가 있는 것 같아요.”</p><p><br /></p><p>1971년 7월, 백제 왕릉으로 추정되는 새로운 고분이 발견되었어요. 이 고분의 주인공은 누구일까요? 그리고 이곳에서 발견된 유물을 통해 백제의 어떤 모습을 알 수 있을까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20:24:27+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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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성왕의 아쉬운 죽음</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500s/18</link>
<description><![CDATA[<p>한강 유역을 되찾고 백제의 부활을 세상에 널리 알린 성왕의 운명은 여기까지였어요. 고구려와 함께 맞서던 신라 진흥왕이 중국과의 뱃길을 열기 위해 백제가 차지한 한강 하류 유역을 빼앗는 일이 벌어진 거예요. 성왕은 신라 진흥왕의 배신에 분노하며 군대를 일으켜 신라의 관산성을 공격했어요.</p><p><br /></p><p>그런데 제대로 싸워보기도 전에 어처구니없이 신라군에게 붙잡혀 죽고 말았어요. 성왕이 죽자 기가 꺾인 백제군은 신라군에게 크게 패하고 말았지요.</p><p><br /></p><p>사비(부여)로 도읍을 옮기고 백제 제2의 전성기를 연 성왕이 허무하게 죽지 않았다면 백제는 어떤 나라가 되었을까요? 신라 진흥왕과의 경쟁을 이겨내고 더욱 번성한 백제를 만들지 않았을까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4925_5137.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4925_5137.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4925_5137.png" /><br style="clear:both;" />백제의 배(백제문화단지)</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19:55:38+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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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em>
<title>성왕, 백제의 옛 영토를 회복하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500s/17</link>
<description><![CDATA[<p>사비성은 백강에 의지해 만들었어요. 백강은 외적을 막는 역할도 했지만, 강폭이 넓고 수심이 깊어 큰 배가 드나들 수 있었어요. 성왕은 이런 백강의 특징을 이용해 사비성 강가에 항구를 만들었어요. 이 항구는 중국과 일본뿐만 아니라 서역의 먼 나라들과도 교류하는 국제항구가 되었어요.</p><p><br /></p><p>성왕은 이 국제항구를 중심으로 중국으로부터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고, 일본에는 불교를 비롯한 백제의 발전된 학문과 문화를 전해주었어요. 성왕의 노력으로 백제와 일본은 더욱 가까운 사이가 되었어요.</p><p><br /></p><p>사비천도와 여러 나라와의 교류를 통해 백제 제2의 전성기를 연 성왕은 백제의 오랜 소원인 한강 유역을 되찾는 일을 시작했어요. 이를 위해 동맹을 맺은 신라와 함께 고구려를 공격했지요. 백제군은 고구려와 싸우며 북으로 나아갔어요. 그리고 많은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고구려에 빼앗겼던 한강 유역의 땅을 대부분 되찾을 수 있었어요. 백제는 한성(위례성)을 포함한 한강 하류를 차지하였고, 신라는 한강 상류를 각각 차지하게 되었지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19:53:41+09:00</dc:date>
</item>


<item>
<title>성왕, 사비를 건설하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500s/16</link>
<description><![CDATA[<p>백제 부활을 위해 애쓰던 무령왕이 백제를 다스린 지 22년 만에 생을 마감하자, 그의 아들인 성왕이 백제의 왕이 되었어요. 성왕은 지혜가 많고 과감하게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었다고 해요.</p><p><br /></p><p>성왕이 왕이 되었을 무렵 백제는 아버지 무령왕의 노력으로 이전 수준에 이를 정도로 나라의 힘이 커진 상태였어요. 무령왕 때에도 이미 스스로 “백제가 다시 강국이 되었다”고 중국에 내세울 정도였지요. 성왕은 아버지의 뜻을 이어서 신라와 동맹을 맺고 고구려와 맞서 싸웠어요. 또한 백성들의 생활을 더욱 안정시키고 왕권 강화를 위해 노력을 다했어요.</p><p><br /></p><p>성왕이 왕이 되고 십여 년이 지난 어느 날이었어요. 성왕이 신하들에게 물었어요.</p><p><br /></p><p>“고구려의 침략으로 백제의 운명이 바람 앞에 촛불 같았는데, 이제야 옛 명성을 되찾은 것 같소.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하오?”</p><p><br /></p><p>“폐하의 말씀이 백번 옳습니다.”</p><p><br /></p><p>“백제의 힘은 커졌는데 도읍이 좁아 나라가 더욱 강성해지는 것을 막고 있소. 이 기회에 도읍을 옮기면 어떻겠소?”</p><p>백제의 성장으로 자신감에 찬 성왕은 사비천도를 추진하였어요.</p><p><br /></p><p>고구려에게 한성(위례성)을 빼앗기고, 웅진으로 도읍을 급하게 옮겼지만 웅진은 도읍으로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어요.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방어에는 유리했지만 다른 곳과 교통하기에 불편했어요. 강의 깊이도 낮아 큰 배가 드나들기도 어려웠지요. 좁은 도읍은 늘어나는 인구와 물자를 감당하기에도 벅찼어요.</p><p><br /></p><p>“폐하! 폐하의 뜻은 맞으나 도읍을 옮기는 것은 나라의 운명을 바꾸는 일과 같습니다.”</p><p><br /></p><p>“맞습니다. 도읍을 옮길 때 생길 백성들의 고통을 어찌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p><p><br /></p><p>“폐하! 생각을 물려주시기를 간청 드리옵니다.”</p><p><br /></p><p>웅진을 기반으로 한 일부 귀족 세력은 도읍을 옮긴다는 성왕의 생각에 반대를 하고 나섰어요. 그러나 웅진을 벗어나야만 백제가 발전할 수 있다는 성왕의 생각은 변하지 않았어요. 성왕은 오랜 기간 신하들을 설득하며 천도를 준비했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4721_0606.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4721_0606.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4721_0606.png" /><br style="clear:both;" />사비성 복원 모습(백제문화단지)</p><p><br /></p><p>성왕이 생각한 도읍지는 사비(부여)였어요.</p><p><br /></p><p><br /></p><p>사비는 백강이 휘감아 흐르는 곳으로 방어에 유리하고,</p><p>강물이 깊어 배가 드나들기에도 적당한 곳이다.</p><p><br /></p><p>사비는 옆으로 흐르는 백강과 강 옆으로 펼쳐진 넓은 벌판이 있어 도읍으로 삼기에 알맞은 곳이었어요. 그러나 땅의 대부분이 황무지와 습지였고, 또 산이 낮아 적을 막기에 불리했어요.</p><p>성왕은 도읍 주변으로 긴 성을 쌓아 이 문제를 해결하였어요. 도읍을 방어하기 위한 이 성은 옛 풍납토성을 쌓을 때와 마찬가지로 흙 위에 나뭇잎과 나뭇가지를 깔고 그 위에 흙을 덮고 다지는 방식으로 쌓았어요. 흙을 이용해 성을 쌓아 건축 시간도 크게 단축할 수 있었지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4748_2108.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4748_2108.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4748_2108.png" /><br style="clear:both;" />사비 수도시설(국립부여박물관)</p><p>산에서 내려오는 물을 모아 나무 수조로 보내기 위해 기와로 조립해서 만든 수도관</p><p><br /></p><p>성왕은 성 안쪽을 바둑판처럼 나누고, 도로는 동서남북 네 방향으로 만들었어요. 그리고 상수도와 도로 양쪽으로는 배수시설까지 만들었어요.</p><p><br /></p><p><br /></p><p>백제의 미래를 위해 천도를 더 이상 미룰 수 없다.</p><p>오랜 준비와 공사 끝에 538년 성왕은 드디어 웅진에서 사비로 도읍을 옮기고, 나라 이름을 ‘남부여’로 바꾸었어요. 이것은 백제가 부여를 계승한 나라임을 널리 알려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 고구려와의 전쟁에서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표현한 것이에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19:52:42+09:00</dc:date>
</item>


<item>
<title>무령왕, 백제 부활의 토대를 쌓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500s/15</link>
<description><![CDATA[<p>백제는 고구려 장수왕에게 한성(위례성)을 빼앗기고 도읍마저 웅진(공주)으로 급히 옮겨야 했어요. 한성백제가 멸망할 때 무령왕은 열네 살이었어요. 무령왕은 백제가 전쟁에 패하고 개로왕이 고구려군에게 잡혀 죽임을 당하는 비참한 경험을 하였어요. 웅진에서 왕권 강화에 힘쓰던 동성왕이 반대 귀족 세력에 의해 살해되자 40세의 무령왕이 새로운 백제의 왕이 되었어요.</p><p><br /></p><p>왕이 된 무령왕은 ‘강한 백제를 만들어 고구려에게 꼭 복수를 할 것이다’라는 생각을 늘 갖고 있었어요. 무령왕은 귀족의 힘이 너무 커진 반면 왕권은 약해졌다고 생각해 귀족들의 힘을 누르는 정책을 취했어요. 그리고 지방에도 귀족들 대신 왕족을 파견해 왕권을 강화했어요.</p><p><br /></p><p>무령왕은 고구려와의 전쟁과 자연재해로 집을 잃고 거리를 떠돌던 많은 백성들에게 나라의 곳간을 열어 도움을 주었어요. 그리고 백성들이 정착해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힘썼지요. 황무지를 개간하고 제방과 저수지도 늘려 쌓았죠. 많은 백성들이 정착하고 농사를 지으면서 농업 생산량도 많이 늘어났어요.</p><p>국가의 경제력이 회복되자 무령왕은 이를 바탕으로 강한 군대를 만들어 고구려와 맞서 싸웠어요. 잘 준비된 백제군은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연이어 승리하였지요. 잃어버렸던 백제의 영토도 많이 되찾을 수 있었어요.</p><p><br /></p><p>무령왕은 중국과 일본과 활발하게 교류하면서 이전 시기의 강한 백제를 만들기 위한 토대를 닦았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4499_0278.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4499_0278.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4499_0278.png" /><br style="clear:both;" />무령왕릉</p><p>왕릉에 사용한 무덤 양식과 벽돌은 중국의 기술을 도입해 만들었고, 관은 일본에서 가져온 금송으로 만들었다.</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19:48:37+09:00</dc:date>
</item>


<item>
<title>성왕, 백제의 부활을 꿈꾸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500s/14</link>
<description><![CDATA[<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4360_959.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4360_959.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4360_959.png" /><br style="clear:both;" />백제문화단지(충남 부여군)</p><p><br /></p><p>“아니 우리 대왕께서 도읍을 또 옮기신다고 하는군!”</p><p><br /></p><p>“이번 천도는 한성에서 여기 웅진으로 온 것과는 다르지.”</p><p><br /></p><p>“그럼, 예전은 도망쳐 온 것이지만 이번 천도는 우리 백제가 더욱 강성해져서 옮기는 것이지 않은가.”</p><p><br /></p><p>고구려의 공격으로 첫 도읍인 한성을 잃은 지 50여 년이 지나 성왕은 백제의 왕이 되었어요. 성왕이 도읍을 웅진에서 사비로 옮기려고 하자 일부 귀족들이 반대를 했어요.</p><p>또 새로 도읍을 만드는 일은 막대한 돈과 노동력이 들어가는 무척 힘든 일이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왕은 왜 도읍을 옮기려고 했을까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19:46:18+09:00</dc:date>
</item>


<item>
<title>법흥왕이라는 시호가 정해지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500s/13</link>
<description><![CDATA[<p>법흥왕 때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불교는 이후 신라 사회의 발전에 큰 역할을 했어요. 불교를 통해 왕권을 강화하고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데 성공할 수 있었지요. 삼국을 통일한 후에도 불교는 더욱 발달했어요. 통일 신라는 그 땅을 불국토, 즉 부처님의 나라가 되려고 절, 불상, 탑 등을 많이 만들었어요. 이러한 불국토의 기반을 닦은 왕이 바로 법흥왕이었어요.</p><p><br /></p><p>540년 국왕이 세상을 떠나자 신하들은 불교를 흥하게 한 군주라는 뜻으로 ‘법흥’이라는 시호를 붙였어요. 여기서 ‘법’은 불교의 법 즉, 불법을 뜻해요. 시호란 왕이 세상을 떠나면 신하들이 왕의 일생과 업적을 평가하여 그에 알맞은 이름을 지어 올리는 이름이에요. 그가 생전에 얼마나 불교 공인과 발전을 위해 노력했는지 짐작할 수 있어요.</p><p><br /></p><p>법흥왕의 업적을 다시 되새겨볼까요? 병부 설치, 불교 공인, 독자적인 연호의 사용 등은 신라의 발전 과정에서 나타난 의미 있는 성과예요. 이를 바탕으로 후대의 왕들은 국력을 더욱 키울 수 있었지요. 오늘날 우리의 삶도 비슷하지 않을까요? 열심히 노력해서 만들어진 성과는 미래에 더 나은 결과로 나타나지요. 오늘 하루도 열심히 생활해 보아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4199_7712.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4199_7712.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4199_7712.png" /><br style="clear:both;" />법흥왕릉</p><p>문화재청</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19:43:29+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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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영토를 넓히고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500s/12</link>
<description><![CDATA[<p>법흥왕은 여러 정책을 통해 권력을 강화한 뒤 눈을 돌려 영토 확장에 힘썼어요. 당시 신라 주변에는 고구려, 백제 외에 남쪽에 가야 연맹이 있었는데, 특히 법흥왕은 남쪽 지역에 관심을 기울였어요. 이러한 신라의 팽창에 부담을 느낀 대가야가 사신을 보내 결혼을 요청해왔어요. 법흥왕은 귀족 비조부의 여동생을 대가야의 이뇌왕과 결혼하도록 했어요. 여러 해가 지난 후 532년에는 금관가야의 왕이 세 아들과 함께 신라에 항복해왔어요. 금관가야의 항복은 신라가 낙동강과 남해안의 중요한 곳이었던 김해를 발판으로 가야의 여러 나라를 정복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해 주었어요.</p><p><br /></p><p>이러한 영토 확장으로 자신감을 얻은 법흥왕은 독자적인 연호인 ‘건원’을 사용했어요. ‘군주가 다스리는 국가에서 연도를 세는 호칭’을 뜻하는 연호는 원칙적으로 중국의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었어요. 따라서 신라 법흥왕 때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다는 점은 중국과 대등한 국가라는 자주적인 생각이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만큼 당시 왕과 국가의 힘이 강했음을 의미하지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19:41:04+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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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불교를 공인하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500s/11</link>
<description><![CDATA[<p>고구려, 백제, 신라의 왕들은 자신의 권력을 강화함으로써 나라를 효율적으로 다스리고자 했어요. 삼국의 왕들은 자신의 권위를 세우고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새로운 종교가 필요하였지요. 이 무렵 중국에서 불교가 전해졌어요. 삼국 중 고구려는 4세기 후반 소수림왕 때 가장 먼저 불교를 수용했고, 얼마 후 백제도 4세기 후반 침류왕 때 불교를 받아들였어요.</p><p><br /></p><p>신라에도 5세기 전반에 불교가 전해졌어요. 하지만 신라는 불교를 정식으로 받아들이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왜냐하면 신라 귀족들이 오랫동안 믿어 왔던 기존의 토착 신앙을 불교로 바꾸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하지만 514년 왕위에 오른 법흥왕은 왕권을 강화하고 백성들의 마음을 얻기 위하여 외국에서 들여온 종교인 불교를 활용하고 싶었어요. 그렇지만 귀족들의 반대가 눈에 보듯 뻔했기에 고민이 커졌어요.</p><p>‘나의 권위를 높이고 귀족 세력을 누르기 위해서는 불교를 받아들여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p><p><br /></p><p>때마침 왕이 아끼던 신하 이차돈이 찾아왔어요. 평소 법흥왕의 고민을 잘 알고 있던 이차돈은 왕과 불교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했어요.</p><p><br /></p><p>“전하! 소인은 전하의 뜻을 펼칠 수 있도록 돕고 싶습니다. 제 목을 베어 귀족들의 반대를 막으시옵소서.”</p><p><br /></p><p>법흥왕은 죄 없는 신하의 목숨을 빼앗을 수 없다고 하며 거절했지요. 그러나 이차돈은 또다시 간청했어요. 그의 굳은 결심 앞에 드디어 법흥왕도 생각을 바꾸어 이차돈의 뜻을 받아들이기로 했어요.</p><p><br /></p><p>다음날부터 이차돈은 귀족들이 성스럽게 여기는 숲이 있는 천경림으로 갔어요. 그리고 나무를 베어다가 그곳에 절을 짓기 시작하였지요. 이 소식이 알려지자 귀족들은 화가 나서 법흥왕에게 항의했어요.</p><p><br /></p><p>“전하! 이차돈이라는 자가 저희가 토착신을 모시는 천경림의 나무를 베고 절을 짓고 있습니다. 큰 벌을 내리셔야 합니다.”</p><p>법흥왕은 이차돈을 불러오게 했어요. 이차돈은 자신이 왕의 명령인 것처럼 속여서 나무를 베었다고 했어요. 법흥왕은 이차돈과 미리 약속한 대로 왕의 명령을 거짓으로 지어낸 죄를 물어 이차돈의 목을 베게 했어요. 이때 이차돈이 말했어요.</p><p><br /></p><p>“전하! 부처님이 계신다면 제가 죽은 뒤 신기한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렇다면 불교를 꼭 받아들이소서.”</p><p>이 말을 남기고 이차돈은 죽음을 맞이했어요. 그런데 이차돈이 처형되는 순간 목에서 흰 피가 솟구치고 하늘에서 꽃비가 내렸어요. 사람들이 서 있던 땅은 크게 흔들렸어요. 이 광경을 본 귀족들은 깜짝 놀랐어요.</p><p><br /></p><p>법흥왕은 귀족들에게 힘주어 말했어요.</p><p><br /></p><p>“그대들은 저 신기한 일을 보았는가? 앞으로 우리 신라는 불교를 공식적으로 인정할 것이다. 앞으로 다른 소리를 한 자는 가만두지 않겠다.”</p><p><br /></p><p>법흥왕은 이차돈의 장례를 성대하게 치러 주고 흥륜사라는 절을 지어 그의 영혼을 위로해 주었어요. 드디어 신라는 이차돈이 죽을 때 나타난 신기한 일들을 계기로 불교를 받아들이게 되었지요.</p><p><br /></p><p>그런데 이차돈의 죽음 뒤 일어난 신기한 일은 과연 사실일까요? 당연히 사실일 수는 없겠죠. 신라에서 불교를 받아들일 때 토착 신앙을 믿는 귀족들의 반대가 매우 심했고,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불교가 어렵사리 인정을 받게 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이 사람들의 입소문을 거치면서 신기한 이야기로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이 돼요.</p><p>이런 험난한 과정을 거친 끝에 528년(법흥왕 15) 신라에서 불교가 공인되었어요. 불교는 ‘왕이 곧 부처’라는 생각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백성들이 왕을 부처와 같이 섬기도록 해 왕권 강화에 큰 역할을 하였어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19:39:36+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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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율령을 만들어 널리 알리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500s/10</link>
<description><![CDATA[<p>신라 법흥왕은 지증왕과 연제부인 박씨 사이에서 태어났어요. 정확한 기록이 없어서 그가 언제 태어났는지 알 수 없지만, 『삼국사기』, 『삼국유사』라는 역사책에 따르면 어릴 때 이름은 원종이었어요. 514년 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어요. 이후 27년 동안 신라를 다스렸지요. 키가 7척(약 170cm 정도로 추정됨) 정도이고, 성품이 너그러워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어요.</p><p><br /></p><p>법흥왕이 왕위에 올랐을 때는 귀족들의 힘이 매우 컸어요. 법흥왕은 나라의 발전을 위해서는 왕권이 강해져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우선 군사 업무를 총괄하는 병부를 설치했어요. 병부는 오늘날의 국방부에 해당하는 부서라고 할 수 있는데, 귀족이 아닌 국왕이 직접 군사를 지휘하는 체계를 갖추었어요.</p><p>법흥왕은 율령도 제정했어요. 율령은 죄와 벌을 규정한 형법인 ‘율’과 사회와 국가를 운영하기 위한 각종 제도 등을 규정한 ‘영’을 아우른 명칭이에요. 국가 운영을 위한 모든 제도라고 할 수 있어요. 이전에는 관습적으로 내려오던 규정에 따랐는데, 이제는 율령을 정하여 백성에게 알림으로써 공식적인 국가법에 따라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게 되었던 거예요. 귀족들은 제멋대로 형벌을 내리거나 법을 고칠 수 없게 되었지요. 반면에 왕의 권력은 강력해졌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3806_1187.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3806_1187.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3806_1187.png" /><br style="clear:both;" />병부 설치와 율령 반포</p><p>법흥왕은 신하들이 업무를 볼 때 입는 옷의 색을 신하들의 위계에 따라 붉은색, 자주색 등으로 정해주기도 했어요. 이로써 신하들은 입는 옷까지 왕의 명령을 따라야 했지요. 법흥왕은 국왕의 영향력을 강력하게 키워 신하들의 위계질서를 세우려고 했어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19:37:04+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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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법흥왕, 신라 발전의 기반을 닦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500s/9</link>
<description><![CDATA[<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3650_5481.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3650_5481.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3650_5481.png" /><br style="clear:both;" />이차돈 순교비</p><p>국립경주박물관</p><p><br /></p><p>“짐이 오늘 신라를 위해 중요한 결정을 내리겠소, 불교를 정식으로 인정하고자 하오. 그대들의 생각은 어떻소?”</p><p>“전하! 아니되옵니다. 이미 신라에는 많은 사람이 믿고 있는 토착신이 있사옵니다.”</p><p><br /></p><p>신라 법흥왕은 불교를 공식적으로 받아들이고 싶었으나 귀족들의 반대에 부딪혔어요. 이러한 상황에서 이차돈이 순교한 덕분에 신라에서 불교가 인정을 받게 되었지요. 법흥왕은 불교를 받아들이는 것을 비롯하여 어떤 정책을 펼쳤을까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19:34:25+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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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우륵, 신라로 건너가 제자를 기르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500s/8</link>
<description><![CDATA[<p>우륵은 가야의 운명이 다했다고 여겨 신라로 넘어가기로 마음먹었어요. 제자 이문과 함께 신라에 투항한 우륵은 신라 땅에서 자리 잡고 살았지요. 그의 연주 실력은 진흥왕에게까지 알려졌어요.</p><p><br /></p><p>음악에 관심이 많았던 진흥왕은 궁궐로 우륵을 불러들였어요. 우륵은 진흥왕 앞에서 연주했고, 왕은 감탄을 금치 못했어요. 진흥왕은 그에게 국원에 가서 살도록 했어요. 국원은 지금의 충주 지역이에요. 충주에 가면 탄금대라는 곳이 있는데, 탄금대는 ‘우륵이 가야금을 타던 곳’이라는 뜻이지요. 우륵은 계고를 비롯한 제자들에게 가야금 연주와 노래, 춤을 가르쳤어요. 우륵의 제자들은 스승에게 가야금 연주를 배우고 새롭게 곡을 정비했어요.</p><p><br /></p><p>“스승님, 저희가 열두 곡을 다섯 곡으로 줄였습니다. 열두 곡의 연주곡은 번잡하고 바르지 못합니다.”</p><p><br /></p><p>“어찌하여 내 연주곡을 줄였단 말이냐? 일단 한번 들어나 보자.”</p><p>우륵은 자신의 연주곡을 줄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처음에는 크게 화를 냈어요. 하지만 제자들이 연주한 노래를 들어본 후 환한 웃음을 지으면서도 감격의 눈물을 흘렸어요.</p><p><br /></p><p>“즐겁지만 지나치지 않고, 애절하지만 슬프지 않구나.”</p><p><br /></p><p>제자들이 자신의 음악을 더욱 발전시키자, 우륵은 자신이 가야를 버리고 신라 땅에 온 이유가 더욱 명확해지는 듯했어요. 가야금 연주곡은 이후 신라의 주요 행사에 연주곡으로 사용되었어요. 그리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지요. 가야금은 9세기에 일본으로 전해지기도 했어요. 신라에서 전해진 가야금이라는 뜻에서 ‘신라금’이라 하지요. 당시 전해진 신라금이 일본의 황실 창고인 정창원에 남아 있답니다.</p><p><br /></p><p>우리는 왕산악과 우륵을 한국 음악의 악성이라고 부르기도 해요. 악성은 음악을 발전시킨 뛰어난 음악가라는 뜻이지요. 삼국 시대 이후에도 거문고와 가야금을 이용한 연주곡은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고 있지요.</p><p><br /></p><p>지금도 전해오는 두 악기가 이렇게 오래전에 만들어진 악기라는 사실이 놀랍지요? 거문고의 음률은 깊으면서도 절제하는 느낌이 들고, 가야금은 밝고 아름다운 소리가 난답니다. 여러분도 거문고와 가야금 연주곡을 들으며 왕산악과 우륵의 노력을 떠올려보길 바라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3479_3208.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3479_3208.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3479_3208.png" /><br style="clear:both;" />토우 장식 장경호의 신라금 켜는 사람의 모습(국립중앙박물관)</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19:31:49+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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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우륵, 열두 곡의 가야금 연주곡을 만들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500s/7</link>
<description><![CDATA[<p>가야금을 만든 후 어느 날 가실왕은 궁중 악사인 우륵을 불렀어요.</p><p><br /></p><p>“나라의 방언이 서로 다른데, 음악이 어찌 한결같을 수 있겠는가? 가야금으로 연주할 수 있는 곡을 짓도록 하여라.”</p><p><br /></p><p>명령을 받은 우륵은 ‘하라가도’, ‘상가라도’ 등 12개의 연주곡을 지었어요. 12곡은 가야의 12개 지역을 뜻하는 것으로 보고 있어요. 우륵이 지은 12곡은 음악으로 가야의 여러 나라를 하나로 아우르려는 뜻에서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3308_3909.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3308_3909.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3308_3909.png" /><br style="clear:both;" />가야금을 연주하는 우륵</p><p><br /></p><p>하지만 가야에서 그의 음악을 발전시키기에는 어려움이 있었어요. 532년에 이미 신라에 의해 금관가야가 멸망하였고, 대가야도 비틀거리는 상황이었거든요. 우륵은 가야금과 가야금 연주곡을 발전시키기 위해 새로운 결심을 했어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19:28:47+09:00</dc:date>
</item>


<item>
<title>가야국의 가실왕, 가야금을 만들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500s/6</link>
<description><![CDATA[<p>가야 연맹은 신라와 백제 사이에 끼어 있었어요. 가야는 두 나라의 압력과 간섭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질 좋은 철을 수출하며 문화를 발전시켰지요. 음악 부문에서도 중요한 성과를 남겼어요. 바로 가야금과 그 연주곡을 만든 것이에요.</p><p><br /></p><p>가야의 가실왕은 중국 악기가 아닌, 우리 악기로 만든 음악을 듣고 싶었어요. 그래서 궁중의 악사들에게 악기를 만들게 했지요. 악사들은 중국 당의 악기인 쟁을 본떠 12줄의 현악기를 만들었어요. 그리고 악기 이름은 국가명 ‘가야’를 넣어 가야금이라고 지었어요.</p><p><br /></p><p>가야금의 12줄은 12달을 의미한다고 알려져 있어요. 가야금의 생김새나 줄의 수에는 각각 의미가 담겨 있어요. 둥근 윗부분은 하늘을, 평평한 아래는 땅을 뜻해요. 12개의 줄은 12달을 의미한다고 알려져 있어요. 하늘과 땅의 조화, 12달이라는 시간의 흐름을 담고 있는 악기이지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19:26:34+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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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em>
<title>고구려의 왕산악, 거문고를 만들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500s/5</link>
<description><![CDATA[<p>거문고는 술대라는 나무 막대기로 줄을 치면서 소리를 내는 악기에요. 고구려의 왕산악이 만들었다고 전해요. 기록에 따르면 3~4세기 즈음 중국 진에서 7줄로 된 칠현금이라는 악기를 고구려에 선물로 보냈대요. 하지만 이 악기의 소리 성질을 제대로 알 수 없어서 연주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지요.</p><p><br /></p><p>“칠현금을 연주하는 자에게 큰 상을 내리겠노라.”</p><p><br /></p><p>왕은 칠현금을 연주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았으나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러자 높은 벼슬자리에 있던 왕산악은 칠현금을 연주하기가 어려우니 악기의 본래 모양을 살리면서 고구려 사람들이 연주할 수 있도록 고치겠다고 했어요. 오랜 연구 끝에 왕산악은 드디어 우리 힘으로 연주할 수 있는 새로운 악기를 만들어냈어요. 그 악기가 바로 네 줄로 된 거문고였지요.</p><p>새로운 악기를 만든 왕산악은 이후 그 악기로 연주할 수 있는 곡을 지었어요. 그렇게 해서 백여 곡이 넘는 연주곡을 만들었어요. 거문고라는 이름은 어떻게 붙여졌을까요. 전하는 이야기가 있어요. 어느 날 왕산악이 거문고를 연주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검은 학이 날아와 곡에 맞추어 춤을 추었대요. 그래서 악기의 이름에 ‘검을 현’, ‘학 학’, ‘거문고 금’ 자를 써서 ‘현학금’이라고 했대요. ‘현금’이라는 이름을 쓰기도 했고요.</p><p><br /></p><p>하지만 거문고는 원래 고구려에 있던 악기인 ‘고’라는 악기를 바꿔 만든 것으로 추측하는 사람도 있어요. 악기 이름도 ‘고구려의 금’이라는 의미에서 ‘거문고’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고요. 고구려의 독창성을 좀 더 강조하는 주장이지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3060_3675.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3060_3675.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3060_3675.png" /><br style="clear:both;" />거문고를 연주하는 왕산악</p><p><br /></p><p><br /></p><p>거문고가 만들어진 시기를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대체로 4세기 무렵으로 추측하고 있어요. 4세기에 만들어진 안악 제3호분 벽화에 거문고 연주 모습이 보여 그 시기를 추정할 수 있지요. 무용총 벽화에도 거문고를 연주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어요.</p><p><br /></p><p>거문고의 깊고 꿋꿋한 소리는 고구려 사람들의 기상을 닮았다고 해요. 험한 산지를 내달리며 너른 만주 땅을 호령하던 그들의 기상이 느껴지는 소리랍니다.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거문고는 줄이 두 개 더해져 모두 여섯 줄이 되었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3096_4565.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3096_4565.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3096_4565.png" /><br style="clear:both;" />고구려 무용총 벽화의 거문고 연주 장면</p><p>국사편찬위원회</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19:25:12+09:00</dc:date>
</item>


<item>
<title>왕산악과 우륵, 우리 전통 음악을 발전시키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500s/4</link>
<description><![CDATA[<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2866_4689.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2866_4689.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2866_4689.png" /><br style="clear:both;" />우륵 동상(우륵박물관, 경북 고령군)</p><p>고령군청</p><p><br /></p><p>“우리나라 전통악기 중 줄을 튕겨 소리를 내는 악기는 무엇이 있을까요?”</p><p><br /></p><p>“거문고와 가야금이요.”</p><p><br /></p><p>“맞아요. 거문고와 가야금은 아주 오래전에 만들어진 악기지요.”</p><p><br /></p><p>비슷하면서도 다른 두 악기가 만들어졌던 때는 언제일까요? 또 두 악기를 만든 사람은 누구이며, 이와 관련한 음악을 발전시킨 사람은 누구일까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19:21:24+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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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우산국을 정벌하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500s/3</link>
<description><![CDATA[<p>우산국은 지금의 울릉도로 동해에 있는 아주 작은 왕국이었지요. 크기는 사방이 1백리 정도였고, 대부분 경사가 급한 지형으로 이루어진 매우 험준한 섬이었어요. 위치도 육지에서 배를 타고 이틀은 가야 도달할 만큼 먼 거리에 있었어요. 그러한 지리적 특성 때문에 우산국은 신라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고 오랫동안 항복하지 않고 있었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2647_165.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2647_165.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2647_165.png" /><br style="clear:both;" />울릉도</p><p><br /></p><p><br /></p><p>지증왕이 우산국을 정벌하려고 계획하던 때 이사부가 하슬라주(지금의 강릉 지역)의 군주가 되었어요. 왕의 명을 받은 이사부는 군사와 군선을 준비하였어요.</p><p><br /></p><p>“우산국 사람들은 성질이 우둔하고도 사납소이다. 그래서 그들을 무조건 힘으로 이기기는 어려울 것이오. 그러니 계책을 세워서 그들을 항복시켜야 하오.”</p><p><br /></p><p>이사부는 곧 나무를 깎아 사자를 만들게 했어요. 그리고 나무로 만든 사자 상을 군선에 나누어 실었지요. 이사부가 이끄는 군선이 우산국의 해안에 도착하였을 때, 이사부는 거짓으로 이렇게 말하였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2679_4698.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2679_4698.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2679_4698.png" /><br style="clear:both;" />이사부의 우산국 정벌</p><p><br /></p><p><br /></p><p>“우산국 사람들아. 만약 너희들이 항복하지 않는다면 이 맹수들을 풀어 너희들을 밟아 죽이겠다.”</p><p><br /></p><p>사자를 처음 본 우산국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었고, 결국 우산국의 우해왕은 쓰고 있던 투구를 벗어던지고 곧 항복하였지요. 이사부는 계략을 써서 큰 저항없이 우산국을 신라의 영토로 만들었고, 이후 우산국은 해마다 신라에 토산물을 받쳤어요.</p><p>이사부는 지증왕을 비롯해 법흥왕과 진흥왕을 모셨어요. 지증왕의 명으로 우산국을 정벌하였고, 법흥왕 시기에는 가야를 정벌했으며, 진흥왕 시기에는 한강 유역을 차지하기 위한 고구려와의 전투에서도 큰 역할을 했지요.</p><p><br /></p><p>진흥왕 시기 신라는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하였는데, 이러한 신라의 발전에는 이사부의 끊임없는 노력이 바탕이 되었답니다. 여러 왕을 모시며 신라의 전성기를 열었던 이사부는 어떤 신념으로 여러 힘든 전쟁을 이겨 냈을까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19:18:40+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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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지증왕, 나라의 기틀을 잡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500s/2</link>
<description><![CDATA[<p>신라는 진한의 12개 작은 나라 중 하나인 사로국에서 시작했어요. 사로국은 주변의 작은 나라들을 통합하며 점차 힘센 국가로 발전해 나갔어요. 사로국이 고대 국가로 나라의 기틀을 잡은 것은 지증왕 때였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2470_7295.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2470_7295.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2470_7295.png" /><br style="clear:both;" />사로국과 주변의 작은 나라들</p><p><br /></p><p><br /></p><p><br /></p><p>지증왕은 64세의 늦은 나이에 마립간이 되었어요. 즉위하자 지증왕은 왕의 호칭을 지증마립간에서 지증왕으로 바꾸었어요. 신라의 옛 이름인 사로국에서는 ‘왕’이라는 호칭 대신 귀한 사람을 뜻하는 ‘거서간’, 무당 또는 제사장을 뜻하는 ‘차차웅’, 연장자를 뜻하는 ‘이사금’, 대군장을 뜻하는 ‘마립간’ 등 신라 특유의 호칭을 사용하고 있었어요.</p><p><br /></p><p>지증왕은 이를 중국식 호칭인 왕으로 바꾼 것이에요. 이것은 신라가 작은 부족 국가들이 연합해 만든 힘없는 나라가 아니라, 강력한 왕이 모든 곳을 다스리는 중앙집권 국가로 일어설 준비를 갖추었다는 것을 뜻해요.</p><p><br /></p><p>지증왕은 왕의 호칭뿐만 아니라 나라의 기틀을 다지기 위해 여러 정책을 실시하였어요. 죽은 주인을 따라 노예들을 함께 묻던 순장 풍습도 금지하였고, 농업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소를 농사에 이용하게 하였지요. 그리고 나라 이름도 “왕의 덕업이 나날이 새로워지고, 사방의 영역을 두루 망라한다”는 뜻을 지닌 ‘신라’로 바꾸었지요. 나라의 이름을 바꾼 건 이제 신라의 힘이 사방으로 뻗어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었어요.</p><p>행정구역과 여러 제도도 정비하여 왕권을 강화하였어요. 나라의 기틀이 안정되자 지증왕은 영토 확장에도 관심을 가졌어요. 특히 지증왕은 동해 바다 한가운데에 있던 우산국을 주목했어요. 당시 우산국은 많은 토산물을 생산했을 뿐만 아니라 고구려와 왜의 교역 항로에서 요충지였기 때문에 우산국을 항복시키면 동해의 제해권을 장악할 수 있었거든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19:14:51+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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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em>
<title>이사부, 우산국을 정복하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500s/1</link>
<description><![CDATA[<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2306_9894.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2306_9894.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42306_9894.png" /><br style="clear:both;" />남양항 사자바위 투구바위(경북 울릉도)</p><p><br /></p><p>“신라에서 아주 크고 포악한 동물을 끌고 우리에게 오고 있다합니다.”</p><p><br /></p><p>“우산국 사람들 중에 큰 동물을 본 사람도 거의 없을텐데...”</p><p><br /></p><p>“신라와 맞서 싸우겠는가? 항복할 것인가?”</p><p><br /></p><p>신라의 군선들이 우산국을 정벌하기 위해 몰려오고 있어요. 이때 우산국은 어떤 선택을 했을까요? 신라는 동해 바다 한가운데 멀리 있는 우산국을 왜 정벌하고자 했을까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19:12:01+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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