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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한국의 역사, 지금나우, 1555-0001 &amp;gt; 고대사 &amp;gt; B.C.(기원전)</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bc</link>
<language>ko</language>
<description>B.C.(기원전) (2026-07-20 13:01:45)</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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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온조, 백제를 세우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bc/75</link>
<description><![CDATA[<p>비류는 온조와 신하들의 말을 듣지 않고 백성을 나누어 바다와 가까운 미추홀로 떠나 버렸어요. 온조는 강 남쪽 위례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웠어요. 나라 이름은 열 명의 신하의 도움을 받아 세웠다고 십제(十濟)라 하였지요.</p><p><br /></p><p>비류가 도착한 미추홀은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곡식이 잘 자라지 않는 곳이었어요. 오래되지 않아 비류는 미추홀이 백성들이 편안히 살 수 없는 곳임을 깨닫게 되었어요. 비류는 온조가 세운 십제를 돌아보았어요. 도읍은 안정되었고 백성들도 평안하게 살고 있었지요. 비류는 자신의 선택을 몹시 후회하고 부끄러워하다 병에 걸려 죽었어요. 그러자 그의 신하와 백성들은 모두 위례로 돌아와 온조와 함께 하기를 청했어요. 물론 온조는 이들을 백성으로 받아들였지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20027_601.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20027_601.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20027_601.png" /><br style="clear:both;" />백제의 건국과 확장</p><p><br /></p><p><br /></p><p><br /></p><p>인구가 늘어나자 온조는 나라 이름을 십제에서 백제로 바꾸었어요. 나라가 전보다 커지자 모든 백성들이 즐거워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고구려를 세운 양아버지 주몽이 부여에서 왔다고 하여 부여를 성씨로 삼았지요.</p><p>백제의 왕들은 왕위에 오른 뒤 가장 먼저 부여의 시조인 동명왕을 모신 사당에 제사를 지냈어요. 제사를 통해 자신의 뿌리가 부여라는 점을 강조하고, 왕실과 귀족 간의 단결을 꾀했던 것이지요.</p><p><br /></p><p>온조가 백제의 도읍으로 삼은 한성(위례성)은 현재 풍납토성으로 추측하고 있어요. 풍납토성은 한강가 들판에 있어 적의 침입을 막기에는 불리하였어요. 그래서 산 위에 절벽이나 능선을 이용하여 쌓은 산성과 달리 평지부터 높게 성벽을 쌓아 적의 침입에 대비했어요. 풍납토성의 성벽은 흙과 진흙을 차례로 다지고 중간에 나뭇가지와 짚을 넣어서 튼튼하게 만들었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20080_0067.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20080_0067.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20080_0067.png" /><br style="clear:both;" />백제의 건국과 풍납토성(한성백제박물관)</p><p><br /></p><p><br /></p><p><br /></p><p>한성(위례성)은 한강과 서해 바다를 통해 중국과 일본을 비롯한 먼 지역과 교류했어요. 바다 건너편 나라들과 활발하게 교류하면서 한성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들었어요. 다양한 사람과 문물을 바탕으로 백제는 점점 풍요롭고 부강한 나라가 되어갔답니다.</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13:01:45+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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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비류와 온조, 고구려를 떠나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bc/74</link>
<description><![CDATA[<p>비류와 온조는 주몽의 결정에 크게 실망했어요. 주몽이 부여에서 대소를 비롯한 여러 왕자들에게 목숨의 위협을 받은 것처럼 비류와 온조도 태자가 된 유리에게 위협을 받을 수도 있었어요. 고민 끝에 비류와 온조는 어머니에게 말했어요.</p><p><br /></p><p>“유리 형님이 왕이 된다면 저희는 하루하루 고통 속에 살게 될 것입니다. 고구려에 남아 구차하게 살 바에는 차라리 남쪽으로 내려가 나라를 세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p><p><br /></p><p>“나도 너희와 생각이 같다. 우리를 따르는 백성들과 함께 한다면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것이 뭐가 어렵겠느냐!”</p><p><br /></p><p>주몽에게 허락을 받은 비류, 온조는 어머니와 함께 고구려를 떠났어요. 비류와 온조를 믿고 의지하던 많은 백성들도 뒤를 따랐지요. 많은 사람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남으로 향했어요.</p><p><br /></p><p>고구려를 떠난 온조의 무리는 한참을 지나 한산에 이르렀어요. 온조와 신하들은 한산의 높은 산에 올라 백성들이 살 만한 곳을 살펴보았어요. 장남인 비류가 말했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19758_2636.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19758_2636.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19758_2636.png" /><br style="clear:both;" />한강가 높은 산에 오른 비류와 온조(한성백제박물관)</p><p><br /></p><p>“나라를 세우고 나면 주변에 있는 여러 나라들과 교류를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바닷가에 나라를 세우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p><p><br /></p><p>비류의 말에 열 명의 신하가 반대하며 말했어요.</p><p><br /></p><p>“이곳은 북으로 큰 강을 띠처럼 두르고 있고, 동으로는 높은 산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남으로는 넓고 비옥한 벌판을 가지고 있고, 서로는 큰 바다에 막혔으니 이렇게 험준하다면서도 이점이 많은 땅은 다시 얻기 어렵습니다. 여기에 도읍을 세우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p><p><br /></p><p>“형님, 신하들의 말이 틀리지 않습니다. 그들의 말을 따르시지요?”</p><p>“생각이 서로 다르다면 가는 길도 달라야 하지 않겠느냐? 원하는 곳에 각자 나라를 세우도록 하자.”</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12:56:12+09:00</dc:date>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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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유리, 아버지 주몽을 찾아오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bc/73</link>
<description><![CDATA[<p>부여에서 도망쳐 온 주몽은 졸본부여에 살고 있던 소서노의 도움을 받아 고구려를 세웠어요. 주몽이 고구려의 왕이 되자 소서노도 왕비가 되었고, 소서노의 두 아들 비류와 온조도 고구려의 왕자가 되었지요.</p><p><br /></p><p>주몽은 나라를 세우는데 많은 도움을 준 소서노를 귀하게 대했어요. 물론 비류와 온조도 자기 자식처럼 아꼈지요. 소서노는 주몽을 이을 왕은 첫째 아들인 비류가 될 것이라 생각했어요.</p><p><br /></p><p>나라의 기틀을 잡아가던 어느 날이었어요. 부여에서 한 젊은 청년이 주몽을 찾아왔어요.</p><p><br /></p><p>“폐하! 저를 알아보시겠는지요? 소자 유리옵니다.”</p><p><br /></p><p>“뭐시라! 네가 내 아들이라면 증표를 가져왔을 터. 어머니께 증표 이야기는 들었느냐?”</p><p><br /></p><p>주몽은 부여에 있을 때 예씨 성을 가진 여인과 결혼을 했었어요. 예씨 부인은 임신을 하고 있었는데, 주몽이 갑작스럽게 부여를 떠나면서 부인을 혼자 두고 올 수 밖에 없었지요. 주몽은 부여를 떠나면서 일곱 모난 돌 위의 소나무 아래에 증표를 숨겨두고 왔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19548_0476.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19548_0476.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19548_0476.png" /><br style="clear:both;" />유리와 일곱 모난 돌</p><p><br /></p><p>유리는 주몽에게 부러진 칼날을 전하며 말했어요.</p><p><br /></p><p>“네, 폐하께서 숨겨놓으신 부러진 칼날을 찾아왔습니다.”</p><p><br /></p><p>주몽이 가지고 있던 나머지 반쪽 칼날을 서로 맞춰보니 두 조각이 딱 맞았어요. 주몽은 부여에서 힘겹게 아버지를 찾아온 아들을 보게 되어 무척이나 기뻤어요. 그리고 유리를 고구려의 태자로 삼았지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12:52:41+09:00</dc:date>
</item>


<item>
<title>온조, 한강 유역에 백제를 열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bc/72</link>
<description><![CDATA[<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19397_067.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19397_067.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19397_067.png" /><br style="clear:both;" />한성백제박물관(서울 송파구)</p><p><br /></p><p><br /></p><p><br /></p><p>“어마마마, 저는 바다와 가까운 곳에 터를 잡고 싶습니다.”</p><p><br /></p><p>“비류 형님, 큰 강 옆으로 넓은 평야가 있고 주변이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이곳이 나라를 세우기에 더욱 좋은 곳이 아닐까요?”</p><p><br /></p><p>“아니다. 너는 어머니를 모시고 뜻한 대로 하거라. 나는 나를 따르는 백성들과 함께 미추홀(인천)로 갈 것이다.”</p><p><br /></p><p>비류는 그를 따르는 백성들과 함께 미추홀로 떠났어요. 미추홀로 향하는 비류와 백성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온조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12:50:14+09:00</dc:date>
</item>


<item>
<title>박혁거세와 알영, 오릉에 묻히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bc/71</link>
<description><![CDATA[<p>오랫동안 나라를 다스리며 백성들의 존경을 받던 박혁거세가 몸이 쇠약해져 숨을 거두고 말았어요. 그런데 신기한 일이 벌어졌어요. 박혁거세의 몸이 홀연히 하늘로 올라갔는데, 8일 후에 몸이 나뉘어져 땅에 떨어진 거예요. 그리고 지아비를 잃고 홀로 남아 눈물을 흘리던 알영 왕비 역시 왕을 따라 세상을 떠났어요.</p><p><br /></p><p>“아이고! 아이고! 어진 임금님께서 갑자기 떠나시다니...”</p><p><br /></p><p>“왕비께서도 어찌 그리 빨리 떠나신단 말입니까!”</p><p><br /></p><p>“나라를 지키던 두 성인을 모두 잃었으니 우리 백성들은 어찌 살란 말인가!”</p><p><br /></p><p>왕과 왕비를 모두 잃은 백성들은 슬퍼하며 둘을 함께 장사지내려 했어요. 그러나 큰 뱀이 나타나 사람들이 무덤 만드는 일을 방해했지요. 사람들은 뱀을 두려워하여 박혁거세의 몸이 흩어져 떨어진 곳에 여러 무덤을 만들어 장사를 지냈어요. 이 곳이 바로 지금의 경주 오릉이지요. 어떤 사람들은 뱀이 무덤을 지킨다고 해서 뱀 사 자(蛇)를 써서 사릉이라고도 불렀답니다.</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19217_7617.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19217_7617.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19217_7617.png" /><br style="clear:both;" />경주 오릉</p><p><br /></p><p><br /></p><p><br /></p><p>건국 이야기에는 신비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어요. 하지만 그 신비한 이야기들에는 역사적 의미가 담겨 있지요. 박혁거세 이야기 속 우물은 여섯 마을이 농경을 중시하는 사회였다는 걸 알려주고 있어요. 알에서 태어난 박혁거세가 나라를 세웠다는 것은 고구려 주몽이나 가야의 김수로의 건국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하늘에서 내려온 신성한 인물이 나라를 세웠다는 것을 뜻해요. 물론 진짜로 하늘에서 내려왔다기보다는 그들이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특별한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한 것이지요.</p><p><br /></p><p>박혁거세 신화는 혈통 중심의 작은 사회가 연합해 하나의 큰 나라로 뭉쳐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어요. 박혁거세라는 인물이 나정을 중심으로 나라를 세우고 세력을 넓혀 여섯 마을을 아우르고, 그리고 점차 강력한 사로국을 만들었다는 것을 이야기로 남긴 것은 아닐까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12:47:12+09:00</dc:date>
</item>


<item>
<title>알영, 신라의 첫 번째 왕비가 되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bc/70</link>
<description><![CDATA[<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19043_3577.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19043_3577.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19043_3577.png" /><br style="clear:both;" />계룡과 알영</p><p><br /></p><p><br /></p><p><br /></p><p>『삼국유사』에는 박혁거세의 부인인 알영에 대한 이야기가 전하고 있어요.</p><p>박혁거세가 태어나던 해에 알영정에 계룡이 나타났어요. 이 계룡은 머리는 닭을, 몸은 용을 닮았는데, 왼쪽 옆구리로 여자 아기를 낳았어요. 이때 우물로 물을 길러 온 한 할머니가 이 여자 아기를 받았지요.</p><p><br /></p><p>“계룡이 아기를 낳다니... 아기는 건강한데 흉측하게 입술이 닭의 부리를 닮았네!”</p><p><br /></p><p>아기의 모습에 놀란 할머니는 아기를 안고 월성 북쪽의 냇가로 가서 몸을 씻겼어요. 그러자 아기의 입에서 부리가 떨어지고 예쁜 입술이 나타났어요.</p><p><br /></p><p>사람들은 아기의 이름을 우물의 이름을 따서 ‘알영’이라 지었어요. 그리고 궁을 짓고 박혁거세와 알영을 모셔 함께 길렀어요.</p><p><br /></p><p>박혁거세는 왕이 되자 알영을 왕비로 맞아들였어요. 두 사람은 백성들을 덕으로 다스렸어요. 백성들에게는 농사와 누에치기를 장려하여 땅에서 많은 것을 얻도록 하였어요. 백성들도 어진 임금을 본받아 사로국은 다툼이 없고 도둑이 없는 나라가 되었다고 전해집니다.</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12:44:20+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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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em>
<title>박혁거세의 탄생</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bc/69</link>
<description><![CDATA[<p>어느 날 여섯 촌장은 양산촌을 흐르는 냇가 언덕에 모여 회의를 열었어요. 임금이 따로 없었던 때라 여섯 촌장이 모여 중요한 일을 결정하곤 했어요. 양산촌의 촌장은 근심어린 표정으로 말문을 열었어요.</p><p><br /></p><p>“백성들이 잘못된 생각으로 제멋대로 행동하니 어찌 하면 좋을까요?”</p><p><br /></p><p>“마을마다 법도가 서로 달라 벌어진 일입니다.”</p><p><br /></p><p>“맞습니다. 덕이 있는 분을 찾아 임금으로 삼고 나라를 세워 법도를 세워야 합니다.”</p><p><br /></p><p>“좋은 생각입니다. 하지만 여섯 마을의 모든 백성들에게 존경받을 수 있는 분을 어떻게 모실 수 있을까요?”</p><p><br /></p><p>여섯 촌장은 이런 생각 저런 의견을 제시해 보았지만 뾰족한 수가 나오지 않았어요.</p><p>그때였어요. 나정(우물) 옆 수풀 속에서 이상한 기운이 번개처럼 뻗치면서 말 울음소리가 크게 들렸어요. 여섯 촌장은 말 울음소리에 이끌려 숲 속으로 갔어요. 숲 속에서는 흰 말이 무릎을 꿇고 절을 하는 시늉을 하더니 하늘로 올라가는 게 아니겠어요. 말이 있던 자리에는 큰 알이 한 개가 놓여 있었어요. 알을 깨보니 거기에 튼튼한 사내 아기가 들어있었어요.</p><p><br /></p><p>“응애! 응애! 응애!”</p><p><br /></p><p>“아니 이런 일이 다 있나? 알에서 아기가 태어나다니 이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닐세.”</p><p><br /></p><p>촌장들은 아기를 안아 냇가에서 몸을 닦아 주었어요. 그러자 아기의 몸에서 광채와 향기가 나고 아기 주변으로 새와 짐승들이 몰려와 춤을 추는 것이 아니겠어요. 이 모습을 기이하게 여긴 한 촌장이 말했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18892_9594.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18892_9594.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18892_9594.png" /><br style="clear:both;" />여섯 촌장과 박혁거세</p><p><br /></p><p><br /></p><p><br /></p><p>“우리의 소원을 알고 하늘이 임금을 주신 것이에요. 이 아기를 임금으로 모십시다.”</p><p><br /></p><p>“어진 인물을 모셔 나라를 세우라는 옛말이 있으니 이것을 두고 하는 말일 것입니다.”</p><p><br /></p><p>“좋소이다.”</p><p>태어난 알이 큰 박과 닮아서 성을 박씨로 삼았고, 빛으로 세상을 다스린다는 뜻을 담아 이름을 혁거세라 지었어요. 여섯 촌장은 아기를 거두어 정성을 다해 길렀어요. 아기가 10여 세가 되자 매우 똑똑하고 재주가 뛰어났어요. 13세가 되자 여섯 촌장은 임금에 해당하는 거서간으로 모셨어요. 천 년 동안 계속될 신라의 첫 번째 임금은 이렇게 탄생했어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12:41:47+09:00</dc:date>
</item>


<item>
<title>박혁거세, 신라의 첫 임금이 되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bc/68</link>
<description><![CDATA[<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16179_7182.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16179_7182.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16179_7182.png" /><br style="clear:both;" />나정(경북 경주시)</p><p><br /></p><p><br /></p><p><br /></p><p>신라의 첫 이름은 사로국(서라벌)이었어요. 사로국은 지금의 경주시 전체를 합친 정도 크기의 작은 나라였어요. 사로국 이전에는 고조선이 멸망한 이후 북쪽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이 산골짜기 이곳저곳에서 여섯 마을을 이루고 살고 있었어요. 여섯 마을은 각각 여섯 촌장이 다스렸지요. 그러다가 여섯 마을이 합쳐져 사로국이 만들어졌어요.</p><p><br /></p><p>어떻게 사로국이 만들어졌을까요? 다행히 이 때의 모습을 담은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답니다.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알아볼까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11:56:39+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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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em>
<title>역사 속 작은 이야기: 마한이 백제에 멸망 당한 시기는 언제일까?</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bc/67</link>
<description><![CDATA[<p>경기도, 충정도, 전라도 일대에서 발전했던 마한은 언제 역사 속으로 사라졌을까요? 중학교 역사책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어요.</p><p>백제는 4세기 후반 근초고왕 때 크게 발전하였다. 이 시기에 해상 교역망을 둘러싸고 고구려와 대립하였고,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하여 대동강 이남의 땅을 차지하였다. 남쪽으로는 마한의 남은 세력을 정복하여 남해안까지 영역을 확장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해상 교역망을 장악하며 남조 및 가야, 왜 등과 교류하였다.</p><p><br /></p><p>- 2015 개정교육과정 중학교 역사② 지학사-</p><p><br /></p><p>일반적으로는 근초고왕 24년(369)에 마한이 백제에 멸망 당했다고 해요. 그런데 요즘은 다른 주장도 나타나고 있어요. 대표적인 근거로 1996년에 발굴된 나주 복암리 3호분을 들 수 있어요. 이 고분은 마한 무덤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어요. 그런데 연구를 해보니 만들어진 시기가 5세기 말이라는 거예요. 4세기 후반에 멸망 당했다는 마한이 이 시기에 자신들만의 독특한 무덤을 남길 수 없다는 것이죠.</p><p><br /></p><p>또 하나의 근거로는 중국에서 발견된 ‘양직공도’를 들 수 있어요. ‘양직공도’에서 ‘양’은 6세기에 있었던 중국 남조의 여러 나라 중 하나예요. 백제 무령왕릉에서 양나라의 동전이 발견될 정도로 우리나라와 활발하게 교류하던 나라지요. 이 양나라가 주변 국가한테 조공을 받은 내용을 그림과 글로 작성해 놓은 것이 ‘양직공도’예요. ‘양직공도’에는 백제 사신이 그려져 있는 것으로 유명해요.</p><p>그런데 여기에는 백제 사신만 그려져 있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마한의 작은 나라로 생각되는 나라의 사신들도 그려져 있다고 해요. 4세기 후반 근초고왕 때 이미 멸망한 나라가 6세기에 있었던 나라인 양에게 사신을 보냈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라는 것이죠.</p><p><br /></p><p>이렇듯 마한이 멸망한 시기를 두고 두 가지 의견이 대립하고 있어요. 마한이 멸망한 시기가 언제인지 정말 궁금하지 않나요? 그러니 여러분들은 마한의 역사에 좀 더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면 좋겠어요. 이를 위해 앞에서 소개한 마한 관련 장소를 부모님과 함께 찾아가 보는 것은 어떨까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11:27:15+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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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마한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bc/66</link>
<description><![CDATA[<p>마한이 54개 나라로 이루어졌다는 거 기억나지요? 중국 역사책에는 이런 마한의 나라 이름이 모두 적혀있어요. 나라 중 규모가 큰 나라는 1만여 가(家), 작은 나라는 수천 가(家)의 사람이 살았다고 해요. 큰 나라와 작은 나라를 지배하는 군장도 각각 ‘신지’와 ‘읍차’로 구별해서 불렀다고 해요.</p><p>그런데 정치적 지배자인 신지와 읍차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 있었어요. 바로 천군이 다스리는 ‘소도’라는 곳이죠, ‘소도’에는 큰 나무에 북, 방울, 새 모양의 장식 등을 매달아 놓아 특별한 곳임을 표시했어요. 이곳으로 죄를 지은 사람이 도망가도 함부로 잡아갈 수 없었어요. 제사를 담당하는 사람과 정치 지도자의 역할이 나뉘어 있음을 보여주는 거예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14233_8362.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14233_8362.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14233_8362.png" /><br style="clear:both;" />소도의 모습</p><p><br /></p><p><br /></p><p><br /></p><p>마한에서는 농사가 발달했어요. 이때 경작된 작물은 청동기시대부터 생산된 조, 피, 보리 이외에 벼도 있었답니다. 벼농사는 다른 작물보다도 충분한 물이 공급되어야 해요. 마한 사람들은 곳곳에 저수지를 만들고, 씨를 뿌린 후인 5월에 농사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냈어요. 벼를 거두어들인 10월에도 감사의 마음으로 다시 한 번 하늘에 제사를 지냈지요.</p><p><br /></p><p>농사가 발달하고 생활이 넉넉해지면서 마한의 지배층은 좋은 옷을 입고 화려한 장신구로 치장했어요, 중국 역사책에는 마한에서 누에와 뽕나무를 키웠다는 기록이 있어요. 이를 통해 마한에서는 비단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을 것으로 보이기도 해요. 실제로 광주 신창리 무덤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비단 조각이 발굴되었어요. 또 나주 신촌리 무덤에서는 지배층이 사용했을 것으로 여겨지는 화려한 금동관과 금동신발도 발굴되었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14260_8918.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14260_8918.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14260_8918.png" /><br style="clear:both;" />나주 신촌리 금동관</p><p>국가유산청</p><p><br /></p><p>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이 있어요. 신라나 백제의 무덤을 발굴하면 금으로 된 장식품이 많이 나오는데, 마한의 무덤에서는 금으로 만든 장식품보다 옥이나 구슬로 된 장식품이 더 많이 출토된다는 거예요. 이를 통해 마한 사람들은 금으로 만든 장식품보다 구슬이나 옥으로 치장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고 추측할 수 있어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11:24:37+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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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마한 삼국과 다른 특징을 가진 무덤을 만들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bc/65</link>
<description><![CDATA[<p>옛날부터 오랫동안 무덤을 만들 때는 땅을 파고 그 속에 시신을 묻는 것이 일반적이었어요. 마한에서는 이런 땅을 파고 묻는 무덤도 있지만 땅 위에 흙을 쌓고 그 속에 시신을 두는 무덤도 많이 발견되어요. 마치 작은 언덕처럼 보이는 이런 무덤을 분구묘(墳丘墓)라고 불러요. 분구묘는 나중에라도 수직 또는 수평으로 무덤을 추가해서 만들기가 쉬웠어요.</p><p>분구묘 중 대표적인 것이 전라남도 나주 복암리에서 발견되었어요. 나주 복암리 3호분은 하나의 분구에 다양한 종류의 무덤이 41기나 발견되었는데, 역사학자들이 연구해 보니 무덤들은 약 400여 년에 걸쳐 만들어졌다고 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13954_3856.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13954_3856.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13954_3856.png" /><br style="clear:both;" />나주 복암리 3호분 유구 전경</p><p>국가유산청</p><p><br /></p><p><br /></p><p><br /></p><p>마한을 대표하는 또 다른 무덤으로는 독무덤을 들 수 있어요. 독무덤은 다른 말로는 옹관묘라고도 부르는데, 앞에서 본 것처럼 항아리에 죽은 사람의 시신을 보관하는 것을 말해요.</p><p><br /></p><p>독무덤은 우리나라가 아닌 곳에서도 종종 나타나요. 이때의 독무덤은 주로 어린아이들의 장례용으로 만들어졌어요. 그런데 마한의 독무덤은 어린아이들을 위한 것 이외에 어른들을 묻기 위해 크게 만들어진 것도 많아요. 그리고 지리적으로는 영산강 유역에서, 시기적으로는 마한이 백제에 흡수되기 이전의 것이 많이 발견된답니다.</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13990_3772.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13990_3772.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13990_3772.png" /><br style="clear:both;" />독널의 매장방법</p><p><br /></p><p>마한 사람들이 독무덤을 만든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마한 무덤의 특징인 분구묘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여요. 마한 사람들도 처음에는 사람이 죽으면 나무로 만든 관이나 상자를 사용해 시신을 묻었던 것 같아요.</p><p><br /></p><p>그런데 시간이 흘러 분구묘에 또 다른 사람의 무덤을 만드는 과정에서 조상이나 이전에 죽은 사람의 나무로 만든 관이나 상자가 썩어서 시신이 잘 보관되지 못한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지요. 그래서 그 대안으로 썩지 않는 항아리를 크게 만들어 시신을 넣어 묻은 거라는 주장이 있어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11:20:20+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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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마한의 역사가 시작되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bc/64</link>
<description><![CDATA[<p>마한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중국 역사책에 남아 있어요. 진수라는 사람이 쓴 『삼국지』에는 한반도 남부에는 한(韓)이 있고, 이들은 마한, 진한, 변한의 삼한을 이루고 있다고 적혀있어요.</p><p>『삼국지』보다 먼저 편찬된 또 다른 역사책이자 중국 삼국 시대 위나라의 역사를 정리한 『위략』에는 고조선 왕 준왕이 위만에게 쫓겨나 바다를 건너 한(韓)이 있는 지역으로 왔다는 기록이 있어요. 그래서 마한의 역사를 연구하는 역사가들은 고조선에서 온 사람들이 아산만 일대에 살기 시작하면서 마한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생각해요.</p><p><br /></p><p>이후 마한은 낙랑을 비롯한 주변 지역과 교류하면서 힘을 키워 한강 유역을 비롯해 충청도, 전라도 지역으로 세력을 넓혀갔어요. 이런 마한에 위기가 찾아왔어요. 바로 한강 유역에서 성장한 백제의 힘이 세졌기 때문이에요. 백제는 고대국가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경기도에서 시작하여 충청도, 전라도 지역까지 차츰 영토를 넓혀갔어요. 그 과정에서 마한 지역은 백제에 흡수될 수밖에 없었죠.</p><p><br /></p><p>마한은 자신들만의 독특한 문화를 가지고 있었어요. 이를 알 수 있는 대표적인 예가 바로 무덤의 형태에요. 인간은 선사 시대부터 사람이 죽으면 그 시신을 보존하기 위해 무덤을 만들어 왔어요. 그런데 무덤의 양식은 인간이 만든 문화유산 중 쉽게 변화하지 않는 것 중 하나예요.</p><p><br /></p><p>그래서 역사학자들은 무덤의 형태로 각 나라의 연관성을 살피기도 해요. 이를테면 고구려와 백제가 모두 돌무지무덤(적석총)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통해 두 나라가 서로 관련되어 있다고 하는 것처럼 말이죠.</p><p><br /></p><p>그렇다면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와는 다른 마한 무덤의 특징은 무엇일까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13712_0814.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13712_0814.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13712_0814.png" /><br style="clear:both;" />석촌동 백제초기적석총 2호분</p><p>국가유산청</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11:15:25+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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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마한의 역사를 알려면 이곳을 찾아가요.</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bc/63</link>
<description><![CDATA[<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13180_5096.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13180_5096.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13180_5096.png" /><br style="clear:both;" />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13439_541.gif"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13439_541.gif"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13439_541.gif" /> 마한박물관 사이트 안내<br /></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11:08:49+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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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마한, 삼한을 이끌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bc/62</link>
<description><![CDATA[<p>우리나라 최초의 국가가 어느 나라인지 아나요? 맞아요. 청동기 문화를 바탕으로 세워진 고조선이죠. 고조선의 역사는 기원전 108년 중국 한나라의 공격으로 멸망할 때까지 아주 오랜 기간 이어졌어요. 그 과정에서 철기도 받아들였지요.</p><p><br /></p><p>철기를 만드는 기술이 널리 퍼져가면서 만주와 한반도에는 여러 나라가 세워졌어요. 북쪽에는 부여와 고구려, 동해안 일대에는 옥저와 동예, 한반도의 중남부 지역에는 삼한이 자리 잡았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13054_7187.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13054_7187.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13054_7187.png" /><br style="clear:both;" />철기를 바탕으로 세워진 여러 나라</p><p><br /></p><p>삼한은 마한, 진한 변한으로 나눌 수 있어요. 마한은 지도에서 보듯이 경기도와 충청도, 전라도에 있었고, 54개의 크고 작은 나라로 이루어졌다고 해요. 이러한 54개 나라를 하나로 묶어서 마한이라 불러요.</p><p>그 중심지는 오늘날 천안, 익산, 나주 등이에요. 진한은 경상도의 낙동강 동쪽의 경주와 대구 지역을 중심으로 발전했으며, 12개의 나라가 있었다고 해요. 마지막으로 변한은 낙동강 하류 김해와 창원 지역에 있었어요. 변한은 진한처럼 12개의 나라로 이루어졌다고 해요.</p><p><br /></p><p>이렇듯 삼한에는 78개의 나라가 있었던 거예요. 각 나라를 다스리던 지배자는 그 세력 크기에 따라 신지, 읍차 등으로 불렸어요. 그리고 이러한 삼한을 이끌던 나라도 있었어요. 바로 목지국이에요. 목지국은 마한 54개 나라 중 가장 힘 있는 나라였고, 목지국이 있던 마한이 삼한 중 가장 세력이 컸어요. 자 그럼 지금부터 마한의 역사에 대해 살펴볼까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11:04:35+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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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em>
<title>영산강 유역의 마한 유적</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bc/61</link>
<description><![CDATA[<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12855_1318.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12855_1318.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12855_1318.png" /><br style="clear:both;" />국립나주박물관(전남 나주시)</p><p><br /></p><p>“교수님! 어제 신문 기사를 보니 마한 역사문화권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질 것 같아요.”</p><p><br /></p><p>“저도 보았어요. 앞으로 마한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겠군요.”</p><p><br /></p><p>2020년 한 대학생이 교수님과 나눈 가상 대화예요. 대화 속에서 등장하는 마한은 어떤 역사를 간직한 나라일까요? 지금부터 마한 사람들이 살아온 모습을 살펴볼까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11:01:14+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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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em>
<title>넓은 세상으로 나아가 고구려를 세우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bc/60</link>
<description><![CDATA[<p>“아니, 주몽이 지금 탈출하고 있다고?”</p><p><br /></p><p>대소는 주몽이 출한다는 소식에 버럭 화를 내며 주몽을 잡아야 한다고 명령을 내렸어요.</p><p><br /></p><p>“모두 나서서 주몽을 추격해라! 꼭 그 놈을 잡아야 한다.”</p><p><br /></p><p>대소와 동부여의 군사들은 주몽 일행을 바짝 뒤쫓았어요. 이런 긴박한 상황에서 주몽에게 위기가 닥쳤어요. 주몽이 가는 길 앞을 커다란 강이 가로 막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배가 없으면 이 강을 건너지 못하고 대소와 동부여 군사들에게 꼼짝없이 붙잡힐 위기였어요. 어느덧 주몽을 뒤쫓는 대소와 동부여 군사들이 거의 다 따라 붙었어요.</p><p><br /></p><p>“주몽, 네 이놈, 어디를 도망가느냐.”</p><p><br /></p><p>대소와 동부여 군사들은 주몽을 발견하고 소리쳤어요.</p><p>주몽은 강물을 향해 소리쳤어요.</p><p><br /></p><p>“나는 하늘 황제의 손자이자, 하백의 외손자이다. 오늘 도망 중에 추격자가 있으니 어찌하면 좋겠는가!”</p><p><br /></p><p>주몽의 말이 끝나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어요. 강물이 용솟음치면서 수많은 물고기와 자라들이 물 위로 떠올라 다리를 만들어 준 것이에요. 이에 주몽을 비롯한 사람들은 다리 위로 강을 넘어갔어요. 주몽 일행이 다리를 건너자 물고기와 자라는 다시 강물로 들어갔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12666_8448.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12666_8448.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12666_8448.png" /><br style="clear:both;" />부여를 탈출하는 주몽</p><p><br /></p><p><br /></p><p><br /></p><p>위기를 무사히 넘긴 주몽과 동료들은 압록강 중류의 졸본 지역에 도착했어요. 이곳에서 주몽은 기원전 37년 고구려를 세웠어요. 주몽은 고구려를 건국한 동명성왕으로 역사에 남았어요.</p><p><br /></p><p>그런데 정말 주몽은 알에서 태어난 것일까요? 사실 이 이야기들은 주몽이 새로운 나라인 고구려를 세울 정도로 특별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지요. 나라를 세운 사람들 이야기 중에는 이처럼 특별한 출생의 비밀을 가진 사례가 많아요. 더불어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어줬다는 이야기도 마찬가지에요. 이런 이야기들은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할 때 하늘의 도움을 받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에요.</p><p><br /></p><p>역사 속 이야기들 중에는 이처럼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라기보다는, 주인공을 더욱 특별하고 신비하게 보이도록 지어낸 것도 있어요. 주몽 이야기를 다시 읽으면서 고구려를 세운 주몽의 어떤 부분들이 강조되었는지 생각해볼까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10:58:04+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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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왕자들의 괴롭힘과 위협으로 동부여를 떠날 결심을 하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bc/59</link>
<description><![CDATA[<p>“주몽, 저 놈을 그냥 내버려두면 안 될 것 같아.”</p><p><br /></p><p>“네, 형님. 저 놈이 저렇게 활쏘기를 잘하며 우쭐하면서 아바마마의 인정받는 것을 더 이상 못 보겠습니다.”</p><p><br /></p><p>“그래, 저 놈에게 왕위를 빼앗길 순 없지.”</p><p><br /></p><p>금와왕에게는 첫째 아들 대소를 비롯한 많은 왕자들이 있었어요. 이들은 주몽이 많은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것이 못마땅했어요. 자신들과 달리 주몽이 어려서부터 용감하고 재주가 뛰어나서 아버지인 왕에게 사랑을 받는 모습이 싫었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주몽은 왕자들과 잘 지내고 싶었어요. 그래서 왕자들의 심부름도 잘하면서 사이좋게 지내려고 노력했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12480_3161.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12480_3161.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12480_3161.png" /><br style="clear:both;" />고구려 무용총 수렵도(중국 지린성 지안)</p><p>동북아역사재단</p><p><br /></p><p><br /></p><p><br /></p><p>하지만 대소 왕자는 금와왕을 찾아갔어요.</p><p><br /></p><p>“주몽은 사람의 아들이 아니니 그대로 두시면 아니 되옵니다. 훗날 큰 재앙이 될 터이니 주몽을 제거하여 주시옵소서.”</p><p><br /></p><p>금와왕은 주몽을 죽이고 싶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금와왕은 일단 주몽에게 목장에서 말을 돌보라 했어요. 힘든 일을 시키면서 주몽을 지켜보기로 한 것이지요.</p><p>주몽은 성실하게 말을 키웠어요. 그러던 어느 날 유화부인은 주몽을 찾아왔어요.</p><p><br /></p><p>“목장에서 어느 말이 가장 힘세고 뛰어나느냐?”</p><p><br /></p><p>주몽은 자신 있게 가장 좋은 말을 가리켰어요. 그러자 유화 부인은 뜻밖의 이야기를 했어요. 가장 힘세고 날렵한 말에게 먹이를 적게 주라고 했어요. 주몽은 유화 부인이 시킨 대로 했어요. 그러자 가장 힘세고 날렵했던 말이 어느새 비쩍 마르고 볼품이 없어졌어요.</p><p><br /></p><p>이후 금와왕과 신하들이 사냥을 위해 목장을 찾았어요. 주몽이 다른 마음을 품지 않고 목장 일을 잘하는지 감시하기 위해서이기도 했어요. 살펴보니 주몽의 노력으로 대부분 말들이 윤기가 나며 살이 부쩍 올라 있었어요. 이에 금와왕은 주몽을 칭찬한 후, 자신은 살이 오르고 윤기나는 말을 타고 대신들과 함께 사냥에 나섰어요. 주몽에게는 야윈 말을 내어주었지만, 주몽은 뛰어난 활 솜씨로 오히려 더 많은 짐승을 잡았어요.</p><p><br /></p><p>이런 상황을 보면서 왕자와 대신들은 더 이상 주몽을 살려두어서는 안 되겠다고 계획을 세웠어요. 유화부인은 이 사실을 알고 주몽에게 이야기했어요.</p><p><br /></p><p>“더 이상 이곳에 머물러서는 아니 된다. 너를 해치려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구나. 이곳을 떠나 넓은 세상에서 네 뜻을 열어가거라.”</p><p>주몽은 어머니 유화부인의 간곡한 부탁을 받아들였어요. 이후 주몽은 어머니께 인사를 드리고 평소 자신을 믿고 따르던 오이, 마리, 협보를 이끌고 동부여를 떠나 남쪽으로 길을 나섰어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10:55:03+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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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em>
<title>주몽, 알에서 태어나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bc/58</link>
<description><![CDATA[<p>이 소년은 주몽이에요. 주몽의 이야기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비롯한 여러 기록에서 아주 신기하고 특별한 이야기로 소개되어 있어요. 과연 어떤 이야기들일까요?</p><p><br /></p><p>주몽은 신비한 기운을 받고 태어났어요. 주몽의 어머니 유화 부인은 강의 신 하백의 딸이었어요. 유화 부인은 우연히 한 남자를 만나서 사랑하게 되었는데, 그는 자신이 하늘의 아들 해모수라고 하였어요. 하지만 하백은 딸이 마음대로 혼인하였다고 해서 집에서 내쫓았어요.</p><p><br /></p><p>그러던 어느 날, 동부여의 왕인 금와왕이 강가에서 우연히 유화 부인을 만나게 되었어요. 금와왕은 유화 부인이 왜 슬픈 표정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어요. 유화 부인은 허락받지 못한 사랑으로 집에서 쫓겨난 자신의 사연을 이야기했어요.</p><p><br /></p><p>이야기를 들은 금와왕은 이상히 여겨서 유화 부인을 데리고 돌아와 방 안에 가두었어요. 그런데 유화 부인에게 하늘에서 신비한 빛이 계속 따라다니며 비추었어요. 놀랍게도 이 빛으로 유화는 임신이 되었는데, 얼마 후 알을 낳았어요.</p><p><br /></p><p>금와왕은 이를 불길하게 여겨 그 알을 짐승들에게 주었지만 먹지 않았어요. 알을 성 밖 멀리 내어놓자 이번에는 새들이 날개로 알을 감싸 안으며 보호했어요.</p><p>이에 금와왕은 알을 유화 부인에게 돌려주었어요. 유화 부인은 알을 받아 잘 싸서 따뜻한 곳에 두었어요.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알을 깨고 한 사내아이가 나왔어요. 이 아이가 바로 주몽이에요.</p><p><br /></p><p>주몽은 어릴 때부터 활 쏘는 솜씨가 뛰어났어요. 부여에서는 활 잘 쏘는 사람을 ‘주몽’이라고 부르는 풍습이 있었어요. 그래서 사람들은 알에서 태어난 아이에게 주몽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12311_1255.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12311_1255.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12311_1255.png" /><br style="clear:both;" />주몽의 탄생</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10:52:04+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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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주몽, 고구려를 세우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bc/57</link>
<description><![CDATA[<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12149_2803.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12149_2803.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12149_2803.png" /><br style="clear:both;" />오녀산성(중국 랴오닝성)</p><p><br /></p><p>“우와, 또 과녁 한 가운데를 맞췄네.”</p><p><br /></p><p>“어찌된 일인가! 활을 쏘면 백발백중일세.”</p><p><br /></p><p>“최고의 명궁이라더니 정말 대단하네.”</p><p><br /></p><p>활쏘기 대회에 몰려든 사람들은 소년의 활쏘기 실력에 감탄했어요.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고 안정적으로 과녁 한 가운데를 연거푸 명중시키는 모습이 인상적이었기 때문이에요. 과연 이 소년은 누구일까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10:49:24+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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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역사 속 작은 이야기: 청동기 시대 유적지에 왜 간석기가 발견될까?</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bc/56</link>
<description><![CDATA[<p>충청남도 부여 송국리 유적은 청동기 시대 사람들이 살았던 마을이에요. 그런데 이 유적지에서 출토되는 유물에는 청동기만 있는 게 아니고 다양한 종류의 간석기도 함께 발견되고 있어요. 왜 그럴까요?</p><p><br /></p><p>오랫동안 사람들은 돌과 나무, 짐승과 생선의 뼈로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였어요. 도구를 만드는 솜씨는 점점 발달하고, 지식은 점점 쌓여 갔지요. 그러다 마침내 사람들은 금속을 발견했어요. 어느 순간 우연히 금속이 불에 녹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러면 어떤 모양이 만들어지고, 다시 그것을 식혀 모양을 굳힐 수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지요.</p><p><br /></p><p>그러자 사람들은 금속으로 도구를 만들기 시작했어요. 첫 번째 금속은 구리였어요. 그러나 구리는 너무 물러서 그다지 쓸모가 없었어요. 그런데 이 구리에 주석이나 납, 아연을 약간 섞어 보았더니 매우 단단해졌어요. 청동의 발견이에요.</p><p><br /></p><p>청동으로 만든 도구들은 나무나 돌로 만든 것과 달랐어요. 잘 부러지지 않는 데다가 도구의 날은 날카롭게 번쩍였지요. 맘에 들었어요. 특히 부족의 우두머리가 특별한 힘을 과시하기에 더없이 좋았어요.</p><p>그런데 장인들만이 만들 수 있는 청동 검이나 거울은 아무나 쉽게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어요. 제사장을 비롯해 지위가 높은 사람들만이 지닐 수 있는 물건이었어요. 청동기 시대의 우두머리는 부족장이자 제사장이었지요. 제사장은 마을에서 하늘과 자연에 지내는 제사를 이끄는 사람이라 그 권위가 매우 높았지요.</p><p><br /></p><p>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청동기 시대이지만 청동으로 만든 농기구나 생활용품이 드물었어요. 청동은 귀해서 누구나 써야 하는 쟁기나 낫 등의 농기구를 모두 청동으로 만들 수는 없었지요. 때문에 농사를 짓는 데는 여전히 돌로 만든 도구가 더 쓸모가 많았어요. 더구나 청동기가 돌처럼 잘 깨지지는 않는다고 해도, 돌만큼 단단하지는 않았지요. 이런 이유로 청동기 시대이지만 더욱 정교하게 발달한 간석기가 더욱 많이 사용되었지요.</p><p><br /></p><p>청동기 시대라고 해서 청동기만 쓰지 않았어요. 오히려 이전 시대의 도구들을 더욱 발전시켜 사용했어요. 석기 시대에 청동기는 없었지만, 청동기 시대에 석기는 있답니다. 간혹 시대를 잘못 이해하는 경우가 있어요. 역사에서 어떤 물건이나 생각 따위가 한순간 생겼다가 모두 없어지거나 하지는 않는답니다.</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10:46:32+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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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돌로 무덤을 만들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bc/55</link>
<description><![CDATA[<p>만약 고대 사람들의 무덤이 지금까지 전해지지 못했다면 어땠을까요? 아마도 삼국 시대 이전 우리 역사를 거의 알지 못했을지 몰라요. 삼국 시대 이전의 역사를 알려주는 기록은 매우 적기 때문이지요. 이 땅에 살았던 고대의 사람들도 지금 우리처럼 기뻐하고 사랑하며 또 갈등을 빚고 슬퍼하며 살았을 텐데 말이지요.</p><p><br /></p><p>옛날의 무덤은 묻히는 사람뿐만 아니라 그 사람이 쓰던 물건들과 무덤에 넣으려고 만든 특별한 물건들을 함께 묻었어요. 그래서 우리는 무덤 속 유물들을 통해 무덤의 주인공과 그 사람이 살았던 시대의 모습을 함께 상상해 볼 수 있어요.</p><p><br /></p><p>고대의 무덤은 당시의 역사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보물 창고라 할 수 있지요. 부여 송국리 일대의 낮은 산에서 고대의 무덤이 발견되었어요. 바로 돌을 상자처럼 짜서 관을 만든 돌널무덤이에요.</p><p><br /></p><p>돌널무덤은 고인돌과 같은 시기에 유행한 청동기 시대의 무덤이에요. 땅을 판 뒤 두께가 5센티미터 정도인 얇은 판돌로 긴 네모꼴 상자 모양을 만들고, 그 위에 역시 두께 5센티미터 정도 되는 판돌을 덮은 형태이지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11812_0264.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11812_0264.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11812_0264.png" /><br style="clear:both;" />돌널 무덤</p><p>문화재청</p><p><br /></p><p><br /></p><p><br /></p><p>돌널무덤이 있는 곳에는 고인돌도 있는 경우가 많았다고 해요. 그러나 돌널무덤은 고인돌에 비해 그 수가 적고, 무덤 안에 껴묻은 물건으로는 청동기보다 돌검이나 돌화살촉이 많았어요.</p><p><br /></p><p>그런데 부여 송국리에서는 부근에 고인돌이 없고 돌널무덤만 만들어졌어요. 그리고 이 무덤 안에서 비파형 동검 등의 청동기가 껴묻거리로 발견되었지요. 이것은 이 지역에 전에 없던 정치적인 지배자가 등장했다는 사실을 뜻해요. 부여 송국리에서는 비파형 청동검이 출토되어 일찍부터 우리 땅에서도 청동기 문화가 발달했음을 알 수 있게 되었어요.</p><p>유적지는 당시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들을 담고 있어요. 그래서 그곳에 가면 당시 사람들의 생활 모습과 분위기를 느낄 수 있지요. 부여 송국리 마을에 가면 청동기 시대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잘 알 수 있어요. 이번 우리 학교 현장 체험 학습을 부여 송국리 유적지로 가 보면 어떨까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11847_2045.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11847_2045.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11847_2045.png" /><br style="clear:both;" />부여 송국리 유적 출토 유물</p><p>비파형 청동검뿐 아니라 간돌검, 옥으로 만든 장신구가 나왔다.</p><p>문화재청</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10:44:20+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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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송국리형 토기라 불리는 민무늬 토기</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bc/54</link>
<description><![CDATA[<p>부여 송국리 유적 집터에서 민무늬 토기가 출토되었어요. 청동기 시대 부여 송국리 사람들은 민무늬 토기를 만들어 사용하였어요. 민무늬 토기는 겉면에 빗살무늬를 새기는 대신 아무 무늬도 넣지 않고 밋밋하게 만들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에요. 빗살무늬를 새긴 빗살무늬 토기와 비교되지요.</p><p><br /></p><p>빗살무늬 토기는 토기를 굽는 도중에 표면이 갈라져 터지는 것을 막기 위해 빗살무늬를 새겨 만들었어요. 민무늬 토기는 이제 굳이 빗살무늬를 새기지 않아도 갈라져 터지지 않을 만큼 높은 온도에서 토기를 굽는 기술을 터득했다는 것을 의미하지요.</p><p><br /></p><p>또 민무늬 토기의 바닥은 빗살무늬 토기와 달리 평평하게 만들었어요. 신석기 시대에는 주로 강가나 바닷가 모래밭에 지은 움집에서 살았지만, 청동기 시대에는 들판이나 언덕에 집을 지었어요. 따라서 집 안 바닥은 모래가 아니라 딱딱하게 굳은 땅이었지요. 그러다 보니 이제 토기 바닥도 평평해야 했던 것이지요.</p><p><br /></p><p>또한 민무늬 토기는 위아래를 좁혀 멋도 냈어요. 민무늬 토기는 빗살무늬 토기보다 두께가 얇아졌는데도 훨씬 단단했어요. 이처럼 청동기 시대 민무늬 토기는 기술이 발달하고 생활 환경이 이전보다 좋아졌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지요.</p><p>그런데 부여 송국리 유적에서 출토된 민무늬 토기는 다른 청동기 시대 민무늬 토기와 모양이 조금 달랐어요. 바닥은 평평하고 무늬가 없는 민무늬 토기인데, 배가 부르고 입이 밖으로 바라진 항아리 모양의 것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어요.</p><p><br /></p><p>이러한 특징 때문에 부여 송국리 유적에서 출토된 민무늬 토기는 특별히 이 지역의 이름을 따서 ‘송국리형 토기’로 부르게 되었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11657_4351.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11657_4351.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11657_4351.png" /><br style="clear:both;" />민무늬 토기</p><p>문화재청</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10:41:07+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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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em>
<title>집의 크기가 커지고 울타리도 만들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bc/53</link>
<description><![CDATA[<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11402_4318.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11402_4318.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11402_4318.png" /><br style="clear:both;" /> </p><p><br /></p><p><br /></p><p>신석기 시대 사람들은 강가에 움집을 짓고 살았어요. 이와는 달리 청동기 시대 사람들은 언덕에 집을 짓고 살기 시작했어요. 바닥의 흙은 불에 태워 단단하게 만들고, 짚으로 엮어 만든 자리나 나무껍질, 널빤지 등을 깔아 그 위에서 생활하였지요. 흙바닥이 아닌 ‘방바닥’이 생긴 셈이에요. 벽에는 널빤지를 둘러 세우거나 나무껍질을 대어 습기를 막았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11430_1664.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11430_1664.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11430_1664.png" /><br style="clear:both;" />주거지</p><p>문화재청</p><p><br /></p><p><br /></p><p><br /></p><p>부여 송국리 청동기 마을 유적에는 둥근 모양의 집터와 네모난 모양의 집터가 있어요. 둥근 모양의 집터는 바닥을 깊이 파서 만들었어요. 특이하게 그 구덩이의 양쪽 끝에 기둥 구멍이 하나씩 나 있어요.</p><p><br /></p><p>바닥 가운데에는 타원형의 저장용 구덩이를 파고 그 구덩이 안에 몇 개의 둥근 구덩이를 만들었어요. 네모난 모양의 집터는 바닥을 얕게 파서 땅바닥에 가깝게 만들었어요. 기둥 구멍은 없으나, 주춧돌이 있는 발달한 집 형태를 하고 있지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11453_2051.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11453_2051.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11453_2051.png" /><br style="clear:both;" />둥근 모양의 움집과 네모 모양의 움집</p><p>문화재청</p><p><br /></p><p><br /></p><p><br /></p><p>부여 송국리 청동기 마을은 언덕 위에 세워졌어요. 마을이 언덕 위에 있으면 멀리까지 내다보이기 때문에 사방을 경계하기 좋지요. 마을 주변에는 나무로 높은 울타리를 쌓고 울타리 곳곳에 망루를 세워 누가 쳐들어오지 않는지 망을 보도록 했어요.</p><p><br /></p><p>청동기 시대에 들어오면서 인구가 늘어나고 마을도 많이 생겨났어요. 그러나 한편으로 집단 사이에 경쟁 관계가 생겨나 전쟁도 자주 일어났지요. 마을들 사이에 긴장이 흐르면서 다른 마을 사람이 침입하지 못하도록 방비해야 했어요. 그래서 적의 침입에 대비해 마을을 빙 둘러 도랑을 파고, 나무로 울타리(성벽)를 세웠지요. 이런 나무 울타리를 목책이라고 해요. 마을은 살기에 편하면서도 안전해야 했어요.</p><p><br /></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11485_3931.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11485_3931.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11485_3931.png" /><br style="clear:both;" />목책</p><p>문화재청</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10:38:42+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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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em>
<title>부여 송국리 유적, 청동기 시대 마을을 담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bc/52</link>
<description><![CDATA[<p>충청남도 부여 송국리 유적에 가면 청동기 시대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알 수 있어요. 금강 유역에 있는 부여 송국리 유적은 낮은 구릉 지대로 주변에는 넓은 평야 지대가 펼쳐져 있지요.</p><p><br /></p><p>이 유적은 1975년 국립중앙박물관의 발굴조사로 알려졌어요. 1997년까지 여러 차례의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결과 다수의 집터와 무덤들이 발견되었어요. 이 유적에서 조사된 움집은 평평하고 네모난 모양의 얕은 움집과 평평하고 동그란 모양의 깊은 움집이었어요. 또 이곳은 나무 울타리나 도랑으로 둘러싸여 있었지요. 이것으로 보아 이곳은 청동기 시대 사람들이 집단으로 생활하였던 비교적 규모가 큰 마을이었음을 알 수 있었어요.</p><p><br /></p><p>부여 송국리 유적에서는 여러 가지 토기와 석기가 출토되었어요. 토기로는 민무늬 토기가 많이 나왔고, 붉은 간토기나 검은 간토기 등도 있었어요. 석기로는 여러 가지 종류의 반달돌칼과 돌화살촉, 간돌검, 가락바퀴, 돌도끼 등이 있어요. 또 비파형 동검이 돌널무덤에서 출토되었어요. 비파형 동검이 한반도 남쪽에서 출토되었다는 점은 특별한 의미를 갖지요. 덧붙여 부채꼴 모양의 청동 도끼 거푸집도 출토되었어요.</p><p><br /></p><p>오늘날 부여 송국리 유적은 청동기 시대 사람들이 집단으로 생활한 마을 유적으로 청동기 시대 생활상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어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10:31:41+09:00</dc:date>
</item>


<item>
<title>청동기 시대 생활 터전, 부여 송국리 유적</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bc/51</link>
<description><![CDATA[<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10986_9816.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10986_9816.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10986_9816.png" /><br style="clear:both;" />부여 송국리 유적(충남 부여군)</p><p><br /></p><p><br /></p><p>“자네, 빗살무늬 새겨 넣지 않나?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토기가 깨져 쓸모가 없다네.”</p><p><br /></p><p>“자네, 아직 모르는군. 이제 빗살무늬를 일부러 새겨 넣을 필요가 없다네. 그렇게 하지 않아도 훨씬 튼튼한 토기를 만들 수 있다네.”</p><p><br /></p><p>부여 송국리 유적지에 가면 청동기 시대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알 수 있는 유적과 유물이 있어요. 과연 청동기 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생활했을까요? 우리 함께 부여 송국리 유적으로 떠나볼까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10:30:13+09:00</dc:date>
</item>


<item>
<title>역사 속 작은 이야기: 청동기 시대는 청동으로 만든 도구만 사용했을까?</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bc/50</link>
<description><![CDATA[<p>한반도에 청동기와 제조법이 들어왔어요. 처음에는 지배층을 중심으로 청동기를 사용했어요. 그럼 청동기 시대 일반 백성들도 청동기를 사용했을까요?</p><p><br /></p><p>많은 수의 청동기가 한반도에 출토되면서 당시 사회 모습을 되살릴 수 있었어요. 출토된 청동기의 종류를 살펴보면, 비파형 청동검이나 청동거울, 청동방울 등 최고 제사장이 사용했을 도구가 많아요.</p><p><br /></p><p>청동기가 더 발전하면서 세형동검이나 투겁창 등 전쟁에서 사용했던 무기 종류도 늘어났어요. 하지만 일반 백성들이 생활 속에서 사용했을 도구들은 많이 발견되지 않았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10787_6303.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10787_6303.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10787_6303.png" /><br style="clear:both;" />청동기 시대 간석기(국립중앙박물관, 국립부여박물관)</p><p><br /></p><p><br /></p><p><br /></p><p>뜻밖에 청동기 대신 간석기가 그 자리를 차지했어요. 간돌칼이나 간화살촉 등 무기류도 많이 출토되었지만, 반달돌칼이나 도끼 등 일상생활 속에서 사용하던 도구도 많이 출토되었어요. 신석기 시대 만들어진 간석기는 청동기 시대에 더욱 정교해지면서 생활 속에서 두루 사용된 것이지요.</p><p><br /></p><p>청동기 시대에 간석기가 많이 사용된 까닭은 아마도 청동의 재료가 되는 구리와 주석을 넉넉하게 생산할 수 없었기 때문일 거예요. 광산을 개발해 얻어야 하는 구리와 주석은 귀한 금속이었고, 이것을 이용해 만든 청동기는 당연히 귀한 물건이 되었지요.</p><p>청동이 귀한 청동기 시대가 지나가면서 금속 다루는 기술이 발전하였고, 청동보다 더 구하기 쉬운 철이 나타나면서 일반 백성도 금속을 이용한 도구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어요. 청동으로 시작한 금속의 시대가 백성들에게 더 많은 금속 도구를 만들어낼 기회를 가져다주었어요.</p><p><br /></p><p>인류는 새로운 재료와 제조법을 개발하며 문명을 발전시켜 왔어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크게 바꿀 때는 늘 새로운 기술이 그 토대가 되었어요.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의 삶을 더욱 발전시킬 새로운 기술은 무엇이 있을지 생각해 보아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10:26:44+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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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잔무늬 거울의 미스터리</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bc/49</link>
<description><![CDATA[<p>청동거울은 한반도와 중국, 일본에서도 많이 출토되는 대표적인 청동기 유물이에요. 빛을 받으면 반짝거리는 청동거울은 하늘의 태양을 의미한 것으로 보여요. 제사장은 가슴에 청동거울(태양)을 매달아 자신이 하늘을 대신한 사람임을 과시했을 거예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10629_6695.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10629_6695.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10629_6695.png" /><br style="clear:both;" />잔무늬 거울(다뉴세문경, 문화재청)과 청동거울을 매단 제사장의 상상도</p><p><br /></p><p><br /></p><p><br /></p><p>1960년경 충남 논산에서 특별한 청동거울 한 점이 출토되었어요. 이 청동거울을 조사한 학자들은 이전에 볼 수 없었던 모습에 깜짝 놀랐어요. 지름 21.2㎝의 청동거울 안에는 무려 1만3000개가 넘는 정교한 선과 동심원이 새겨져 있었어요. 선과 선 사이의 간격은 0.3㎜로 머리카락보다 더 가늘었어요. 정밀한 도구와 확대경도 없던 시대에 수많은 선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렸다는 것에 학자들 모두 감탄하였어요.</p><p><br /></p><p>게다가 청동거울은 주조법을 이용해 만들었어요. 청동을 녹여 거푸집에 부어 만들었다는 것이죠. 이것은 0.3mm 간격의 수많은 선을 가진 거푸집을 만들었다는 것이에요. 학자들은 이처럼 정교한 방법으로 만들어진 청동기를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어요.</p><p><br /></p><p>학자들은 잔무늬 거울의 제작 비밀을 풀기 위한 연구를 시작했어요. 그러나 작은 원 안에 수많은 선을 그리는 작업은 실패를 거듭했어요. 간신히 선을 그려 거푸집을 만들었어도 청동을 붇다가 거푸집이 깨어지거나 선 무늬가 뭉개졌어요.</p><p><br /></p><p>수십 년 실패를 거듭하던 학자들은 새로운 방법으로 복원에 성공했어요. 하지만 잔무늬 거울의 정교함을 완벽하게 표현해내지는 못했어요. 청동기 시대 고조선의 초정밀 주조법은 지금까지 우리 역사의 미스터리로 남아 있어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10:24:08+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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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독특한 모양의 청동검, 비파형 동검</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bc/48</link>
<description><![CDATA[<p>둥글게 배가 부른 모양이 ‘비파’라는 악기를 닮았다고 하여 이름 붙여진 청동검이 비파형 동검이에요. 학자들은 고조선이 요동 지역을 중심으로 만주와 한반도의 북쪽에 있었을 것으로 보아요. 그런데 비파형 동검이 고조선의 영역에서 청동거울과 함께 많이 출토되었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10403_3253.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10403_3253.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10403_3253.png" /><br style="clear:both;" />비파형 동검과 손잡이를 단 비파형 동검, 그리고 중국식 동검</p><p>국립중앙박물관, 국사편찬위원회</p><p><br /></p><p><br /></p><p><br /></p><p>고조선 사람이 중심이 되어 만든 청동검은 모양이나 만드는 방법이 중국에 있던 나라의 것과 달랐어요. 특히 비파형 청동검은 검날과 손잡이를 따로 만들어 결합해 사용했어요.</p><p><br /></p><p>이와는 다르게 중국검은 한 몸으로 만들었죠. 검날과 손잡이를 따로 만들면 한쪽이 망가져도 일부만 바꿔 쓸 수 있었어요. 조립식으로 만든 비파형 동검의 제작 방식은 지금도 많이 사용하는 아주 효과적인 방법이에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10450_9041.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10450_9041.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10450_9041.png" /><br style="clear:both;" />비파형 동검과 고조선의 범위 비교</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10:21:10+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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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청동기를 만드는 최고의 기술, 거푸집</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bc/47</link>
<description><![CDATA[<p>돌로 도구를 만들 때는 주로 돌을 부딪쳐 깨뜨리거나 갈아서 만들었어요. 이런 방법으로는 사람이 원하는 모양으로 도구를 만들기가 어려웠었어요. 갈기에 쉬운 돌을 찾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지요. 하지만 인류가 구리를 발견하고 이를 이용하면서 도구 제작에 대한 생각이 크게 바뀌었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10096_0778.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10096_0778.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10096_0778.png" /><br style="clear:both;" />청동검 거푸집과 청동도끼 거푸집(국립중앙박물관,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p><p><br /></p><p><br /></p><p><br /></p><p>처음에 사람들은 가열한 구리 덩어리를 망치로 두드려 작은 도구를 만들었어요. 시간이 지나고 구리의 생산량도 늘어나면서 녹은 구리 용액을 일정한 틀에 부어 굳히면 똑같은 모양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도구를 만들기 위해 만든 틀을 거푸집이라고 해요. 거푸집을 이용하면 똑같은 모양의 청동기 여러 개를 손쉽게 만들 수 있었어요. 또한 거푸집의 모양을 달리해서 다른 용도의 도구를 정교하게 만들 수 있었어요.</p><p><br /></p><p>녹은 금속 액체를 거푸집에 붇고 굳혀서 물건을 만드는 것을 ‘주조’라고 해요. 청동기 시대에 개발된 주조 기술은 현재에도 많은 물건을 생산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10160_412.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10160_412.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10160_412.png" /><br style="clear:both;" />거푸집을 이용한 청동기 제작</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10:16:19+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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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최초의 청동기는 어떤 모습일까?</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bc/46</link>
<description><![CDATA[<p>이스라엘의 유적에서 한 여자의 뼈가 발견되었어요.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건조한 기후 때문에 유골은 묻혔을 때의 모습 그대로 발굴되었어요. 이 여자는 손에 작은 청동 송곳을 꼭 쥐고 있었어요. 학자들은 여자가 쥐고 있던 청동 송곳이 구리가 처음 사용되었을 때 만들어진 유물로 밝혀지자 깜짝 놀랐어요.</p><p>인류가 구리를 이용하기 시작할 때는 광산을 개발하는 방법도 몰랐고, 금속을 다루는 법도 몰랐어요. 그래서 땅 위에서 구한 돌을 가열해 아주 적은 양의 구리를 빼내 도구를 만들었어요. 게다가 구리가 단단하지 않아 큰 도구를 만들 수도 없었어요. 큰 도구를 만들 수 있게 된 것도 수천 년이 지나서야 가능했지요.</p><p><br /></p><p>지금까지 발굴된 가장 빠른 시기의 구리 유물은 장식 구술이나 송곳, 낚싯바늘 등 대부분 크기가 작은 것들이에요. 적은 양의 구리와 단순한 제조 기술로 만든 것들이죠.</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09830_1137.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09830_1137.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09830_1137.png" /><br style="clear:both;" /> </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10:06:07+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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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em>
<title>구리의 발견과 문명의 발전</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bc/45</link>
<description><![CDATA[<p>대략 500만 년 전 아프리카에서 첫 인류가 나타났어요. 오랜 시간이 흐르고 인류가 돌을 이용해 처음으로 도구를 만든 시기는 대략 250만 년 전으로 보고 있어요.</p><p><br /></p><p>인류는 우연히 돌과 돌끼리 부딪혀 떨어져 나간 돌조각에서 날카로운 날을 발견했어요. 그리고 날카로운 날을 이용해 찍거나 자르는 도구로 사용했어요. 돌을 다듬는 기술도 조금씩 발전하면서 주먹도끼나 찌르개 등 여러 도구를 만들 수 있었어요.</p><p><br /></p><p>오랫동안 인류는 돌을 다듬는 기술을 발전시켰어요. 신석기 시대에는 돌을 더욱 날카롭게 갈아서 다양한 용도의 도구를 만들어 사용했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09413_5251.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09413_5251.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09413_5251.png" /><br style="clear:both;" />뗀석기와 간석기</p><p>국립중앙박물관</p><p><br /></p><p>아주 오랜 기간 돌을 사용하던 인류는 기원전 약 8000년 전 돌 속에서 새로운 재료를 발견했어요. 다른 의견들도 있지만, 지금의 중동 지역에 살던 인류가 처음 발견했을 것으로 생각하는 그 재료는 동(구리)이라는 금속이었어요. 구리가 포함된 돌을 쌓아 불을 피우면 구리가 녹아요. 그리고 이것이 다시 굳으면 단단한 금속이 된다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되었던 것이지요. 구리를 발견한 인류는 이때부터 불을 이용해 돌 속에 포함된 금속을 가열해 녹여서 뽑아내고, 이것을 다시 굳히는 과정을 통해 구리를 사용하기 시작했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09441_3073.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09441_3073.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09441_3073.png" /><br style="clear:both;" />구리 광석과 주석 광석</p><p>경희대학교 자연사박물관</p><p>도구를 만드는 재료로 구리를 처음 이용했을 때는 구리 광석을 얻기가 매우 힘들었어요. 처음에는 땅 위에서 구할 수 있는 광석을 이용하다 점점 땅속을 파들어 갔지만 아주 적은 양의 구리만 얻을 수 있었어요. 게다가 순수한 구리로 만들면 단단하지가 않아 아주 작은 크기의 송곳, 낚싯바늘 등을 만드는 데 만족해야 했어요.</p><p><br /></p><p>구리를 발견하고 또 많은 시간이 지났어요. 그리고 대략 기원전 4000년 전 인류는 구리에 주석이란 광물을 함께 녹이면 더 낮은 온도(700~900℃)에서 구리를 녹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금속의 녹는 온도가 낮아지면 그만큼 가공하기도 쉬워지지요.</p><p><br /></p><p>이렇게 구리와 주석을 함께 녹여 만든 금속을 청동이라고 해요. 청동은 주석의 양에 따라 색과 단단한 정도가 달라졌어요. 무른 성질의 구리가 주석과 만나 더 단단한 금속이 되자 여러 도구를 만들 수 있었어요. 드디어 본격적인 청동기 시대가 열린 것이에요. 지금의 중동 지역에서 시작된 청동기 문화는 초원길을 따라 동쪽으로 전해졌어요. 그리고 한반도에도 전해졌고, 다양한 청동기가 만들어졌지요.</p><p><br /></p><p>한반도에 전해진 청동기! 우리 조상들은 어떤 청동기를 만들어 사용했을까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10:04:50+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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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em>
<title>돌과 철 사이 인류가 처음 사용한 금속, 청동기</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bc/44</link>
<description><![CDATA[<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09167_0487.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09167_0487.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09167_0487.png" /><br style="clear:both;" />복원한 청동기 시대 마을(고창고인돌박물관)</p><p><br /></p><p>“이보시오! 이보시오! 여기 고물 좀 가져가시오.”</p><p><br /></p><p>“어디 이 정도면 엿 한 덩이면 되겠습니까? 그런데 이 녹슨 고물은 어디서 났소?”</p><p><br /></p><p>“비가 많이 와서 집 주변에 배수로를 파다 우연히 나왔지요.”</p><p><br /></p><p>“하하! 횡재하셨구려.”</p><p><br /></p><p>전남 화순의 한 시골 마을에서 고물 장수가 엿 한 덩이로 바꾼 고물은 다름 아닌 청동기였어요. 그것도 발굴 장소를 알 수 있고 우리나라에 뛰어난 청동기 문화가 있었음을 증명한 국보급 청동기였어요. 청동기는 무엇일까요? 청동기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을까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09:59:53+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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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em>
<title>역사 속 작은 이야기: 고인돌은 우리나라에만 있을까?</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bc/43</link>
<description><![CDATA[<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08920_44.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08920_44.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08920_44.png" /><br style="clear:both;" />세계 고인돌의 분포</p><p><br /></p><p>고인돌은 유럽, 인도, 동남아시아 등 유라시아 대륙에서도 발견되었어요. 유럽에 있는 고인돌은 주로 탁자 모양을 하고 있어요. 그리고 여러 개의 돌을 이어 터널처럼 길게 연결시켜 놓은 모양도 있어요. 이것은 한 사람을 묻는 한반도의 고인돌과 달리 여러 사람을 함께 묻기 위해 만든 것이에요.</p><p><br /></p><p>청동기 시대 사람들은 자연의 모든 것이 살아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 중에서도 오랜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바위를 중요한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죠. 큰 바위를 믿음의 대상으로 삼는 문화가 전 세계에 널리 퍼져있었음을 고인돌을 통해 알 수 있어요. 사람들은 커다란 바위를 사용해 무덤을 만들고, 그 바위처럼 죽은 자가 영원하기를 바랐을 거예요.</p><p>오랜 시간이 지나고 많은 역사의 흔적들은 지워졌지만 고인돌은 그 자리에 남아 우리 선조들이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살았는지를 지금까지 보여주고 있어요. 변하지 않는 돌, 고인돌! 여러분도 고인돌과 함께 옛 조상들의 삶을 상상해 보아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08947_7972.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08947_7972.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08947_7972.png" /><br style="clear:both;" />프랑스 까르냑의 고인돌</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09:56:42+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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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em>
<title>고인돌 왕국 한반도</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bc/42</link>
<description><![CDATA[<p>기원전 2,500년~기원전 수백 년 전후로 만들어졌던 고인돌은 우리나라 어디에서나 볼 수 있을 정도로 많아요. 지금까지 한반도에서는 약 2만 여기 이상의 고인돌이 발견되었어요. 거대한 고인돌을 만들 수 있을 만큼 청동기 시대 한반도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p><p><br /></p><p>고인돌은 주로 해안이나 강변의 바위산 절벽 근처에서 많이 발견되고 있어요. 모두 고인돌의 재료를 구하기 쉬운 장소들이에요. 청동기 시대 사람들은 강과 바다 주변의 살기 좋은 평지에 모여 살면서 근처 산의 바위를 이용해 고인돌을 만들었을 거예요.</p><p><br /></p><p>사람이 살기 좋은 곳에 터를 잡은 청동기 시대 마을은 이후에도 사람들이 그곳에서 계속 살면서 청동기 시대의 흔적을 조금씩 덮어 갔어요. 그래서 지금 청동기 시대 마을 유적은 찾아보기가 매우 힘들답니다. 하지만 고고학자들은 발굴을 통해서 여러 마을 유적을 확인했어요.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마을은 부여 송국리에서 발견되었어요.</p><p><br /></p><p>부여 송국리 유적을 발굴해 보니 통나무를 이용해 목책(나무담장)을 세운 흔적, 적을 막기 위한 물구덩이, 집터가 발견되었어요. 목책과 물구덩이는 적을 막기 위한 시설이에요. 이 유적을 통해 청동기 시대에 여러 부족 사이에 잦은 전쟁이 있지 않았을까 추측하고 있어요.</p><p>집터는 모두 100여 개가 발견되었는데, 둥근 모양의 집터와 주춧돌을 사용한 네모 모양의 집터가 나왔어요. 집짓는 기술이 발전하면서 집 안에 더 넓은 공간을 만들 수 있는 모양으로 발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08650_3164.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08650_3164.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08650_3164.png" /><br style="clear:both;" />부여 송국리 유적과 화순 고인돌 유적 마을 복원 모습</p><p>또한 여러 점의 토기, 항아리, 시루와 반달 돌칼, 돌낫, 돌도끼도 발견되었어요. 이 유물들은 주로 농사와 관련된 것으로 신석기 시대 도구보다 더 발달된 모습을 하고 있어요. 그물추와 가락바퀴도 발견되었는데, 당시 사람들이 물고기도 잡고, 실도 짰음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유물이에요.</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08672_5452.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08672_5452.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08672_5452.png" /><br style="clear:both;" />청동기 시대의 다양한 생활 도구들</p><p><br /></p><p>마을 밖에서는 고인돌도 발견되었어요. 마을 사람들은 농사를 지으며 함께 생활하다 죽으면 마을 가까이에 묻혔어요. 죽어서도 고인돌에 묻혀 마을 사람들과 함께 한 것이지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08695_9575.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08695_9575.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08695_9575.png" /><br style="clear:both;" />우리나라 고인돌의 분포</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09:51:49+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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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고인돌은 지배자의 무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bc/41</link>
<description><![CDATA[<p>고인돌은 많은 사람을 동원해 만들었기에 보통 지배자의 무덤이라 추측하고 있어요. 고인돌에 함께 묻은 물건들을 통해서도 죽은 자의 신분을 알 수 있지요. 돌검이나 청동검은 마을의 우두머리가 사용하던 것이에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08406_8182.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08406_8182.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08406_8182.png" /><br style="clear:both;" />고인돌의 내부모습 복원(고창고인돌박물관)</p><p><br /></p><p>그러나 고인돌이 꼭 지배자의 무덤인 것은 아니에요. 고인돌에서는 어린 아이, 여자, 노인들로 보이는 사람의 뼈도 발견되었어요. 그리고 일상 생활에서 사용하던 토기나 돌로 만든 도구들도 나왔지요. 크기가 작은 고인돌은 아마도 평범한 일반 사람들이 묻혔을 것으로 보여요. 핑매 바위를 중심으로 모여 있는 수백 개의 화순 고인돌은 지배자와 마을 사람들 모두를 위한 공동묘지라 할 수 있지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09:46:59+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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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덮개돌을 옮길 때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필요했을까?</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bc/40</link>
<description><![CDATA[<p>마고 할미가 버리고 갔다는 전설이 담긴 핑매 바위는 돌을 던진다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에요. 핑매 바위는 길이 7m, 높이 4m, 무게 220톤이 넘는 초대형 덮개돌로 만든 세계 최대 크기의 고인돌 가운데 하나로 알려져 있어요. 핑매 바위를 옮기려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필요했을까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08268_1999.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08268_1999.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08268_1999.png" /><br style="clear:both;" />고인돌 덮개돌을 옮길 때 필요한 사람 수</p><p><br /></p><p>보통 1톤의 바위를 옛날 방식으로 옮기려면 성인 남성 10명의 힘이 필요해요. 220톤 무게의 핑매 바위를 옮기려면 약 2,200명의 사람이 필요하지요. 핑매 바위를 기준으로 남자 1명 당 3~5명 정도의 가족이 있었다고 보면 한 마을에는 대략 1만여 명이 살았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어요. 이 많은 사람들이 핑매 바위를 중심으로 산 아래쪽에 모여 살았을 거예요.</p><p><br /></p><p>핑매 바위 아래에는 작은 크기의 많은 고인돌이 모여 있어요. 핑매 바위처럼 크기가 크고 잘 다듬어진 고인돌은 무덤이라기보다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제단으로서 쓰였을 것으로 보여요. 마을 사람들은 무거운 돌을 함께 끌고 와 고인돌을 만들고, 그곳에 모여 죽은 자들의 넋을 위로했을 거예요. 또한 하늘에 제사를 지내며 마을 사람들의 협동과 단결을 이끌어내지 않았을까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09:44:43+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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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고인돌은 어떻게 만들었을까?</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bc/39</link>
<description><![CDATA[<p>고인돌을 만드는 첫 단계는 돌을 떼어 내는 일이었어요. 청동기 시대 사람들은 바위산에서 원하는 모양의 큰 돌을 얻기 위해 나무를 이용했어요. 바위에 40~50cm 정도의 간격으로 구멍을 뚫고, 그 구멍에 뾰족한 모양의 나무 쐐기를 박아 넣었어요. 그리고 나무에 물을 부었어요. 물에 젖은 나무는 팽창하게 되고, 그 힘으로 바위가 쪼개졌어요.</p><p><br /></p><p>쪼개진 바위는 여러 사람이 모여 통나무를 깔고 줄을 엮어서 원하는 곳으로 끌고 가 무덤을 만들었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08125_9017.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08125_9017.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08125_9017.png" /><br style="clear:both;" />쐐기를 이용한 채석 모습과 덮개돌을 옮겨가는 사람들(고창고인돌박물관)</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09:42:23+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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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괴바위’, 고인돌로 밝혀지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bc/38</link>
<description><![CDATA[<p>1995년 겨울, 전라남도 화순의 보검재 계곡으로 목포대학교의 이영문 교수와 학생들이 찾아왔어요. 마을 사람들이 옛날부터 ‘괴바위’라 부르던, 길 가의 큰 바위를 찾아 답사를 온 거예요. 당시 마을 사람들은 깊은 숲 속 나무와 풀 속에 가려 있는 돌을 그냥 산 속의 흔한 바위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지요.</p><p><br /></p><p>‘괴바위’의 아래쪽은 흙으로 덮여 있어 큰 바위만 땅 위로 보였어요. 이영문 교수 일행이 바위 아래의 흙을 파내자 덮개돌을 받치고 있는 여러 개의 돌기둥이 드러났어요. 바위 아래에는 사람들이 일부러 돌을 떼어낸 자국도 보였지요. 산 속의 흔한 바위가 아니라 고인돌이었던 거예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07756_727.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07756_727.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07756_727.png" /><br style="clear:both;" />괴바위(전남 화순군)</p><p><br /></p><p>‘괴바위’가 고인돌임을 확인한 사람들은 보검재 숲 속으로 들어가 주변을 샅샅이 살폈어요. 나무들 사이로 바위가 있고, 바위(덮개돌) 밑을 보면 어김없이 굄돌이 있었어요. 여러 달에 걸쳐 보검재 주변을 조사해 모두 596개의 고인돌을 찾을 수 있었어요. 사람들이 그냥 지나치던 곳을 유심히 살펴 어마어마한 유적을 찾아낸 것이에요.</p><p><br /></p><p>이렇게 찾은 화순의 고인돌 유적에서는 돌도끼, 돌화살촉 등 다양한 유물들도 함께 출토되었어요. 유적의 보존상태도 좋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고인돌을 만드는 과정을 알 수 있는 채석장까지 발견되어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았어요. 그래서 2000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답니다.</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07781_3776.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07781_3776.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07781_3776.png" /><br style="clear:both;" /> </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09:36:33+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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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청동기 시대의 비밀을 간직한 고인돌</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bc/37</link>
<description><![CDATA[<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07581_4021.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07581_4021.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07581_4021.png" /><br style="clear:both;" />핑매바위(전남 화순군)</p><p><br /></p><p>“아이고! 이를 어쩌나? 족장님께서 그만 돌아가셨다네”</p><p><br /></p><p>“슬퍼하고 있을 때가 아니네. 사람들을 모아 어서 장례를 치러야지.”</p><p><br /></p><p>“그러세. 작년에 만들어 놓은 돌을 이용하면 되겠어.”</p><p><br /></p><p>전라남도 화순에 있는 이 바위는 세계에서 가장 큰 고인돌 가운데 하나로 핑매 바위라 부릅니다. 고인돌은 청동기 시대 사람들의 무덤을 말해요. 청동기 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큰 돌을 옮겨 무덤을 만들었을까요? 고인돌을 통해 무엇을 알 수 있을까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09:33:15+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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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em>
<title>역사 속 작은 이야기: 절을 찾다가 발견한 바위 그림</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bc/36</link>
<description><![CDATA[<div>1970년 동국대학교 박물관 조사단은 울산 지역 불교 유적들을 조사하고 있었어요. 조사단은 원효가 머물렀다고 하는 반고사라는 절의 터를 찾고 있었지요. 삼국사기에 반고사 위치는 반구대 위에 있다고 했어요. 그러나 절터는 찾을 수 없었어요. 당시 반구대는 사연댐 때문에 물에 잠겨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실망스런 상황이었어요.</div><div><br /></div><div>“물길을 따라 올라가면 불탑 흔적이 남아 있는 탑거리가 있소.”</div><div><br /></div><div>그때 근처 마을에 사는 최경환 노인이 조사단에 희망을 주었지요. 조사단은 노인과 함께 탑거리에서 탑 흔적을 살피고 있었어요.</div><div><br /></div><div>“이 보시오. 저기 아래 바위에 무슨 그림이 있소.”</div><div><br /></div><div>노인은 바위 하나를 가리키며 소리쳤어요. 조사단은 마애불이려니 하고 내려가 보았어요. 그런데 바위에 그림이 그려져 있었어요.</div><div>이듬해 조사단을 이끌었던 문명대 교수는 일행과 다시 이곳을 답사했어요. 바위 그림이 못내 궁금해서였지요. 마을 주민 최경환씨 등의 도움을 받아 사연댐 상류 지역의 바위면을 조사하였어요. 이번엔 참 운이 좋았어요. 왜냐하면 심한 가뭄으로 물이 빠져 바위가 통째로 드러났기 때문이지요. 이것이 ‘울주 천전리 각석’이에요.</div><div><br /></div><div>국보 제147호로 지정된 울주 천전리 각석은 우리나라 최초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암각화에요. 바위에는 겹마름모, 겹동그라미 등의 무늬와 사슴, 물고기, 사람 얼굴의 동물 등 다양한 그림이 새겨져 있었어요. 이후 암각화는 전국에서 약 30여 곳이 발견되었어요.</div><div><br /></div><div>여러분은 자신의 삶의 모습을 어딘가에 표현해 본 적이 있나요? 이번 현장체험학습에는 가족들과 함께 울산 반구대 암각화를 살펴보고 소중한 사진을 찍어 남겨 보면 어떨까요?</div>]]></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09:26:24+09:00</dc:date>
</item>


<item>
<title>반구대 암각화를 통해 삶을 배우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bc/35</link>
<description><![CDATA[<p>암각화는 대부분 강가 절벽이나 바위에 새겨졌어요. 바위 그림 밑에는 대개 넓은 공간이 있어 제사를 지내거나 의식을 올렸어요.</p><p>“선사 시대 사람들은 왜 그렇게 힘든 바위 그림을 그렸을까요?”</p><p><br /></p><p>반구대 바위 그림에는 물고기와 바다짐승, 뭍짐승이 가장 많이 그려져 있어요. 그리고 이들 짐승을 잡는 도구와 무기도 함께 그렸지요.</p><p><br /></p><p>아이들은 어른들을 따라다니며 사냥과 고기잡이를 배웠어요. 창을 던지는 법, 그물 치는 법, 짐승의 종류와 물고기의 생김새 등등을 하나씩 배워 나갔지요. 뭍에 사는 사람이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아야 할 때 경험 많은 어른의 지혜를 배워야 했어요. 사냥은 여럿이 힘을 모아 하는 일인 만큼 지식과 기술의 학습이 필요하겠지요.</p><p><br /></p><p>이것으로 볼 때, 이 거대한 바위 그림은 어른들이 어린 아이들에게 사냥과 고기잡이를 가르치는 일종의 그림 교과서가 아닌가 싶어요. 바위에 새겨진 그림을 보면서 마을 어른들의 설명을 들으면 훨씬 이해하기 쉬웠겠지요. 반구대 암각화 앞 공간은 이렇게 마을 학교의 구실을 하지 않았을까요?</p><p><br /></p><p>또한 마을 사람들이 험한 바다로 고기잡이를 나갈 때에는 이 암각화 앞에 모여 고기를 많이 잡아 무사히 돌아오기를 빌었어요. 반구대 암각화는 당시 사람들에게 신성한 제사를 지내는 중요한 장소였어요. 그리고 함께 모여 정보를 나누고 소통하는 광장이 되었지요.</p><p>울산에 있는 암각화에는 신석기·청동기 시대에 사냥과 고기잡이를 주로 하며 살던 사람들의 생활상이 새겨져 있어요. 울산 반구대 바위에 그린 그림은 선사 시대 사람들의 생활과 문화, 바람까지 알 수 있는 우리의 소중한 유적이지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09:24:04+09:00</dc:date>
</item>


<item>
<title>고래잡이를 하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bc/34</link>
<description><![CDATA[<p>반구대 암각화에는 놀랍게도 고래잡이 나가는 배의 그림을 포함해 다양한 고래 그림도 잔뜩 그려져 있어요. 이곳에 고래가 살았고 당시 사람들은 고래잡이를 하였음이 분명하지요.</p><p><br /></p><p>“우리나라에도 저렇게 고래가 많이 있었나요?”</p><p><br /></p><p>“선사 시대 사람들이 어떻게 큰 고래를 사냥할 수 있었죠?”</p><p>더욱 신기한 것은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에 등장하는 고래들도 다양하고, 고래 종류마다 독특한 특성을 잘 표현해 놓았다는 것이에요. 등에서 두 갈래로 물을 뿜어 내는 긴수염고래, 작살이 꽂힌 고래, 새끼를 가진 고래, 새끼를 등에 업고 다니는 쇠고래, 새끼에 젖을 주는 고래, 머리 모양이 뭉툭한 향유고래 등 고래의 특징을 잘 살렸어요.</p><p><br /></p><p>옛날 선사 시대 반구대 사람들은 배를 타고 지금의 태화강을 따라 내려가 울산 앞바다에서 주로 고래잡이를 하며 살았어요. 고래잡이는 그들에게 풍요로운 수확이었어요. 고래를 잡으면 많은 사람들이 한동안 배불리 먹을 수 있었고, 게다가 고래를 이용해 생활용품을 만들 수 있었어요.</p><p><br /></p><p>중요한 고래잡이를 나가기 전에 그들은 바위 그림 앞에 모여 성공을 비는 의식을 치루었어요. 돌아와서는 고래잡이 성공을 축하하며 잔치를 벌였지요. 그리고 고래잡이의 경험을 바위에 그려 놓았지요. 이렇게 바위 그림들은 사람들에게 전설이 되고 지혜가 되었어요. 고래를 잡았던 선사 시대 사람들의 모습이 상상이 되나요? 고래잡이에 성공한 용사들의 기분은 어떠했을까요? 그림을 보며 생각해볼까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09:22:31+09:00</dc:date>
</item>


<item>
<title>다양한 동물들을 그리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bc/33</link>
<description><![CDATA[<p>바위 그림은 물감 같은 것으로 칠한 그림이 아니에요. 날카로운 도구로 바위 면을 긁어서 새겼지요. 돌칼과 같은 도구로 선을 그어 형체를 표현한 그림도 있지만, 안쪽 면을 끌 같은 것으로 우묵하게 파내어 형체를 표현한 그림이 많이 보여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06674_6788.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06674_6788.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06674_6788.png" /><br style="clear:both;" />반구대 암각화</p><p>문화재청</p><p><br /></p><p>반구대에는 다양한 그림들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어요. 배, 그물, 작살, 방패 등 사냥과 물고기 잡이에 필요한 도구를 비롯해 개, 호랑이, 표범, 사슴, 멧돼지, 여우, 늑대 등의 뭍짐승과 물개, 상어, 거북, 고래 등의 바다짐승이 새겨져 있어요. 또한 짐승을 사냥하는 사냥꾼,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는 어부, 탈을 쓰고 있는 주술사, 그물이나 울타리에 갇혀 있는 짐승 등 구체적인 실제 모습들이 실감나게 그려져 있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06709_1646.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06709_1646.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06709_1646.png" /><br style="clear:both;" />반구대 바위 그림의 탁본</p><p>문화재청</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09:18:41+09:00</dc:date>
</item>


<item>
<title>울산 반구대 암각화를 찾아 나서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bc/32</link>
<description><![CDATA[<p>울산 태화강의 지류인 대곡천을 따라 내려가면, 높은 절벽이 병풍처럼 강을 막고 서 있는 아름다운 풍경을 만나게 되지요. 산과 계곡, 기암괴석이 어우러진 절경이 마치 거북이 한 마리가 넙죽 엎드린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하여 여기를 ‘반구대’라고 불러요.</p><p><br /></p><p>“이처럼 다양하고 규모가 큰 바위 그림은 누가 그렸을까요?”</p><p><br /></p><p>반구대의 거대한 바위에는 높이 약 5미터, 너비 약 8미터에 걸쳐 여러 가지 동물들과 사냥 도구 및 사냥하는 모습 등이 빼곡히 그려져 있어요. 저런 높이의 바위에 그림 그리기가 매우 힘들었을 것 같아요. 지금 같으면 사다리차라도 부르면 될 텐데 말이지요.</p><p><br /></p><p>학자들은 반구대 암각화가 한 사람이 그린 것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이 오랜 세월 대를 이어 가며 그려 나간 것으로 보고 있어요.</p><p><br /></p><p>반구대 마을 선사 시대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활과 꿈과 희망을 바위 그림으로 새겨 놓았어요. 한마디로 반구대 바위는 자연과 사람의 조화로운 모습을 그린 선사 시대의 도화지였던 것이지요.</p><p>우리나라에는 신석기 시대를 지나 청동기 시대에 그려진 것으로 보이는 바위 그림이 많이 있어요. 그 중에서도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울산 반구대 암각화는 국보로 지정될 만큼 중요한 유적으로 손꼽히고 있지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06401_0992.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06401_0992.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06401_0992.png" /><br style="clear:both;" /> </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09:13:27+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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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선사 시대 사람들의 생활이 담긴 울산 반구대 암각화</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bc/31</link>
<description><![CDATA[<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06244_0781.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06244_0781.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06244_0781.png" /><br style="clear:both;"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전경(울산 울주군)</p><p>문화재청</p><p><br /></p><p>“할아버지, 어떤 짐승들이 있어요? 또 사냥은 어떻게 하나요?”</p><p><br /></p><p>“얘야, 이 바위를 잘 보렴. 여기 많은 짐승들이 보이지? 사냥하는 우리 마을 사람도 보이는구나.”</p><p><br /></p><p>옛날 일들은 어떻게 알 수 있지요? 제일 먼저 기록과 유물이 떠오르겠지만 바위 그림도 빼놓을 수 없어요. 거대한 바위 그림이 있는 울산으로 가 볼까요? 과연 어떤 그림이 그려져 있을까요?</p><div><br /></div>]]></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09:11:02+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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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역사 속 작은 이야기 : 아주 먼 옛날에 지은 시가 전한다고요?</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bc/30</link>
<description><![CDATA[<p>님아, 물을 건너지 마오.</p><p><br /></p><p>님은 끝내 물을 건너시네.</p><p><br /></p><p>물에 빠져 돌아가시니</p><p><br /></p><p>가신 님을 어찌하면 좋을꼬.</p><p><br /></p><p><br /></p><p><br /></p><p>이 시의 배경은 고조선으로, ‘공무도하가’ 또는 ‘공후인’이라고 불리고 있어요. 이 시와 관련한 이야기가 함께 전해지지요.</p><p><br /></p><p>어느 날 곽리자고라는 뱃사공이 아침 일찍 일어나 배를 손질하고 있었어요. 그때 흰 머리를 풀어헤친 한 남자가 술병을 들고 비틀거리며 물을 건너고 있었대요. 그의 아내가 말리려고 뒤쫓아 왔으나, 결국 그 사람은 물에 빠져 죽었지요. 이 광경을 본 아내는 구슬피 울다, 공후라는 악기를 타며 이 노래를 불렀어요. 그러고는 남편을 따라 강물에 몸을 던졌어요.</p><p>뱃사공은 집에 돌아와 아내 여옥에게 노래와 함께 있었던 일을 들려주었어요. 그러자 여옥은 공후를 타며 구슬프게 그 노래를 불렀는데, 이웃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05:11:19+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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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한나라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bc/29</link>
<description><![CDATA[<p>중계 무역을 통해 부강해진 고조선은 주변 나라들이 한나라와 직접 교류하는 것을 가로막고 이익을 독점하였어요. 게다가 지금의 몽골 초원 지역에 자리한 흉노와 손을 잡으려고 했어요.</p><p><br /></p><p>위협을 느낀 한나라는 이를 두고 볼 수 없었지요. 고조선을 구슬려 흉노와의 관계를 끊어놓으려고 했어요. 한나라는 고조선에 사신을 보내 이런 뜻을 전했어요. 하지만 고조선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두 나라 사이에 냉랭한 기운이 감돌았어요.</p><p>기원전 109년, 결국 한나라는 고조선에 쳐들어왔어요. 생각과 달리 쉽게 고조선을 무너뜨릴 수 없자 고조선의 지배층을 자기네 편으로 끌어들였어요. 1년간의 전쟁에 지친 고조선의 지배층은 한나라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쪽과 협상을 해야 한다는 쪽으로 갈렸어요. 고조선의 왕이 끝까지 버티려고 하자 몇몇 지배층이 한나라에 항복했어요. 그리고 왕을 살해했지요.</p><p><br /></p><p>성기 장군과 고조선 백성들이 힘을 합쳐 한나라 군대에 맞서 싸웠지만 많은 수의 한나라 군대를 당할 수 없었어요. 기원전 108년 고조선의 왕검성이 한나라 손에 넘어가고 고조선은 멸망하고 말았지요.</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91642_3744.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91642_3744.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91642_3744.png" /><br style="clear:both;" /> </p><p><br /></p><p><br /></p><p>이후 고조선의 옛 땅과 고조선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한나라가 관리를 보내 고조선의 옛 땅을 직접 다스렸어요. 고조선 사람들 중 일부는 남쪽으로 내려가 살게 되었고, 한반도 남쪽까지 철기 문화가 퍼져 나갔습니다.</p><p><br /></p><p>우리 역사 속 첫 국가인 고조선이 어떻게 세워지고 발전했는지, 어떤 생각으로 나라를 다스렸는지 알게 되었지요? 널리 인간 세상을 이롭게 한다는 고조선의 건국 이념은 오늘날에도 이어져 오고 있어요. 이를 통해 과거와 현재가 어떻게 만나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길 바라요.</p><p><br /></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91723_4651.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91723_4651.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91723_4651.png" /><br style="clear:both;" />고조선과 한의 전쟁</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05:04:36+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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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8조법으로 사회 질서를 유지하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bc/28</link>
<description><![CDATA[<p>고조선에서 나라의 일을 결정할 때에는 왕과 족장들이 모여 의논했던 것으로 추측돼요. 사회 질서를 유지하려고 법률도 만들었어요. 8개 조항의 법이라 ‘8조법’이라고 하지요. 우리 역사상 최초의 법이라고 볼 수 있는데, 무척 엄격했어요.</p><p><br /></p><p>지금은 8개 조항 중 3개 조항만 전해요. 그 조항을 살펴볼까요? 첫 번째 조항은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내용이에요. 살인을 한 자에게 엄격한 형벌을 내렸음을 알 수 있어요. 두 번째 조항은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하면 곡물로 갚는다.’는 내용이지요. 사람의 신체를 귀하게 여겼음을 알 수 있어요.</p><p><br /></p><p>세 번째 조항은 ‘남의 물건을 훔친 자는 노비로 삼는데, 노비가 되지 않으려면 1인당 50만 전을 내야 한다.’는 내용이지요. 개인의 재산을 보호했으며, 노비가 있는 신분제 사회였음을 알 수 있어요. 또 화폐를 사용했던 것 같아요. 도둑질한 사람을 부끄럽게 여겨 용서를 받아도 혼인할 상대를 구할 수 없었다는 내용도 전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91174_7228.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91174_7228.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91174_7228.png" /><br style="clear:both;" /> </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04:59:42+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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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em>
<title>위만이 고조선의 왕이 되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bc/27</link>
<description><![CDATA[<p>중국을 처음으로 통일한 진나라가 멸망하고 한나라가 들어섰어요. 기원전 2세기경 위만이라는 사람이 무리를 거느리고 고조선으로 넘어왔어요. 고조선의 준왕은 그를 믿고 국경 지역을 방어하는 역할을 맡겼지요. 하지만 위만은 세력을 모으고 군사력을 키워 준왕을 몰아내고 왕의 자리까지 차지했어요(기원전 194).</p><p><br /></p><p>왕위에 오른 위만은 한나라와 친하게 지냈어요. 한나라로부터 발달한 철기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활발하게 교역하면서 더욱 성장했어요. 또 한나라와 한반도 중남부 지역의 여러 나라들을 연결하는 중계 무역으로 큰 이익을 얻어 부강해졌어요.</p><div><br /></div>]]></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04:57:37+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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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중국 연나라와 어깨를 나란히 하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bc/26</link>
<description><![CDATA[<p>고조선은 정치적, 경제적으로 발전하며 요동 지역과 한반도 중부 지역으로 세력을 넓혀나갔어요. 바닷길을 통해서는 특산물인 짐승의 가죽이나 털옷 등을 이웃 지역에 팔며 교역을 했어요.</p><p>고조선의 독자적인 청동기 문화를 대표하는 비파형 동검과 탁자식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는 곳을 살펴보면 고조선이 어느 지역까지 영향을 끼쳤는지 짐작할 수 있어요.</p><p><br /></p><p>기원전 4세기경 고조선은 중국에서 철기 문화를 받아들였어요. 당시 중국은 여러 나라가 등장해 싸우는 혼란한 시기였어요. 전쟁을 피해 많은 사람들이 고조선으로 피난 왔는데, 이들에 의해 철기 문화가 전해졌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90952_885.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90952_885.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90952_885.png" /><br style="clear:both;" />고조선의 문화 범위</p><p><br /></p><p>철기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고조선은 더욱 발전했어요. 농업 생산량이 늘어나고 군사력도 강해졌어요. 왕이라는 호칭을 사용했으며, 관리를 두고 통치 체제를 정비해 나갔어요. 한때 중국의 연나라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강성했어요. 하지만 연의 침공을 받아 서쪽 요동 지역 땅을 잃고 말았어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04:56:32+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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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em>
<title>고조선이 세워지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bc/25</link>
<description><![CDATA[<p>청동기 시대에는 농업 생산력이 늘어나면서 먹고 남은 생산물을 개인이 가질 수 있게 되었어요. 그러면서 가난한 자와 부자로 계급이 나뉘어졌지요. 마을도 점점 커졌고, 족장이 자기 부족을 다스렸어요.</p><p><br /></p><p>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부족은 다른 부족을 정복하거나 통합해 세력을 키우고 땅을 넓혔어요. 넓어진 땅과 늘어난 부족민을 다스리기 위해 통치자와 조직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국가가 세워졌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90719_2442.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90719_2442.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90719_2442.png" /><br style="clear:both;" /> </p><p>로암리 고인돌</p><p>국립문화유산연구원</p><p>우리 역사상 최초의 국가는 고조선이에요. 원래는 조선이었는데 후대 이성계가 세운 조선과 구분하기 위해 옛 ‘고(古)’자를 붙여 고조선이라고 했어요.</p><p><br /></p><p>『삼국유사』에 기록된 단군의 건국 이야기에 따르면 환인(하느님)의 아들인 환웅이 인간 세상을 다스리고자 했어요. 환인이 인간 세상을 내려다보니 널리 이롭게 할 만했어요(홍익인간). 그래서 환웅을 내려보내 그곳을 다스리게 했지요.</p><p><br /></p><p>땅으로 내려온 환웅은 곰을 숭배하는 부족의 웅녀와 혼인해 단군왕검을 낳았대요. 성장한 단군왕검은 아사달(평양)에 도읍을 정하고 고조선을 세웠어요. 이때가 기원전 2,333년 즈음이라고 해요. 단군왕검은 이후 1,500여 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고 합니다.</p><p><br /></p><p>이 이야기를 통해 고조선 사람들이 자신을 하늘과 연결된 특별한 존재로 생각했음을 알 수 있어요. 하늘과 땅을 아우르며 인간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하려고 했다는 것도요. 환웅은 인간 세상으로 내려올 때 바람, 비, 구름을 다스리는 신하를 데리고 왔어요. 이를 통해 당시 사람들이 농사를 중요시했음을 알 수 있어요.</p><p>그런데 고조선을 건국한 단군왕검이 무려 1,500여 년이나 살았을까요? 단군왕검은 특정한 사람을 의미하는 게 아니에요. 당시 지배자를 부르는 말이었지요. ‘단군’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사장, ‘왕검’은 백성을 다스리는 우두머리를 뜻해요. 단군왕검은 정치적인 지배자인 동시에 종교적 지도자 역할도 함께 맡았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90754_7147.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90754_7147.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90754_7147.png" /><br style="clear:both;" /> </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04:52:47+09:00</dc:date>
</item>


<item>
<title>우리 역사 속 최초의 국가, 고조선</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bc/24</link>
<description><![CDATA[<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90443_969.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90443_969.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90443_969.png" /><br style="clear:both;" />삼국유사</p><p>국가유산청</p><p><br /></p><p>“남의 물건을 도둑질한 저 자를 어찌한다?”</p><p><br /></p><p>“8조법에 따라 엄히 다스려야 합니다.”</p><p><br /></p><p>죄를 지었을 때 8조법에 따라 죄인을 벌하고 사회 질서를 유지했던 이 나라는 우리 역사 속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이에요. 고조선에 관한 이야기는 『삼국유사』와 중국의 『사기』, 『한서』와 같은 역사책에 기록되어 있어요. 고조선은 어떻게 세워지고 발전했을까요? 사회 모습은 어떠했을까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04:47:43+09:00</dc:date>
</item>


<item>
<title>단군 신화, 어떻게 볼까요?</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bc/23</link>
<description><![CDATA[<p>단군 신화 속 환웅은 다른 곳에서 이주해 온 하늘을 숭배하던 부족을 나타내고, 곰과 범은 각각 한반도와 만주에 살고 있던 곰과 범을 숭배하던 부족을 나타내요. 단군 신화는 이주해 온 환웅 부족이 원주민이였던 곰부족과 결합하여 고조선을 세웠다는 걸 상징적으로 알려주고 있지요.</p><p><br /></p><p>그런데 단군 신화에서는 단군이 무려 1,5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고 해요. 한 임금이 그렇게 오래 동안 나라를 다스릴 수는 없겠지요. 단군과 그 후손인 2세 단군, 3세 단군 등 고조선의 왕을 모두 단군이라고 부른 것으로 보여요. 고조선의 모든 왕이 다스린 기간을 합하면 1,500년이라는 뜻이지요.</p><p><br /></p><p>우리 민족은 나라가 어려울 때마다 단군의 건국 신화를 생각하며 마음을 하나로 뭉쳐 어려움을 이겨 냈어요. 여러분도 인간을 존중하고 도우라는 고조선 건국의 의미를 되새기며 우리 역사를 꼼꼼하게 살펴보면 어떨까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90151_3948.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90151_3948.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90151_3948.png" /><br style="clear:both;" />고조선의 문화 범위</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04:42:47+09:00</dc:date>
</item>


<item>
<title>단군, 나라를 세우고 조선이라 하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bc/22</link>
<description><![CDATA[<p>기원전 2333년에 단군왕검은 평양성에 나라를 세우고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고 하였어요. 단군왕검은 얼마 후에 다시 도읍을 백악산 아사달로 옮겼지요. 단군왕검은 그곳에서 1,500년 동안 나라를 평화롭게 다스렸지요. 이후 아사달에 들어가 산신이 되었는데 나이가 1,908세였다고 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89987_5718.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89987_5718.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89987_5718.png" /> </p><p>아사달로 이주하는 단군왕검</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04:40:04+09:00</dc:date>
</item>


<item>
<title>단군이 태어나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bc/21</link>
<description><![CDATA[<p>곰과 범은 이것을 받아 함께 먹었어요. 그러나 범은 견디지 못하고 동굴을 뛰쳐나가 사람이 되지 못하였고, 곰은 21일 만에 여자로 다시 태어났어요. 그리고 그 이름을 웅녀라고 하였지요.</p><p><br /></p><p>웅녀는 혼인할 사람이 없었어요. 웅녀는 많은 날을 신단수 아래로 찾아와 아이를 갖게 해 달라고 빌었어요. 웅녀의 간절한 기도를 들은 환웅은 잠시 사람으로 변하여 그녀와 혼인을 하였어요. 그리고 환웅과 웅녀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났어요. 그가 바로 ‘단군왕검’이랍니다.</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89732_4025.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89732_4025.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89732_4025.png" /><br style="clear:both;" />단군왕검의 탄생</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04:36:29+09:00</dc:date>
</item>


<item>
<title>곰과 범이 찾아오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bc/20</link>
<description><![CDATA[<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89514_8521.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89514_8521.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89514_8521.png" /><br style="clear:both;" />환웅을 만나는 곰과 범</p><p><br /></p><p>환웅이 세상을 다스리던 때였어요. 곰 한 마리와 범 한 마리가 같은 동굴에 살고 있었어요. 곰과 범은 늘 신령스러운 환웅에게 사람으로 변하게 해 달라고 빌었어요.</p><p><br /></p><p>어느 날 환웅은 곰과 범에게 신비한 쑥 한 줌과 마늘 스무 개를 주면서 이것을 먹고 백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는다면 사람이 될 것이라고 말하였어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04:32:17+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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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환웅, 하늘에서 내려오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bc/19</link>
<description><![CDATA[<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89351_9988.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89351_9988.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89351_9988.png" /><br style="clear:both;" />하늘에서 내려오는 환웅</p><p><br /></p><p>아득한 옛날 하늘의 왕 환인에게는 아들 환웅이 있었어요. 그런데 환웅은 아래 세상을 내려다보며 사람들을 널리 이롭게 할 뜻을 품고 있었지요. 아들의 뜻을 알게 된 환인은 환웅을 아래 세상으로 내려 보내기로 결심을 하고, 하늘의 왕권을 상징하는 세 가지 보물을 환웅에게 주었어요. 환웅은 바람, 구름, 비를 관장하는 신하와 무리 삼천 명을 거느리고 태백산 신단수 아래에 내려와 인간 사회를 다스렸어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04:29:28+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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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단군왕검, 아사달에 나라를 세우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bc/18</link>
<description><![CDATA[<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89048_7681.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89048_7681.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89048_7681.png" /><br style="clear:both;" />마니산 참성단(인천 강화도)</p><p><br /></p><p>“개천절은 무엇을 기념하는 날인가요?”</p><p><br /></p><p>“우리나라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의 건국을 축하하는 날이에요.”</p><p><br /></p><p>“고조선은 세운 사람은 누구일까?”</p><p><br /></p><p>고조선은 우리 민족 최초의 국가에요. 단군이라는 분이 세웠지요. 단군이 고조선을 세우는 모습은 고려 시대에 일연 스님이 쓴 『삼국유사』에 잘 나와 있어요. 지금부터 일연이 전해준 건국 신화 이야기를 들어볼까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04:24:20+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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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역사 속 작은 이야기: 신석기 시대 사람들의 터전이 발견되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bc/17</link>
<description><![CDATA[<p>서울 암사동 유적지에는 신석기 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았어요. 그러나 신석기 시대 사람들이 집을 짓고 먹고 살았던 흔적들은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모래와 흙으로 덮여 버리고 말았지요.</p><p><br /></p><p>어느덧 사람들은 이곳에 사람들이 살았다는 기억조차 잊은 채 아무 생각 없이 지나다녔지요.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흘렀어요.</p><p>1925년에 서울 주변 지역에 엄청나게 많은 양의 비가 내렸어요. 한강에는 큰 홍수가 일어났지요. 강물은 넘치고 거센 물줄기는 주변 지역을 휩쓸었어요. 이때 한강변에 위치에 해 있던 암사동 지역의 흙들도 쓸려 나가기 시작했어요. 그러자 수천 년 동안 땅속에 묻혀 있던 집터와 유물들이 모습을 드러냈어요.</p><p><br /></p><p>“이것 보세요. 옛날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 같아 보여요.”</p><p><br /></p><p>“여기도 보세요. 그릇과 도구들도 있어요.”</p><p><br /></p><p>수십 년의 시간이 흐른 1971년부터 고고학자들은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옛 사람들의 흔적들과 물건들이 조금도 훼손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발굴해 나갔어요. 여러 차례 발굴하고 조사한 결과 서울 암사동 유적지는 신석기 시대의 사람들이 살았던 마을로 판명되었어요. 우연히 신석기 시대의 집터와 유물이 발견되었던 것이지요.</p><p><br /></p><p>서울 암사동 유적지는 한반도에서 발견된 가장 큰 신석기 시대 마을이에요. 서울 암사동 유적의 발견으로 우리는 신석기 시대 사람들의 모습을 더욱 생생하게 살펴볼 수 있게 되었지요. 이번 주말에는 가족과 함께 서울 암사동 유적지에 가서 신석기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상상하며 체험해 보면 어떨까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04:20:58+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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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빗살무늬토기를 발명하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bc/16</link>
<description><![CDATA[<p>서울 암사동 유적에서는 또 하나의 중요한 유물이 나왔어요. 끝이 뾰족한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었어요. 빗의 가느다란 살 같은 무늬가 새겨 있어 이 토기를 ‘빗살무늬 토기’라 부르게 되었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88603_8455.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88603_8455.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88603_8455.png" /><br style="clear:both;" /> </p><p>빗살무늬 토기</p><p>국립중앙박물관</p><p><br /></p><p>토기는 흙으로 빚은 다음 불에 구워 만든 그릇을 말해요. 토기는 신석기 사람들이 음식을 저장하거나 음식을 조리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해줘요.</p><p>신석기 시대에는 먹을거리가 늘어나면서 이것을 보관할 그릇이 필요해졌어요. 토기를 발명함으로써 식량을 저장할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음식을 끓여 먹을 수도 있게 되었어요.</p><p><br /></p><p>“그런데 빗살무늬 토기는 지금의 그릇들과는 좀 다르게 생겼어요. 그릇 밑이 뾰족하게 생겨 바닥에 세우기도 어렵겠는데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88633_4037.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88633_4037.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88633_4037.png" /><br style="clear:both;" />빗살무늬 토기를 사용하는 모습</p><p>밑이 뾰족한 것은 그릇을 모래나 땅에 박아 움직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어요. 신석기 시대 사람들이 주로 살았던 강가의 흙은 부드러워서 토기를 땅에 쉽게 꽂아 사용할 수 있었어요. 또 움집 안의 바닥 구멍을 잘 살펴보세요. 빗살무늬 토기를 이 구멍자리에 얹어 보면 딱 들어맞아 세울 수 있어요.</p><p><br /></p><p>신석기 시대에는 자연에서 구할 수 있는 먹을거리가 늘어나고 점차 농사를 짓게 되면서 더 이상 떠돌아다닐 필요 없이 한 곳에 머물러 살 수 있게 되었어요. 특히 사람들은 농사를 지으면서 먹을 것을 직접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었어요. 더구나 남는 식량들을 토기에 저장할 수 있게 되어 구석기 시대와는 전혀 다른 생활을 했어요.</p><p><br /></p><p>빗살무늬 토기는 농사와 식량 저장, 그리고 정착 생활과 같은 생활모습을 엿볼 수 있는 신석기 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유물이랍니다.</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04:17:26+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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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em>
<title>여러 가지 생활 도구를 사용하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bc/15</link>
<description><![CDATA[<p>서울 암사동 유적에서는 자갈로 만든 도끼, 화살촉, 그물추, 괭이, 돌낫, 보습, 갈돌과 갈판 따위 같은 석기 유물들이 나왔어요. 이런 유물을 통해 당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알 수 있지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88358_4688.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88358_4688.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88358_4688.png" /><br style="clear:both;" />갈돌과 갈판의 사용</p><p>특히 땅을 파는 데 쓰는 괭이와 보습, 낟알의 껍질을 벗기거나 도토리 등을 가는 데 쓰는 갈돌과 갈판은 신석기 시대에 농경이 시작되었음을 알려 주는 중요한 유물이지요. 화살촉과 그물추 등을 보면 사냥과 고기잡이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88384_3983.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88384_3983.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88384_3983.png" /><br style="clear:both;" />신석기 시대 여러 가지 생활 도구(암사동선사유적박물관)</p><p>①돌괭이와 보습 ②돌도끼 ③돌화살촉 ④돌그물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04:13:16+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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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em>
<title>움집을 짓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bc/14</link>
<description><![CDATA[<p>신석기 사람들은 이제 자신들만의 안락한 집을 짓기 시작했어요. 땅을 파고, 주로 생활할 자리인 바닥은 평평하게 다졌어요. 그런 다음 주변에 나무 기둥을 세우고, 도리를 얹고, 서까래를 올린 뒤, 나뭇잎이나 짚을 엮어 지붕을 덮었어요. 이렇게 신석기 시대 사람들의 집이 완성되었어요. 이렇게 만든 집을 ‘움집’이라고 해요. 움(움푹 파인 구덩이)을 파고 지은 집이란 뜻이에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88063_6112.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88063_6112.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88063_6112.png" /><br style="clear:both;" />움집(복원)</p><p>문화재청</p><p>움집은 햇볕이 잘 들도록 남향으로 지었어요. 나무와 풀만으로 지은 집이지만 땅을 파서 지었기 때문에 바람과 추위를 피할 수 있었어요. 집 한가운데에는 음식을 조리하고 집안을 따뜻하게 해 주는 화덕 즉 불 피우는 자리를 만들었어요.</p><p><br /></p><p>화덕은 신석기 사람들이 추위를 이기게 해 준 고마운 도구에요. 전 시대에는 불 피우기가 힘들었지만 신석기 시대에 와서는 불 피우기가 훨씬 쉬워졌어요. 화덕 덕분에 추위를 막고, 음식을 조리하고 사나운 짐승들의 침입도 막을 수 있었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88095_5191.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88095_5191.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88095_5191.png" /><br style="clear:both;" />움집 사람들의 생활 모습</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88124_7308.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88124_7308.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88124_7308.png" /><br style="clear:both;" />움집 내부 모습</p><p>문화재청</p><p><br /></p><p>“신석기 사람들은 드나들기도 불편한데 왜 굳이 땅 바닥을 파고 집을 지었어요? 지붕도 낮아 집안에서 생활하기도 불편하겠어요.”</p><p><br /></p><p>땅을 파면 우선 공간이 더 넓어지지요. 땅속은 바깥 공기보다 온도 변화가 적어 바닥을 파 놓으면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했어요. 또 지붕이 낮아 강가의 센 바람도 견딜 수 있었지요. 이 정도면 동굴보다는 훨씬 살기 좋겠지요?</p><p><br /></p><p>“저기 가운데 푹 파인 구덩이는 무엇일까요?”</p><p><br /></p><p>집 바닥의 가운데에는 돌을 둥근 모양이나 네모난 모양으로 돌려놓아 불을 피우는 자리를 만들었어요. 이 자리에 불을 피워 움집 안을 따뜻하게 덥히거나 어둠을 밝혔어요. 또한 물을 끓이거나 음식을 만들기도 하였지요.</p><p>움집은 바람과 비도 피할 수 있었고, 갑작스럽게 들이닥치는 맹수들의 침입도 재빨리 막을 수 있었어요. 뿐만 아니라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였으니, 생각해보면 신석기 사람들에게 움집은 살기에 편한 최첨단 고급 주거지가 아니었을까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04:08:59+09:00</dc:date>
</item>


<item>
<title>집 짓기를 고민하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bc/13</link>
<description><![CDATA[<p>신석기 시대 초기에는 사람들은 여전히 동굴에서 살기도 했어요. 그런데 매번 사냥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겨울엔 나무 열매 구하기도 어렵고요. 강가에는 물고기 등의 먹을거리가 많지만, 동굴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불편했어요. 또 동굴은 불을 피워도 바닥이 너무 차가웠어요.</p><p><br /></p><p>“벌써 며칠째 아무것도 잡지 못했으니 걱정이야. 내일은 멀지만 물고기를 잡으러 강가에 가보아야 하겠어.”</p><p><br /></p><p>“물고기를 잡기 쉬운 강가에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p><p><br /></p><p>신석기 사람들은 고민하기 시작하였어요. 강가에 동굴은 없었어요. 그리고 바닥이 차갑고 어두운 동굴이 이제는 싫었어요. 그들은 궁리 끝에 여기 강가에 동굴을 만들기로 하였어요. 강도 가깝고 햇빛도 잘 들고, 추위를 막아 주며 불안에 떨지 않고 잠을 잘 수 있는 공간을 말이지요. 바로 인류 역사상 집이 탄생하는 순간이지요.</p><p><br /></p><p>신석기 사람들은 어떻게 집을 지었을까요? 그 질문의 실마리는 서울 암사동 유적을 통해 알 수 있어요. 한강과 가까운 암사동에서 둥글게 혹은 네모나게 땅을 파낸 수십 개의 흔적이 발견되었지요. 이 흔적들이 바로 신석기 시대 사람들이 살았던 집터였어요.</p><p>서울 암사동 유적에서 발견된 신석기 사람들의 집은 ‘움집’이었어요. 움집은 어떤 집일까요? 움집에서 신석기 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생활하였을까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87621_1935.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87621_1935.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87621_1935.png" /><br style="clear:both;" /> </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04:00:30+09:00</dc:date>
</item>


<item>
<title>신석기 시대 마을을 찾아서, 서울 암사동 유적</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bc/12</link>
<description><![CDATA[<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87432_5828.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87432_5828.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87432_5828.png" /><br style="clear:both;" />서울 암사동 유적지(서울 강동구)</p><p><br /></p><p>“여긴 정말 살기 좋은 것 같아. 햇빛도 잘 들고. 무엇보다 근처에 강이 있어 먹을거리 걱정을 덜 수 있을 것 같아.”</p><p><br /></p><p>“그래 맞아. 난 다시는 동굴로 가기 싫어. 그런데 이제 날이 추워질 것 같은데 잠자리는 어떻게 하지?”</p><p><br /></p><p>구석기 시대 사람들은 먹을 것을 찾아 여기저기 옮기며 살았어요. 신석기 시대에는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먹을거리가 늘어났어요. 그래서 먹을거리를 구하기 쉬운 강가에 머물러 살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추운 겨울 날 잠자리는 어떻게 해결하였을까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03:57:24+09:00</dc:date>
</item>


<item>
<title>역사 속 작은 이야기: 뗀석기 어떻게 만들었을까?</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bc/11</link>
<description><![CDATA[<p>인류는 도구를 사용하면서 발달했어요. 자연을 극복할 수 있었고, 동물을 지배할 수 있었어요. 도구가 늘어날수록 인간의 지식은 늘어나고 문명화되었어요.</p><p>그런데 인류는 나무를 도구로 사용하지는 않았을까요? 물론 나무를 도구로 사용했을 가능성은 충분하지만, 아쉽게도 나무로 만든 도구는 모두 썩었기 때문에 유물로 남아 있지 않아 확인할 수 없어요. 대신 돌로 만든 도구가 남아 있어 인류가 도구를 어떻게 사용했는지 확인할 수 있지요.</p><p><br /></p><p>단양 수양개 유적에서 특별한 유물이 발굴되었어요. 바로 뗀석기를 만든 흔적이 남아 있는 석기 제작소에요. 모루돌과 몸돌, 그리고 떨어진 조각돌(격지)이 출토되었어요. 이를 통해 구석기 시대 사람들이 어떻게 뗀석기를 만들었는지 알 수 있게 되었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87135_6789.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87135_6789.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87135_6789.png" /><br style="clear:both;" />석기 제작소(단양 수양개 유적)</p><p>국가유산청</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87229_2504.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87229_2504.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87229_2504.png" /><br style="clear:both;" />뗀석기 만드는 방법</p><p>우리는 지금까지 단양, 공주 등의 구석기 유적과 유물을 통해 구석기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살펴보았어요. 지금의 눈으로 보면 엉성하고 우스꽝스러워 보일 수 있지만 당시 사람들에게는 생존이고 발전이었어요. 이후 구석기 사람들은 어떤 모습으로 살았을까요? 앞으로 공부하게 될 유물과 유적이 우리를 또 어떻게 안내해 줄까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03:54:02+09:00</dc:date>
</item>


<item>
<title>구석기 사람들, 집을 짓기 시작하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bc/10</link>
<description><![CDATA[<p>구석기 시대 사람들은 동굴에서만 살았을까요? 살만한 동굴을 찾지 못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동굴 대신 머물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어요. 공주 석장리 유적의 집터 자리에서 구석기 사람들이 지었던 집의 흔적을 확인해 볼 수 있어요.</p><p>석장리에 살던 당시 사람들은 평지에 풀이나 나뭇가지로 거칠게 ‘막집’을 지어 살았어요. 자세히 살펴볼까요? 집 자리는 담을 쳐서 집을 바깥과 구별하고, 출입하는 문을 만들었어요. 기둥을 세우고 겉에 막을 쳐서 비바람을 막았어요. 내부에는 돌을 둥그렇게 둘러 불을 피우는 자리가 있었어요. 석장리 사람들은 불을 이용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기도 하고 집안을 따뜻하게도 했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86865_6133.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86865_6133.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86865_6133.png" /><br style="clear:both;" />공주 석장리 유적 막집(복원)</p><p>국가유산청</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86903_189.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86903_189.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86903_189.png" /><br style="clear:both;" />충청 지역의 구석기 유적</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03:48:45+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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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사람들의 소중한 집터, 동굴</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bc/9</link>
<description><![CDATA[<p>석기 시대 사람들은 어디에서 살았을까요? 구석기 사람들은 주로 동굴에서 살았어요. 보통 동굴은 축축하고 물이 흥건히 괴어 있는 경우가 많지요. 그래도 추위와 비바람을 피하기에는 동굴만한 것이 없었어요. 더구나 동굴 밖으로 앞에 강이 흐르고 작은 들판까지 있다면 그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보금자리가 되었지요.</p><p>동굴 안에 땅을 파거나 돌을 쌓아 불을 피울 자리를 만들었어요. 그리고 그 주위에 둘러앉아 몸을 녹이거나 잡아 온 동물을 익혀 먹었어요. 잠자리에 들 때에는 낮에 구해온 나뭇잎 등을 깔고, 사냥한 동물의 가죽을 이불 삼아 추운 날씨를 이겨 냈어요. 구석기 시대 사람들은 수십만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자연에서 얻은 보금자리인 동굴에서 주로 살았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85879_1379.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85879_1379.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85879_1379.png" /><br style="clear:both;" />단양 금굴</p><p>가운데 보이는 구멍이 동굴이에요.</p><p>국가유산청</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85921_8806.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85921_8806.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85921_8806.png" /><br style="clear:both;" />상시 바위그늘 유적(단양군 매포읍 상시리)</p><p><br /></p><p>동굴 외에 바위 그늘에서도 많이들 살았어요. 그러한 모습은 단양 상시 바위 그늘 유적에서 확인해 볼 수 있어요. 바위 그늘은 암벽 위쪽이 기울어지거나 아래쪽이 움푹 들어가서 비나 햇빛을 피할 수 있는 공간이었지요. 사람들은 그곳 안쪽에 불을 피우고 추위와 맹수의 위협을 피하며 살았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86024_1639.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86024_1639.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86024_1639.png" /><br style="clear:both;" />구석기 시대의 생활 모습</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03:32:16+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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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도구를 이용하여 사냥하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bc/8</link>
<description><![CDATA[<p>구석기 시대 사람들에게 채집 활동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어요. 하지만 고기를 먹지 못하면 단백질을 얻지 못해서 건강할 수가 없어요. 따라서 짐승을 잡아 고기를 섭취하는 것 역시 중요했어요. 게다가 그 가죽으로 옷도 해 입을 수도 있었지요. 그러나 사냥은 매우 힘들고 위험한 일이었어요. 사냥을 나갔다가 오히려 사나운 짐승에게 당하는 경우가 많았어요.</p><p><br /></p><p>사람들은 사냥을 할 때 협동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어요. 혼자서는 거의 불가능했거든요. 치밀한 작전을 짜고 역할도 나누었어요. 운이 좋아 사냥에 성공하면, 서로 기뻐하였지요. 사냥은 그저 용맹하기만 해서 되는 일이 아니었어요. 서로 지혜를 모아 최대로 활용해야 성공할 수 있었지요.</p><p><br /></p><p>사냥에는 도구가 꼭 필요했어요. 유용한 도구가 개발되고 사냥 기술이 발달하면서 짐승을 더 많이 잘 잡을 수 있었어요. 그렇다면 구석기 시대 사람들은 어떤 도구들을 사용하였을까요? 구석기 시대에는 주변의 돌을 이용해 다양한 도구를 만들었어요. 돌멩이를 깨거나, 큰 돌에서 돌조각을 떼어 내고 다듬어 도구로 사용했지요. 이렇게 만든 도구를 뗀석기라고 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85494_049.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85494_049.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85494_049.png" /><br style="clear:both;" />단양수양개 출토 유물(주먹도끼, 긁개, 슴베찌르개)</p><p>국가유산청</p><p><br /></p><p>단양 수양개 유적에서는 찍개, 찌르개, 주먹도끼, 밀개, 긁개, 슴베찌르개 등 다양한 석기들이 출토되었어요. 이 석기들을 통해 우리는 구석기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짐작해 볼 수 있어요.</p><p><br /></p><p>주먹도끼는 찍는 날과 자르는 날 두 가지가 모두 있어서 다양한 용도로 사용할 수 있는 만능 도구였어요. 긁개는 짐승의 가죽을 벗기거나, 나무나 뼈를 깎는 도구로 사용되었어요. 밀개는 살을 저미거나 뼈를 깎는다거나 나무껍질을 벗겨 내는 데 사용하였어요. 찍개는 나무를 다듬거나 사냥한 짐승의 뼈를 찍고, 살을 자를 때 사용하는 도구였어요. 찌르개는 짐승을 찌르거나 가죽에 구멍을 뚫을 때 사용했어요.</p><p><br /></p><p>특히 대표적 유물인 슴베찌르개를 살펴보면 구석기 사람들의 사냥 모습을 구체적으로 상상해 볼 수 있어요. 슴베찌르개는 얇은 돌 조각을 뾰족하게 다듬어 나무 막대기에 연결하여 묶을 수 있도록 만든 사냥 도구에요. 이렇게 나무와 결합한 슴베찌르개는 사냥감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고, 멀리까지 던져 맞힐 수도 있어 사냥에 유리하였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85532_6036.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85532_6036.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85532_6036.png" /><br style="clear:both;" />슴베찌르개 만들기와 사냥하기</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03:25:44+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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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자연 속에서 먹을거리를 구하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bc/7</link>
<description><![CDATA[<p>구석기 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먹고 살았을까요? 구석기 시대 사람들은 자연과 더불어 살아갔어요. 먹을거리 또한 자연 속에서 얻어야 했지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자연이 준 그대로 식물의 열매, 뿌리, 잎 따위를 따서 먹는 채집이었어요.</p><p><br /></p><p>그렇다고 채집이 마냥 쉽지만은 않았어요. 어느 곳에 가야 먹을 수 있는 식물이 많은지, 어떤 식물은 먹으면 위험한지, 어느 계절에 무슨 나무 열매가 나는지 등등을 알아야 했어요. 그들은 온종일 먹을 것을 찾아다녀야 했어요. 게다가 독충과 맹수를 만나 목숨이 위태롭기도 하였어요. 또 큰 나무에 달린 열매를 따다가, 땅을 파서 식물의 뿌리를 캐다가 다치는 일도 생겼어요. 구석기 사람들은 채집에 대한 계획도 짜고, 준비도 했어요. 그리고 함께 움직였어요.</p><p><br /></p><p>이렇게 지내다 보면 어느덧 부근에 있던 먹을거리가 바닥나기 마련이었어요. 그들은 먹을거리를 찾아 또 지낼 곳을 옮겨야 했지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03:10:37+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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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충청 지역의 구석기 유적</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bc/6</link>
<description><![CDATA[<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84408_8184.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84408_8184.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84408_8184.png" /><br style="clear:both;" />단양 금굴(충북 단양군)</p><p>국가유산청</p><p><br /></p><p>“여기 돌조각들이 있어요. 이곳에서 옛날 사람들이 살았나 봐요.”</p><p><br /></p><p>“이곳은 구석기 시대 사람들이 뗀석기를 만들었던 곳이에요.”</p><p><br /></p><p>“구석기 사람들은 뗀석기를 어떻게 사용하였을까?”</p><p><br /></p><p>구석기 시대에 살았던 사람의 흔적이 우리나라 곳곳에 있는 동굴에서 발견되었어요. 당시 사람들이 쓰던 석기들도 함께 발견되었어요. 구석기 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생활하였을까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03:07:09+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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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역사 속 작은 이야기: 구석기인의 예술 활동</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bc/5</link>
<description><![CDATA[<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84164_0142.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84164_0142.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84164_0142.png" /><br style="clear:both;" />물고기 모양 조각</p><p>수양개선사유물전시관</p><p>이 유물은 뭘까요? 왼쪽의 둥근 부분은 머리고 오른쪽은 꼬리로 물고기를 표현한 것 같아요. 이 유물은 충북 단양 수양개 유적에서 발견된 것으로 젖소의 다리뼈에 새겨진 것이라고 해요. 구석기인들이 남긴 예술 작품이라 할 수 있죠.</p><p><br /></p><p>하루하루 먹을 것을 구하는 것이 큰 고민이었을 구석기인들도 예술 활동을 했다는 것이 신기하지요.</p><p><br /></p><p>구석기인들의 예술 작품은 다른 나라에서도 발견되었어요. 대표적인 것이 프랑스의 라스코에서 발견된 동굴 벽화에요. 이 동굴에는 사슴과 말, 황소 등이 그려져 있어요. 역사학자들은 사냥감이 풍성하기를 바라는 구석기인들의 바람이 여기에 담겨 있다고 이야기해요.</p><p><br /></p><p>구석기 시대는 인류의 역사 중 가장 오랜 시기이에요. 구석기인이 사용한 뗀석기는 문자가 없던 시대 그들의 삶을 알려주는 귀중한 유물이지요. 배운 내용을 바탕으로 구석기인의 생활 모습이 어떠했을지 상상해 보아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84195_6336.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84195_6336.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84195_6336.png" /><br style="clear:both;" />동굴에서 생활하는 구석기인의 생활 모습</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03:03:30+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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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em>
<title>구석기인들은 어디서 살았을까?</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bc/4</link>
<description><![CDATA[<p>뗀석기를 사용한 구석기 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요? 구석기인들은 우리처럼 농사지어 식량을 마련하지 못했어요. 주로 나무 열매를 따서 먹거나 땅에서 캐거나 사냥을 해서 먹을 것을 마련했어요. 그러다 보니 주변에서 먹을 것을 구할 수 없게 되면 새로운 곳으로 옮겨가 사는 이동 생활을 해야 했어요.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며 살다 보니 이동한 곳에 자연 동굴이 있다면 그곳에서 지냈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83847_4867.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83847_4867.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83847_4867.png" /><br style="clear:both;" />충북 제천 점말 동굴과 충북 단양 금굴</p><p>문화재청</p><p>만약 동굴을 발견하지 못하면 어떻게 했을까요? 고깔 모양으로 생긴 막집에서 살았어요. 막집은 신석기 시대에 지어진 움집과 달리 평평한 땅에 지었다고 해요. 집을 지을 때는 사냥해서 생긴 짐승의 가죽이나 나뭇가지를 이용했구요. 구석기인들이 사용했던 막집터에서는 불을 땐 자리와 기둥자리, 담을 만든 자리 등이 발견되었어요. 크기가 작은 것은 3~4명 정도가 살 수 있었고, 큰 것은 10명 정도가 살 수 있었다고 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83882_4062.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83882_4062.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83882_4062.png" /><br style="clear:both;" />충남 공주 석장리 막집</p><p>석장리박물관</p><p><br /></p><p>한편, 우크라이나에 있는 구석기 유적지에서는 사냥으로 잡은 매머드의 아래턱뼈와 어금니를 이용하여 집을 만들기도 했어요. 이런 집을 만들기 위해서 거의 100마리 이상의 매머드가 필요했다고 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83907_2784.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83907_2784.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83907_2784.png" /><br style="clear:both;" />매머드 뼈집(전곡선사박물관)</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02:58:40+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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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em>
<title>구석기 시대 사람들은 돌을 어떻게 다듬어 사용했을까?</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bc/3</link>
<description><![CDATA[<div>구석기 시대의 뗀석기는 한 가지 종류만 있는 것이 아니에요. 용도에 따라 다음과 같이 다양한 종류의 뗀석기가 만들어졌어요. 여러분은 사진에 있는 다양한 종류의 뗀석기가 어떤 용도로 사용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나요? 고고학자들은 뗀석기의 용도를 추정하여 긁개, 찌르개, 홈날 등의 이름을 붙였답니다. 전곡리 유적지에서도 주먹도끼 외에 이런 다양한 종류의 뗀석기가 발견되었어요.</div><div><br /></div><div><br /></div><div><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83482_1035.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83482_1035.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83482_1035.png" /><br style="clear:both;" />다양한 종류의 뗀석기</div><div>전곡선사박물관</div><div><br /></div><div><br /></div><div><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83514_5377.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83514_5377.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83514_5377.png" /><br style="clear:both;" />찍개</div><div>국립중앙박물관</div><div><br /></div><div>사진 속의 뗀석기는 무엇일까요? 얼핏 보면 우리가 앞에서 본 주먹도끼와도 비슷한 것 같은데요. 이 뗀석기는 찍개라고 불러요. 찍개는 구석기인들이 가장 먼저 사용한 도구로 돌의 한쪽을 다른 돌로 쳐서 만들었다고 해요. 고고학자들은 구석기인이 찍개로 나무를 자르거나 사냥을 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답니다.</div><div><br /></div><div><br /></div><div><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83545_9714.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83545_9714.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83545_9714.png" /><br style="clear:both;" />슴베찌르개</div><div>국립중앙박물관</div><div>사진에 있는 뗀석기는 슴베찌르개라고 해요. 슴베라는 단어가 조금은 어렵죠?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슴베는 ‘호미, 칼, 괭이 등이 자루에 들어박히는 뾰족하고 긴 부분’이라고 되어 있어요. 사진 속 뗀석기의 어느 부분인지 짐작할 수 있죠? 슴베찌르개는 창끝이나 화살끝에 꽂아 사용한 도구라고 해요. 찍개보다 훨씬 후에 만들어 사용했지요.</div><div><br /></div><div><br /></div><div><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83570_6589.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83570_6589.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83570_6589.png" /><br style="clear:both;" />밀개(왼쪽)과 긁개(오른쪽)</div><div>국립중앙박물관</div><div><br /></div><div>왼쪽 사진과 오른쪽 사진에 있는 뗀석기를 구분할 수 있나요? 우리는 구분하기 어려운 뗀석기를 고고학자들은 용도에 따라 다른 이름을 붙였어요. 왼쪽 뗀석기는 밀개, 오른쪽 뗀석기를 긁개라고 해요. 두 도구는 모두 음식을 만들어 먹을 때 사용했을 것으로 생각되어요.</div><div><br /></div><div>구석기인들은 처음에는 찍개와 주먹도끼를 만들어 사용했어요. 그러다가 뗀석기 만드는 방법이 좀 더 정교해져 몸돌에서 날카롭고 조그마한 조각을 떼어내 밀개, 긁개 등을 만들어 사용했어요.</div><div>뗀석기를 만들던 사람들은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돌을 떼어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갈아서도 도구를 만들기 시작했어요. 이렇게 간석기를 만들어 사용하는 시기를 신석기 시대라고 하지요. 구석기 시대가 한참 흐른 뒤에 인류는 신석기 시대를 맞이하게 된답니다.</div>]]></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02:53:08+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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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뗀석기를 사용했던 구석기인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bc/2</link>
<description><![CDATA[<p>미국 군인이 발견한 도구는 주먹도끼였어요. 주먹도끼는 흔히 한쪽 끝이 뾰족하고 반대쪽은 손으로 쥐고 사용할 수 있도록 뭉툭하게 만들어졌어요. 나무를 베거나 짐승의 가죽을 벗기는 등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할 수 있는 도구였지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82639_2774.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82639_2774.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82639_2774.png" /><br style="clear:both;" />주먹도끼를 사용하는 모습</p><p>전곡선사박물관</p><p>연천 전곡리 유적에서 주먹도끼가 발견된 것은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어요. 이 유물이 발견되기 전까지 미국의 한 고고학자는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의 구석기 문화 수준이 유럽이나 아프리카에 비해 발달하지 못했다고 주장했어요. 이 지역은 주먹도끼처럼 발달된 도구가 발견되지 않고 찍개라는 도구를 주로 사용했기 때문이라는 거죠. 그런데 전곡리에서 주먹도끼가 발견되면서 그의 주장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증명되었죠. 주먹도끼는 전곡리 이후에도 우리나라와 중국에서 계속 발견되었답니다.</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82673_7041.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82673_7041.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82673_7041.png" /><br style="clear:both;" />주먹도끼</p><p>국립중앙박물관</p><p>주먹도끼를 만든 구석기인들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곧선사람들이라고 해요. 곧선사람들은 최초의 인류가 아프리카에서 살던 것과 달리 유럽과 아시아로 생활 범위를 넓혔어요. 불을 다룰 줄 알았기 때문이지요. 주먹도끼는 곧선사람들이 살던 곳에서 주로 발견된답니다.</p><p><br /></p><p>주먹도끼는 구석기인들이 사용한 다른 도구처럼 돌을 떼어내서 만들어요. 그런데 다른 뗀석기와 다른 점이 있어요. 일정한 모양으로 계속해서 만들어냈다는 것이죠. 마치 오늘날 공장에서 똑같은 물건을 계속 만들어내듯 말이에요. 이를 통해 구석기인들의 도구 제작 기술을 엿볼 수 있어요.</p><p><br /></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82752_9389.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82752_9389.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82752_9389.png" /><br style="clear:both;" /> </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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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c:date>2026-07-20T02:39:26+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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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구석기인의 생활 모습을 알려주는 연천 전곡리 유적</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bc/1</link>
<description><![CDATA[<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81931_7514.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81931_7514.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481931_7514.png" /> </p><p>연천 전곡리 선사유적지(경기 연천군)</p><p><br /></p><p>“여기 좀 와서 보세요. 특이하게 생긴 돌이 있어요.”</p><p><br /></p><p>“이 돌은 구석기인들이 사용하던 것 같군요. 대학교수님께 자료를 보내 알아보아야겠어요.”</p><p><br /></p><p>1978년 동두천에 주둔하고 있던 한 미국 군인이 연천 전곡리에서 데이트를 하다 뗀석기를 발견했어요. 미국 군인이 발견한 이 도구는 무엇일까요? 이외에도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구석기 시대의 도구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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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c:date>2026-07-20T02:26:11+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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