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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한국의 역사, 지금나우, 1555-0001 &amp;gt; 고대사 &amp;gt; 고대사 600년대</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600s</link>
<language>ko</language>
<description>고대사 600년대 (2026-07-21 14:41:05)</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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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역사 속 작은 이야기: 발해의 유학</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600s/107</link>
<description><![CDATA[<p>발해는 불교뿐만 아니라 유학도 발달하였어요. 나라를 다스릴 때 유학 사상을 반영하였고, 주자감이라는 유학 교육 기관을 세워 인재를 길러냈지요. 당에 파견된 유학생 중에는 외국인을 위한 과거 시험인 빈공과에 합격한 사람들도 있었는데, 1등 자리를 놓고 신라 유학생과 경쟁을 벌인 일은 유명한 일화예요.</p><p><br /></p><p>또 정혜 공주와 정효 공주의 묘지석에 유학 경전의 내용이 인용될 정도였어요. 이뿐만이 아니라 일본 한시집에 남아 있는 발해 사신 양태사와 왕효렴의 시를 보면 발해의 한문학 수준을 짐작할 수 있어요.</p><p>밤에 다듬이 소리를 듣다</p><p><br /></p><p>서리가 차가운 하늘에 달빛이 비치어 은하수 밝은 밤,</p><p>나그네는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에 감회가 남다릅니다.</p><p>이 긴 밤을 조용히 앉아 있자니 수심에 애가 타는데,</p><p>홀연히 들려오는 것은 이웃 아낙네의 다듬이 소리</p><p>……</p><p><br /></p><p>고국 떠난 뒤로는 저 소리 들어보지 못했는데,</p><p>이제 타향에 있으면서 고향에서 듣는 것 같습니다. ……</p><p>멀리 가녀린 몸은 구슬 같은 땀에 젖어 가련하고,</p><p>이미 옥같이 고운 팔은 점점 지쳐 가고 있겠지요.</p><p>……</p><p><br /></p><p>-『경국집』-</p><p><br /></p><p>위 글은 발해의 시인 양태사가 지은 한시에요. 양태사는 발해 문왕 때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이 시를 지었는데, 일본에서 편찬한 한시집인 『경국집』에 전하고 있어요. 귀국을 앞둔 어느 가을밤, 이웃에서 들려오는 다듬이 소리를 듣고 지은 시로 지은이의 고국에 대한 그리움이 느껴져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612452_558.png" title="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612452_558.png" alt="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612452_558.png" /> </p><p>정효 공주 묘비(중국 지린성 룽터우 산 출토)</p><p>한국학중앙연구원</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1T14:41:05+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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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정혜 공주 묘와 정효 공주 묘</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600s/106</link>
<description><![CDATA[<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612129_0498.png" title="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612129_0498.png" alt="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612129_0498.png" /><br style="clear:both;" />정혜 공주 묘(중국 지린성 돈화현 육정산)</p><p>동북아역사재단</p><p><br /></p><p>발해의 제3대 국왕인 문왕(재위 737~793)에게는 원래 4명의 딸이 있었다. 그 중 첫째 딸과 셋째 딸은 일찍 죽고, 둘째 딸인 정혜 공주(738~777)와 넷째 딸인 정효 공주(757~792)의 묘가 발견되었다. 문왕 때 만들어진 두 공주의 무덤은 발해 문화의 특징을 알려주는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받고 있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612232_4724.png" title="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612232_4724.png" alt="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612232_4724.png" /><br style="clear:both;" />정효 공주 묘의 내부 모습 상상도</p><p><br /></p><p>묘지석과 함께 돌사자상이 출토된 정혜 공주 묘(둔화 류딩산 고분군)는 모줄임 천장 구조를 가진 고구려 양식의 굴식 돌방무덤으로 축조되어 있어서 발해 문화가 고구려 문화를 계승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지요. 한편, 묘지석이 나온 정효 공주 묘(허룽 룽터우산 고분군)는 정혜 공주 묘와는 달리 당의 영향을 받아 벽돌무덤 양식으로 축조되고 무덤 벽면에 인물 위주의 벽화가 그려졌어요.</p><p>무덤의 벽화에는 모두 12명의 인물이 있는데, 얼굴에 건강미가 느껴져요. 공주를 시중들던 남장한 여성들도 보이는데, 이는 당시 당에서 유행하던 풍속이었어요. 또한, 고구려와 당에서는 보기 드물게 무덤 위에 벽돌로 된 탑을 세운 것으로 확인되었어요. 이는 발해가 고구려 문화를 잇고 중국 당나라 문화를 수용하면서도 발해 나름대로 독자적인 문화를 일구어 갔음을 보여 주는 사례이지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612266_531.png" title="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612266_531.png" alt="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612266_531.png" /><br style="clear:both;" /> </p><p>정효 공주 묘의 벽화(중국 지린성 허룽)</p><p>동북아역사재단</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1T14:35:58+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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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발해 석등</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600s/105</link>
<description><![CDATA[<p>발해 상경성 유적에서는 많은 절터가 확인되고 있어요. 특히 이곳에서는 유례가 드물 정도로 거대한 석등이 남아 있어 발해 시기 융성하였던 사찰의 모습을 짐작하게 해주지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611867_2803.png" title="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611867_2803.png" alt="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611867_2803.png" /><br style="clear:both;" />발해 석등(중국 헤이룽장성 닝안)</p><p>동북아역사재단</p><p><br /></p><p>발해 석등은 현재는 없어진 윗부분까지 포함하면 원래 높이는 6.3m나 되었을 것이라고 해요. 이는 광개토대왕릉비의 높이 6.39m와 거의 비슷해요. 정말 어마어마하게 크죠? 석등의 높이를 통해 웅장한 발해 문화의 특징을 짐작할 수 있답니다.</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1T14:31:23+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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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이불병좌상</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600s/104</link>
<description><![CDATA[<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611696_0882.png" title="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611696_0882.png" alt="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611696_0882.png" /><br style="clear:both;" />이불병좌상(중국 지린성 훈춘 팔련성 출토)</p><p>국립중앙박물관</p><p><br /></p><p>발해의 불교에 관한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아서 발해의 불교가 얼마나 발달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어요. 다만 수도였던 상경성 터에서 10여 곳의 절터가 발굴되었고, 발해의 주요 도시에 절터가 집중적으로 발견되고 있어서 당시 불교가 크게 유행했음을 짐작할 수 있어요. 신라나 당나라 등 당시 가까이 있던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발해의 주된 종교는 불교였다고 할 수 있어요.</p><p><br /></p><p>지금까지 발견된 발해의 절터는 모두 40여 곳인데, 발해 절터 대부분이 통치의 중심지인 5경, 즉 수도였던 다섯 곳에 에 몰려 있어요. 아마도 지배층의 종교가 불교였기 때문이겠지요. 특히 발해 문왕은 불교를 널리 받아들였고, 자신을 ‘금륜성업대왕’이라고 높여 불렀어요. ‘금륜’은 금륜왕을 가리키는 것으로, 불교 세계에서 절대적인 왕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해요. 이처럼 발해 문왕은 부처님의 힘으로 이 세상을 통치하는 이상적인 나라를 꿈꿨다고 할 수 있지요.</p><p><br /></p><p>한때 발해의 수도 중 하나였던 동경 용원부 지역은 오늘날에 중국의 훈춘시에 해당돼요. 이곳에서 발견된 이불병좌상을 통해 발해 불교를 엿볼 수 있어요. 높이는 10.8cm로 작은 크기인데, 두 부처님이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을 하고 있어요. 부처님을 표현한 방식이나 머리 뒤의 후광, 옷 모양 등에서 고구려의 특색이 나타나 있어요. 이 불상 역시 고구려 불상을 계승했다고 할 수 있지요.</p><div><br /></div>]]></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1T14:28:58+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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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발해 기와</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600s/103</link>
<description><![CDATA[<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611510_2171.png" title="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611510_2171.png" alt="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611510_2171.png" /><br style="clear:both;" />발해 수막새와 고구려 수막새</p><p>국립중앙박물관</p><p><br /></p><p>왼쪽은 발해 기와(수막새)이고, 오른쪽은 고구려 기와(수막새)인데, 이 두 기와는 원 주위에 꽃잎이 둘러싼 형태가 닮아 있어요. 이처럼 발해의 기와는 무늬가 뚜렷하고 힘 있는 고구려 양식을 계승했다고 할 수 있어요.</p><p><br /></p><p>한편 발해 기와의 무늬가 고구려 양식을 따랐다는 사실은, 건축물을 세운 장인(기술자)들이 고구려 출신이거나 고구려 후손들일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말해주지요. 또한 발해 지배층이나 불교 사찰의 승려 가운데 고구려 계통의 사람들이 꽤 많았다는 것도 짐작할 수 있게 해줘요.</p><p><br /></p><p>발해 상경성 유적에서는 10곳의 사찰터가 확인되었는데, 이중 두 곳의 사찰 터에서 귀면와(도깨비 얼굴 모양의 기와)가 각각 8점씩 출토되었어요. 건물의 추녀마루를 장식하는 기와로 사용된 귀면와는 대략 길이 33~34㎝, 너비 31~37㎝, 높이 23~27㎝이에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611538_427.png" title="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611538_427.png" alt="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611538_427.png" /><br style="clear:both;" />귀면와(중국 헤이룽장성 닝안 출토)</p><p>국립중앙박물관</p><p><br /></p><p>귀면와의 모양을 보면, 모두 커다란 눈망울을 부라린 채 입을 크게 벌려 기다란 혓바닥과 툭 튀어나온 이빨이 드러나 있어요. 코는 입 위에 뭉툭하게 드러나 있고, 귀는 커다란 고리처럼 표현되어 있지요. 또한 뒤쪽으로 뿔처럼 생긴 갈기가 돋아 있어서 정말로 귀신이 얼씬거리지 못할 것 같은 사나운 모습이에요. 또한 전면에 녹색, 녹갈색의 유약을 바르고, 눈에는 갈색, 눈동자에는 녹갈색, 이빨에는 황백색, 입술에는 녹색유약을 발라 더욱 생동감이 있어요.</p><p>이러한 귀면와는 초자연적인 힘으로부터 건축물을 보호하려는 염원이 반영된 것으로 생각돼요. 더불어 여러 가지 유약을 시유하여 도깨비기와를 제작했다는 점을 통해, 당시 발해 지배층이 사찰 건물을 화려하게 지었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1T14:25:54+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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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em>
<title>발해 치미</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600s/102</link>
<description><![CDATA[<div>솔개의 꼬리 모양을 딴 치미는 지붕 꼭대기에 올려놓은 장식물로, 망새라고도 해요. 발해 상경성터에서 발견된 치미는 높이가 87센티미터이고 표면에 연한 초록빛이 나는 유약이 칠해져 있어요. 고구려 치미가 발해 치미보다 두 배 남짓 크고 형태도 차이가 있지만, 기본적인 구조와 선의 흐름 등을 볼 때, 발해 치미는 고구려 치미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어요.</div><div><br /></div><div><br /></div><div><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611121_4767.png" title="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611121_4767.png" alt="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611121_4767.png" /><br style="clear:both;" />발해 치미(국립중앙박물관)</div>]]></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1T14:21:19+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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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발해의 온돌 유적</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600s/101</link>
<description><![CDATA[<p>오늘날 중국의 헤이룽장성의 닝안은 발해의 수도 상경성이 있던 곳이에요. 이곳에서 발해의 온돌 터가 발견되어서 발해가 고구려의 생활 문화를 계승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어요.</p><p>온돌이란 아궁이에 불을 때서 그 열기로 방바닥인 구들을 데우는 우리나라 고유의 난방 방식이에요. 김치의 영문 표기 방식인 ‘kimchi’와 함께 세계 유명 사전에 ‘ondol’이라는 명칭이 그대로 올라가 있을 정도로 우리 문화의 독창성을 자랑하지요.</p><p><br /></p><p>온돌은 일찍부터 우리 민족이 한반도 북부와 만주 지역의 매서운 추위를 이겨 내기 위해 개발한 것이에요. 온돌은 점차 남쪽 지역으로 퍼져 나가 고려 시대에는 전국적으로 사용된 것으로 짐작돼요. 고구려와 발해의 여러 건물 유적에서 발견되는 온돌 장치는 방 전체가 아닌 일부에만 ‘ㄱ’자나 ‘ㄷ’자, ‘一’자 모양으로 온돌을 놓은 것들이에요. 이 방식이 개선되어 조선 시대에는 방 전체에 온돌을 깔았지요. 이러한 온돌 문화는 우리 민족의 고유한 풍속으로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답니다.</p><p><br /></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610528_6669.png" title="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610528_6669.png" alt="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610528_6669.png" /> </p><p>발해 온돌 터(연해주 크라스키노 성터 유적)</p><p>동북아역사재단</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1T14:09:14+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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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em>
<title>발해의 문화</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600s/100</link>
<description><![CDATA[<p>고구려 유민 출신인 대조영은 698년에 고구려 유민과 말갈인을 이끌고 발해를 세웠어요. 발해가 세워지면서 우리 역사는 남쪽의 신라와 북쪽의 발해가 함께 발전해가는 남북국의 형세를 이루었지요.</p><p><br /></p><p>발해는 고구려 유민들이 중심이 되어 세워진 나라였어요. 그래서 발해 사람들은 자신들이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의식을 지니고 있었어요. 발해의 무왕이 일본에 보낸 편지에도 고구려를 계승하고 풍속을 이어받았다는 내용이 들어 있지요.</p><p><br /></p><p>이처럼 발해는 고구려의 전통을 이어받으면서도 중국의 당나라 문화도 받아들였어요. 또한 나라를 세우는 데 함께 힘을 보탠 말갈인들의 문화도 자연스럽게 섞이게 되었어요. 이렇게 해서 발해는 자신들의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키며 다채로운 모습을 보여 주었어요.</p><p><br /></p><p>현재 중국의 헤이룽장성 닝안은 발해의 수도였던 상경이 있던 곳이에요. 발해는 수도를 네 번 옮겼는데 그중 상경은 가장 오랜 기간 수도로서 번영한 곳이에요. 상경성은 당시 중국 당나라의 장안성과 같은 모양을 갖춘 계획도시였어요. 현재 옛 상경성 자리에는 많은 궁궐 터와 사찰 터, 집터 그리고 다양한 유물의 자취가 남아 있어요. 이를 통해 발해의 문화를 짐작할 수 있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610292_0676.png" title="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610292_0676.png" alt="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610292_0676.png" /><br style="clear:both;" />상경성 터 항공사진</p><p>동북아역사재단</p><p><br /></p><p>발해의 수도였던 상경성 유적의 궁궐 터에서 발견된 온돌 장치, 절터에서 나온 치미와 연꽃무늬 막새기와, 토기 등을 살펴보면 고구려 양식을 따랐음을 알 수 있어요. 또한 상경성 유적에서만 무려 10여 개의 대규모 절터가 발견되어서 당시 발해에서 불교가 널리 유행했음을 알 수 있어요.</p><p>발해에서는 불교가 유행하면서 불교 미술이 발달하였어요. 수도였던 상경성 유적과 동경성 유적에서는 절터와 함께 많은 불상이 발견되었어요. 또한 일부 지역에서는 탑과 석등을 볼 수 있지요. 발해 불상에는 흙을 구워 만든 것이 많으며, 두 명의 부처가 나란히 앉아 있는 이불병좌상, 돌로 조각한 석불 등도 있어요. 탑은 당의 양식을 따라 벽돌로 만들었는데 그중에는 무덤 위에 세운 것도 있어 발해만의 특색을 보여 주고 있지요. 한편, 절에 세운 석등은 높이가 6m에 이를 만큼 웅장하여 발해인의 기상을 엿볼 수 있답니다.</p><p><br /></p><p>발해는 불교 외에 유교 문화도 발달했어요. 유학을 가르치는 교육 기관으로 주자감을 설치하기도 하였고, 당나라로 유학을 간 학생들이 당나라에서 빈공과라고 불리는 외국인을 위한 과거 시험에도 많이 합격했어요. 그중에는 신라 유학생들과 1등 자리를 다투기도 했어요.</p><p><br /></p><p>한편, 발해의 무덤은 대개 고구려 양식으로 만든 것이 많으며, 당나라 양식을 따른 것도 발견되었어요. 발해의 정혜 공주 무덤은 고구려 무덤 양식을 계승한 굴식 돌방무덤이에요. 정혜 공주 무덤보다 늦게 만들어진 정효 공주 무덤은 당나라 양식을 따른 벽돌무덤으로, 무덤 안에 그려진 벽화도 당나라의 영향을 받은 그림으로 알려져 있어요.</p><p><br /></p><p>이제부터 발해의 주요 문화유산을 살펴보면서 어떤 특징이 있는지 알아볼까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610329_5186.png" title="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610329_5186.png" alt="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610329_5186.png" /><br style="clear:both;" /> </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1T14:05:36+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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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em>
<title>고구려 문화를 계승한 발해 문화</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600s/99</link>
<description><![CDATA[<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610047_0515.png" title="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610047_0515.png" alt="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610047_0515.png" /><br style="clear:both;" />국립중앙박물관 내부(서울 용산구)</p><p><br /></p><p>“먼 곳까지 오느라 수고 많았소. 발해는 나라가 세워진 뒤 이번에 처음 우리 일본에 사신을 보내왔소. 발해는 어떤 나라입니까?”</p><p><br /></p><p>“우리나라는 고구려의 영토를 회복하고 풍속을 이어 받았습니다. 우리 국왕께서는 이웃 나라 일본과 친하게 지내길 희망하십니다.”</p><p><br /></p><p>발해는 일본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임을 밝혔어요. 이처럼 주변 나라에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당당히 밝힌 발해는 어떤 문화를 발전시켰을까요? 그들이 남긴 문화유산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1T14:00:58+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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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정하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600s/98</link>
<description><![CDATA[<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609835_9994.png" title="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609835_9994.png" alt="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609835_9994.png" /><br style="clear:both;" />발해 수도의 건설</p><p><br /></p><p>천문령에서 큰 승리를 거둔 대조영은 고구려와 말갈 유민들을 이끌고 계속 동쪽으로 이동해 마침내 동모산에 도착하였어요. 동모산 동북쪽으로는 송화강의 지류인 목단강이 흐르고, 주변의 땅은 넓고 비옥했어요.</p><p><br /></p><p>그리고 큰 산들이 넓은 평야를 병풍처럼 둘러싸 막아주고 있어 외적을 막기에도 좋은 곳이었어요. 그래서 대조영은 동모산에 성을 쌓고 도읍으로 정하였어요. 이곳에 정착하게 된 대조영은 나라 이름을 ‘진’이라 하였는데, 나중에 나라의 이름을 ‘발해’로 바꾸었지요.</p><p>대조영은 고구려가 멸망한 지 불과 30년 만에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를 새로 세웠어요. 대조영이 이제 동북아시아 지역의 새로운 지도자로 등장한 순간이었어요.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과 여러 말갈족을 이끌며 나라의 기틀을 잡아갔어요. 나라를 세운 후에는 바로 돌궐과 국교를 맺어 당을 견제하였고, 신라, 왜와도 교류하면서 나라를 발전시켜 나갔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609871_5714.png" title="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609871_5714.png" alt="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609871_5714.png" /><br style="clear:both;" />발해의 문화</p><p><br /></p><p>발해는 계속 성장하여 서쪽으로 요동 지역까지 진출했고, 동쪽으로는 동해와 접했으며, 동북쪽으로는 흑수 말갈에 이르는 넒은 영역을 차지했어요. 국력과 문화가 크게 발전하여 당은 발해를 ‘해동성국’이라 부르기까지 했어요.</p><p>‘해동성국’ 발해! 번성했던 발해가 사라지고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발해의 모습을 알 수 있는 유적이나 유물이 지금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아요. 그렇지만 이들 문화유산을 살펴보면서 대륙을 호령했을 발해 사람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아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609908_9412.png" title="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609908_9412.png" alt="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609908_9412.png" /><br style="clear:both;" />발해 전성기 영토</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1T13:58:39+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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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사람들을 이끌고 당에서 탈출하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600s/97</link>
<description><![CDATA[<p>이 틈을 노려 대조영의 아버지 걸걸중상은 당으로부터 벗어나고자 고구려 유민을 이끌고 말갈 추장 걸사비우와 함께 옛 고구려 땅으로 돌아가려 영주 땅을 탈출했어요(696년).</p><p><br /></p><p>걸걸중상과 고구려 유민, 그리고 걸사비우와 말갈 유민들은 요하를 건너 요동 땅에 도착했어요. 당 조정은 처음에는 걸걸중상과 걸사비우에게 관직을 주고 다시 돌아오도록 설득했으나 걸걸중상 등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그러자 당 조정은 입장을 바꿔 거란출신 장군 이해고에게 군사를 주어 요동으로 이들을 쫓아 공격하도록 명령하였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609607_7223.png" title="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609607_7223.png" alt="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609607_7223.png" /><br style="clear:both;" />당에 맞선 대조영과 고구려 유민</p><p><br /></p><p>당군이 추격하는 것을 알고 걸사비와와 걸걸중상은 군대를 모아 당군과 맞서 싸웠어요. 그러나 이 전투에서 고구려와 말갈 연합군은 크게 패했고, 그만 걸사비우는 전사하고 말았지요.</p><p><br /></p><p>걸걸중상이 남은 유민들을 이끌고 동쪽으로 발길을 재촉하였는데, 얼마 뒤에 걸걸중상마저 병에 걸려 죽고 말았어요. 이제 대조영이 고구려 유민뿐만 아니라 추장을 잃은 말갈 유민들을 이끌어야만 했어요. 당군은 나중에 골칫거리가 될지도 모를 고구려와 말갈 유민들을 뒤쫓아서 끈질기게 추격해 왔어요.</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609650_6548.png" title="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609650_6548.png" alt="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609650_6548.png" /><br style="clear:both;" />천문령 전투</p><p><br /></p><p>대조영은 유민들을 이끌고 동쪽으로 향했어요. 옛 고구려의 만주 지역으로 가려면 높은 산맥 사이로 난 천문령을 지나야 했어요. 천문령에 도착한 대조영은 높은 산의 험준한 지형을 이용해 이해고의 추격을 막고자 했어요.</p><p><br /></p><p>대조영은 싸울 수 없는 아녀자와 노인들을 먼저 보내고, 군사들을 이끌고 계곡에서 당군을 기다렸어요. 당군이 도착하자마자 고구려와 말갈 연합군은 험준한 곳에 의지해 공격을 퍼부었어요. 대조영의 기습 공격을 받은 당군은 크게 패하였고, 이해고는 겨우 도망치고 말았어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1T13:54:30+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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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고구려 유민들, 당에 끌려가 살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600s/96</link>
<description><![CDATA[<p>668년, 나당 연합군에게 의해 고구려가 멸망하였어요. 그러나 고구려 땅 곳곳에서는 고구려 부흥을 위한 노력이 계속되었지요. 눈에 가시 같던 고구려를 점령한 당은 고구려 유민들이 다시 나라를 일으킬까 두려워했어요.</p><p><br /></p><p>그래서 20만 명이 넘는 고구려 백성을 당으로 끌고 갔지요. 그 중에는 당에 저항하는 핵심 세력들이 대부분 포함되었어요. 이렇게 끌려간 고구려 유민은 가까이는 요서 지역인 영주로, 멀리는 양쯔강 남쪽의 황무지까지 끌려가 가난하고 비참하게 살았어요.</p><p><br /></p><p>대조영도 고구려가 멸망하자 많은 고구려 유민과 함께 영주로 끌려왔어요. 당시 영주는 당이 동북방의 이민족을 막기 위해 세운 전진기지가 있던 곳이었어요. 이곳에는 고구려 유민을 비롯하여 말갈인, 거란인 등 여러 민족이 강제로 끌려와 뒤섞여 살고 있었어요. 이들은 모두 당에 대해 불만과 불신을 가슴 속 깊이 품었어요. 그래서 언제든지 반란을 일으킬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어요.</p><p><br /></p><p>이때 영주를 다스리던 당의 관리가 높은 세금을 매겨 자기 재산을 늘렸고, 이를 어기는 자는 가차없이 처벌을 하여 많은 백성들의 원성을 샀어요. 게다가 수년 째 거듭된 가뭄으로 백성들의 고통은 커져 갔지만 당 관리의 수탈은 계속되었지요.</p><p>참다못한 거란족의 추장 이진충은 부하를 보내 백성들을 도와 줄 것을 요청했으나 오히려 매를 맞고 반죽음 상태로 돌아 왔어요. 이에 화가 난 이진충은 군사를 모아 반란을 일으켜 당 관리를 죽이고 영주를 점령해 버렸어요. 그리고 당 정부에서 보낸 군대도 매복했다가 전멸시켜 버렸지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1T13:50:41+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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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em>
<title>대조영, 동모산에서 발해를 세우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600s/95</link>
<description><![CDATA[<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609366_4084.png" title="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609366_4084.png" alt="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609366_4084.png" /><br style="clear:both;" />동모산(중국 지린성)</p><p><br /></p><p>“고구려 유민과 말갈인 여러분, 드디어 끈질긴 당의 추격을 따돌렸습니다.”</p><p><br /></p><p>“이 모든 게 다 장군 덕분입니다.”</p><p><br /></p><p>“아닙니다. 여러분이 저를 믿고 따라 주셨기 때문이지요. 이제 우리는 이곳 동모산에 새로운 터전을 마련해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를 세울 것입니다.”</p><p><br /></p><p>698년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들이 동모산에서 나라를 세웠어요. 이들을 이끌고 새로운 나라를 세운 사람은 누구일까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1T13:49:39+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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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em>
<title>역사 속 작은 이야기: 신비한 피리, 만파식적 이야기</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600s/94</link>
<description><![CDATA[<p>문무왕을 장사지낸 뒤 대왕암 주위에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말을 들은 신문왕은 깜짝 놀랐어요.</p><p><br /></p><p>“언제부턴가 동해에 작은 바위산이 하나 나타나더니 감은사 쪽으로 와서는 바다 위에 둥실둥실 떠 있다고 합니다.”</p><p><br /></p><p>“정말 이상한 일이구나. 도대체 그 바위산이 무엇이란 말이냐?”</p><p><br /></p><p>신문왕은 신하들을 이끌고 바닷가로 가 보았어요. 바다에는 정말로 거북이 모양의 바위산이 떠 있고 그 위에 대나무 두 그루가 서 있었어요.</p><p><br /></p><p>“낮에는 저렇게 대나무가 두 그루로 떨어져 있지만, 밤이 되면 하나로 합쳐진다고 합니다.”</p><p><br /></p><p>“정말로 이상한 일이로다. 내 직접 저 바위산에 가 보리라.”</p><p>신문왕의 말이 끝나자 갑자기 천둥이 치고 비바람이 불기 시작하였어요. 그 뒤 9일 만에 신문왕이 바위산에 가니 용이 나타나 바위산의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면 나라가 평화롭고 번성할 것이라 하였어요. 신문왕은 그 말대로 피리를 만들었어요.</p><p><br /></p><p>피리는 신기하고 놀라운 힘을 갖고 있었어요. 피리를 불면 쳐들어오던 적군이 물러가고, 병을 앓던 사람들도 나았어요. 또 가뭄에는 비가 오고 홍수에는 비가 그쳤으며 바다의 바람과 물결도 잠잠해졌어요.</p><p><br /></p><p>피리 소리는 세상의 나쁜 일을 없애고 평화를 가져다주었어요. 사람들은 이 피리를 ‘세상의 걱정을 없애고, 평안하게 하는 피리’라 하여 ‘만파식적’이라고 불렀어요.</p><p><br /></p><p>바다에 무덤이 만들어지고, 왕은 용이 되어 왜구를 물리친다니 신기하지요. 여러분은 문무 대왕릉과 감은사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어떤 생각이 들었나요?</p><p><br /></p><p>문무 대왕릉과 감은사를 통해 왜구의 침략에 맞서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문무왕과 신문왕의 마음이 조금이나마 이해되지 않나요? 더불어 삼국을 통일한 후 나라의 모든 근심이 사라지고 평안해지기를 원했던 만파식적 이야기의 의미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1T13:46:04+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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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em>
<title>대왕암과 감은사는 정말 통해 있을까?</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600s/93</link>
<description><![CDATA[<p>감은사와 대왕암은 부처님의 힘으로 왜구를 막으려는 바람이 담긴 곳이에요. 감은사의 중심 건물인 금당 아래에는 용이 된 문무왕이 드나드는 통로를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어요.</p><p><br /></p><p>감은사의 금당은 나란히 서 있는 두 탑의 북쪽에 있어요. 지금은 금당의 터만 남아 있는데 잘 살펴보면 금당 아래에 구멍의 흔적을 찾을 수 있지요.</p><p>그리고 감은사 터 앞을 흐르는 대종천은 곧바로 문무 대왕릉이 있는 동해로 흘러 들어가요. 이런 흔적으로 보아 대왕암과 감은사의 금당은 연결되었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p><p><br /></p><p>동해의 용이 된 문무왕이 바다에서 하천을 거슬러 부처님이 계신 금당까지 온다고 상상해 보세요. 부처님의 힘을 빌린 용은 왜구를 가볍게 물리쳤겠지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609033_654.png" title="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609033_654.png" alt="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609033_654.png" /><br style="clear:both;" />감은사 금당 터</p><p>문화재청</p><div><br /></div>]]></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1T13:44:04+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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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em>
<title>은혜에 감사하며 절을 짓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600s/92</link>
<description><![CDATA[<p>문무왕은 동해가 내려다보이는 야트막한 산에 절을 짓게 했어요. 지금은 탑만 남아 있는 이 절은 신문왕이 아버지 문무왕의 은혜에 감사한다는 뜻으로 감은사라 이름 지었어요. 감은사는 부처의 힘을 빌려 왜구를 물리치고자 문무왕 때부터 짓기 시작하여 그의 아들인 신문왕 때 완성되었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608875_4109.png" title="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608875_4109.png" alt="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608875_4109.png" /><br style="clear:both;" />경주 감은사지 동·서 삼층 석탑</p><p>문화재청</p><p><br /></p><p>감은사터에는 동쪽과 서쪽에 두 개의 탑이 나란히 서 있어요. 이 두 탑은 삼국을 통일한 신라의 힘을 보여주는 듯 다른 절의 탑보다 크고 엄숙한 모양을 하고 있지요. 이러한 감은사는 이후 통일신라 시대 절을 지을 때 좋은 본보기가 되었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608909_145.png" title="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608909_145.png" alt="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608909_145.png" /><br style="clear:both;" /> </p><div><br /></div>]]></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1T13:41:58+09:00</dc:date>
</item>


<item>
<title>동해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려고 했던 문무왕</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600s/91</link>
<description><![CDATA[<p>“뭐라? 또 왜구가 쳐들어왔어? 왜구들 때문에 편한 날이 없군.”</p><p><br /></p><p>신라인들은 동해로 쳐들어와 사람들을 죽이고 재물을 빼앗아 가는 왜구들 때문에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어요. 당시 동해와 남해 바닷가에는 왜구들의 노략질이 아주 심했으니까요. 그들은 순식간에 나타나 마을을 불사르고 많은 재물을 빼앗아 갔어요. 왜구 때문에 늘 걱정하던 문무왕은 죽기 전에 유언을 남겼어요.</p><p><br /></p><p><br /></p><p>내가 죽으면 동해 바다에 묻어다오. 나는 죽은 뒤 용이 되어 부처님을 받들고 나라의 평화를 위해 왜구를 막을 것이다. 나의 유해를 동해에 장사지내도록 하라.</p><p><br /></p><p>문무왕은 죽어서도 나라와 백성을 지키기 위해 동해의 용이 되려고 한 것이에요. 문무왕의 아들인 신문왕(재위 681～692)은 아버지의 유언대로 동해 한가운데 있는 바위섬을 깎아 못을 만들고, 그 못 안에 아버지의 뼈를 뿌린 수중 왕릉을 만들었던 것이지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608488_8766.png" title="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608488_8766.png" alt="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608488_8766.png" /><br style="clear:both;" /> </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1T13:34:55+09:00</dc:date>
</item>


<item>
<title>바닷속에 무덤을 만들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600s/90</link>
<description><![CDATA[<p>경주 토함산 동쪽 바다에는 조그만 바위섬이 하나 있어요. 바닷가에서 약 200미터쯤 떨어져 있는 이 바위섬이 바로 삼국 통일을 완성한 문무왕의 무덤인 문무 대왕릉으로 ‘대왕암’이라고도 불려요.</p><p><br /></p><p>경주 문무 대왕릉은 우리 역사에 등장하는 많은 왕의 무덤 중에 가장 독특한 무덤일 거예요. 어떻게 왕의 무덤이 바다에 만들어졌을까요? 직접 보면 무덤이라기보다도 바다 한가운데 솟아난 평범한 바위로 보이죠. 하지만 이곳에 살던 사람들은 바다 위에 있는 이 바위섬을 신라 문무왕의 무덤이라고 믿었어요.</p><p><br /></p><p>게다가 어부들은 이곳을 신성하게 여겨 바위 근처에서는 고기잡이도 하지 않았다고 해요. 그리고 시간이 지나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과 학자들의 연구를 통해 이곳은 문무 대왕릉으로 확인되었어요.</p><p><br /></p><p>문무왕릉 가운데는 연못처럼 움푹 파여 있고, 이곳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네 방향으로 십자 모양의 물길이 나 있어요. 동쪽에서 몰려오는 파도는 물길을 따라 대왕암의 가운데로 들어와서는 서쪽 물길로 빠져나가요. 물길이 사방으로 나 있기 때문에 파도가 높은 날이나 낮은 날이나 대왕암 안에는 늘 바닷물이 잔잔하게 고여 있어요.</p><p>불교가 신라 사회에 퍼지면서 불교식 장례법인 화장이 유행하여 뼛가루를 바다와 강에 뿌리거나 뼈단지에 넣어 무덤을 만들었지요. 당시 문무왕을 화장한 뒤 이곳에 뼛가루를 뿌렸을 거라 짐작되고 있어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1T13:28:37+09:00</dc:date>
</item>


<item>
<title>바닷속에서도 나라를 지키고자 한 문무 대왕릉</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600s/89</link>
<description><![CDATA[<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607551_4494.png" title="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607551_4494.png" alt="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607551_4494.png" /><br style="clear:both;" />경주 문무 대왕릉(경북 경주시)</p><p>문화재청</p><p><br /></p><p>“바닷속에 무덤을 만들다니 대단하군.”</p><p><br /></p><p>“용이 되어 우리 신라를 지켜주겠다고 하니 고마울 뿐이네.”</p><p><br /></p><p>신라 문무왕(재위 661～681)은 아버지인 태종 무열왕(재위 654～661)의 업적을 이어받아 고구려와 백제 땅을 모두 차지하려는 당의 침략을 물리치고 삼국 통일을 완성한 인물이에요. 이제 그가 죽어서 바다에 묻혔어요. 신라는 왜 그의 무덤을 바닷속에 만들었을까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1T13:19:21+09:00</dc:date>
</item>


<item>
<title>녹읍을 폐지하고, 관료전을 지급하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600s/88</link>
<description><![CDATA[<p>신라의 진골 귀족들은 녹읍을 소유하고 떵떵거리며 살고 있었지요. 녹읍은 귀족 관리들이 국가로부터 받은 토지에요. 그 땅에 사는 주민들로부터 토지에 대한 세금을 걷어가고 노동력도 마음대로 동원할 수 있었지요. 실제 그 땅은 진골 귀족이 직접 다스린다고 봐도 될 정도였어요.</p><p><br /></p><p>신문왕은 진골 귀족들의 힘이 강력해지는 점을 경계했어요. 귀족들은 녹읍을 기반으로 엄청나게 부유해졌어요. 게다가 녹읍으로 받은 땅의 백성들을 군사로 양성할 수도 있으니, 왕은 무척 신경이 쓰였어요. 그래서 신문왕은 토지 제도 개혁을 강력하게 추진하였어요.</p><p><br /></p><p>“문무 관료들에게 토지를 차등 있게 주도록 하라.”</p><p><br /></p><p>“중앙과 지방 관리들의 녹읍을 폐지하고, 해마다 조를 차등 있게 주고 이를 법으로 삼아라.”</p><p><br /></p><p>신문왕은 두 차례에 걸쳐 토지 제도를 개혁했어요. 먼저 신하들에게 녹읍 대신 관료전을 주었어요. 그리고 2년 뒤에는 녹읍을 폐지하고, 관리들에게 토지 세금만 거둘 수 있는 권리(조)만 주었지요(689년). 더는 노동력을 마음대로 동원할 수 없게 되었어요. 진골 귀족들의 권력은 점차 약해지고 왕권이 더욱 강해졌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607387_0862.png" title="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607387_0862.png" alt="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607387_0862.png" /><br style="clear:both;" /> </p><p><br /></p><p><br /></p><p><br /></p><p>삼국 통일 이후 신문왕은 국가를 잘 운영하려고 많은 일을 했어요. 왕의 자리에 있었던 기간이 10여 년밖에 안 되지만, 정치적인 혼란을 바로 잡고 통일 신라의 기틀을 닦기 위해 토지제도, 지방제도, 교육제도를 모두 손봤으니 말이에요. 덕분에 이후 왕들은 그가 다진 기반 위에 통일 신라의 발전을 꾀할 수 있었답니다. 신문왕이 왜 통일 신라의 기틀을 닦은 왕으로 불리는지 잘 알게 되었지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1T13:17:03+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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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전국을 9주로 나누고, 5소경을 설치하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600s/87</link>
<description><![CDATA[<p>나라를 제대로 이끌어가려면 훌륭한 인재들이 필요해요. 인재를 길러내려면 교육기관을 잘 갖추어져야 하고요. 신문왕은 유학의 질서에 따라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 국학이라는 교육기관을 설치했어요. 국학에서는 유학을 가르쳐 인재를 양성했지요.</p><p>정부 기구와 지방제도도 잘 갖추어져야 하지요. 특히 삼국 통일 이후 넓어진 땅을 효율적으로 다스리는 것이 중요했어요. 신라, 옛 고구려, 옛 백제 지역을 3개 주씩 나누었지요. 그러면 전국에는 모두 9개 주가 되는 거예요. 주 밑에는 군과 현을 두었고, 일부 중요한 지역에는 지방관을 보내 다스렸어요.</p><p><br /></p><p>도읍인 금성(지금의 경주)이 한반도의 중심이 아닌 구석에 치우친 것도 걱정이었어요. 그래서 도읍을 달구벌(지금의 대구)로 옮기려고 했으나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어요. 대신 주요 지역에 작은 도읍을 설치했지요. 금관경(지금의 김해), 서원경(지금의 청주) 남원경(지금의 남원), 중원경(지금의 충주)을 두어 5소경 체제를 만들고 지방 통치를 강화했어요.</p><p><br /></p><p>지방 통치 체제를 정비한 후에는 군대 조직을 새롭게 편성하고 군사권을 틀어쥐었어요. 군사 조직이 튼튼해야 진골 귀족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나라도 지킬 수 있었지요. 그래서 중앙군인 9서당과 지방군인 10정을 조직했어요. 중앙군인 9서당에는 신라인뿐만 아니라 옛 고구려인, 옛 백제인들과 말갈인들도 포함했어요. 지방군은 9개 주에 각각 1정을 두고, 국경 지역인 한주에는 2정을 두어 10정으로 편성했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607217_2886.png" title="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607217_2886.png" alt="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607217_2886.png" /><br style="clear:both;" />9주 5소경</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1T13:13:50+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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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만파식적 이야기에 담긴 바람</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600s/86</link>
<description><![CDATA[<p>문무왕은 통일을 이룬 후 걱정이 많았어요. 특히 동해로 왜구가 쳐들어올까 늘 고민이었지요. 그래서 죽으면서 유언까지 남겼어요. 자신을 동해 앞바다에 묻어주면 동해의 용이 되어 신라를 지키겠다고요. 그 유언에 따라 경주에서 가까운 감포 앞바다 큰 바위 부근에 그의 유골을 뿌렸다고 해요. 그 무덤이 바로 대왕암이지요. 대왕암 가까운 곳에는 감은사라는 절을 세웠어요. 그리고 만파식적이라는 신비한 대나무 피리를 얻었죠.</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606976_2335.png" title="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606976_2335.png" alt="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606976_2335.png" /><br style="clear:both;" />대왕암</p><p>문화재청</p><p><br /></p><p>『삼국유사』에는 이런 만파식적 이야기가 전해요. 어느 날 동해에 있는 작은 산이 감은사 쪽으로 다가왔대요. 작은 산은 물결을 따라 이리저리 왔다 갔다 했지요.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신문왕은 기이하게 생각해서 점을 치도록 했어요. 신하는 점을 치고 나서 아뢰었어요.</p><p><br /></p><p>“문무왕과 신이 된 김유신 두 성인이 덕을 같이 하여 나라를 지킬 보배를 내려주신다고 하십니다. 해변으로 나가면 큰 보배를 얻게 될 것입니다.”</p><p>신하의 이야기에 신문왕은 배를 타고 작은 산으로 갔어요. 산에 다가가니 용 한 마리가 나타났어요. 용은 왕에게 머리를 조아리더니 옥으로 만든 허리띠를 바쳤어요. 그리고 신문왕은 작은 산에 있는 대나무가 합쳐졌다 다시 갈라지는 모습을 보고 의아해서 용에게 물었어요. 용은 왕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어요.</p><p><br /></p><p>“한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지 않고 두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는 것과 같이 대나무는 합한 후에야 소리가 나는 물건입니다. 이는 왕이 소리로 나라를 다스릴 좋은 징조이니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불면 온 세상이 평화로울 것입니다.”</p><p><br /></p><p>신문왕은 궁으로 돌아와 피리를 만들었어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피리를 불면 적이 물러가고 병이 나았으며, 가뭄 때는 비가 내리고 장마 때는 날이 개었죠. 이후 왕은 이 피리의 이름을 ‘만파식적’이라고 하고 나라의 보물로 삼았어요. 만파식적이란 ‘세상의 온갖 파란(시련)을 그치게 하는 피리’라는 뜻이랍니다.</p><p><br /></p><p>산이 움직이고 피리를 불면 모든 일이 해결되었다는 이야기를 오롯이 믿을 수는 없어요. 그러면 우리는 이 이야기를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요? 신문왕 때 신라 왕실이 정치적인 불안을 떨치고 평화로운 나라를 만들고 싶은 소원이 얼마나 컸는지 추정해 볼 수 있는 기록으로 봐야겠지요?</p><div><br /></div><div><br /></div><div><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607050_8208.png" title="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607050_8208.png" alt="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607050_8208.png" /><br style="clear:both;" /> </div>]]></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1T13:10:58+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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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진골 귀족 김흠돌의 반란을 진압하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600s/85</link>
<description><![CDATA[<p>감은사를 완성한 왕은 신문왕이에요. 삼국 통일을 이룬 문무왕의 첫째 아들이지요. 그는 681년 왕위에 오른 후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신라를 더욱 튼튼한 나라로 만들기 위해 여러 가지 개혁을 했어요.</p><p><br /></p><p>하지만 왕이 된 첫해 큰 어려움이 닥쳤지요. 그의 장인인 진골 귀족 김흠돌이 반란을 일으켰거든요. 왜 반란을 일으켰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어요. 신문왕의 왕비가 김흠돌의 딸이었는데, 왕의 후계를 이을 아들을 못 낳았대요.</p><p><br /></p><p>게다가 왕은 가장 높은 관직인 상대등 자리에 김흠돌이 아닌 다른 사람을 앉혔지요. 이런 상황에서 김흠돌이 권력에서 밀려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반란을 일으킨 것이 아닌지 추측해 볼 수 있어요.</p><p><br /></p><p>반란은 곧바로 진압되었어요. 반란에 관련된 많은 진골 귀족들은 죽음을 면치 못했어요. 조금이라도 죄를 지었거나 국왕에게 도전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면 가차 없이 벌을 내렸어요. 신문왕은 반란이 진압된 후 김흠돌의 딸이자 자신의 부인인 왕비를 궁에서 쫓아내기까지 했어요.</p><p>신문왕이 이렇듯 진골 귀족 세력을 과감하게 처단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통일을 이룬 신라가 권력 다툼으로 이리저리 흔들리면 안 된다는 생각에서였어요. 강력한 왕권을 토대로 하여 국가를 다스리려고 했지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1T11:38:25+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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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em>
<title>신문왕, 통일 신라의 기틀을 닦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600s/84</link>
<description><![CDATA[<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601343_5511.png" title="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601343_5511.png" alt="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601343_5511.png" /><br style="clear:both;" />감은사지(경북 경주시)</p><p><br /></p><p>“문무대왕께서 완성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는데, 드디어 다 지어졌구나. 아버님의 은혜에 감사한다는 뜻에서 ‘감은사’라 하리라.”</p><p><br /></p><p>“기백이 넘치는 두 탑이 훌륭해 보입니다.”</p><p><br /></p><p>“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신라의 발전을 위해 더욱 힘쓸 것이오.”</p><p><br /></p><p>감은사는 신라를 통일한 문무왕이 짓기 시작했어요. 동해로 쳐들어오는 왜구를 부처의 힘에 의지해 막기 위해서지요. 하지만 그는 감은사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고, 그의 아들이 왕이 된 후에야 다 지어졌어요.</p><p>감은사를 완성한 신라의 왕은 누구일까요? 그는 신라의 발전을 위해 어떤 일을 했을까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1T11:35:55+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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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em>
<title>역사 속 작은 이야기: 월지는 한때 안압지라 불렸어요</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600s/83</link>
<description><![CDATA[<p>여러분의 부모님께 월지에 대해 질문을 하면 ‘월지’가 어디냐고 물으시는 분도 계실지도 몰라요. 그럴 때 옛날에 ‘안압지’라고 부르던 연못이라고 하면 “아! 경주에 있는 신라시대 연못 말이구나.” 하실 거예요. ‘월지’가 얼마 전까지도 ‘안압지’라고 불렸거든요.</p><p>‘월지’를 ‘안압지’라고 부른 까닭은 무엇일까요? 조선 시대 사람들이 이 연못을 ‘안압지’라고 불렀기 때문이지요. ‘안압지’라는 용어는 『동국여지승람』이라는 책에 처음 등장해요. 『동국여지승람』은 조선 성종 때 완성된 것으로 각 도의 산과 하천 등 지리와 관련된 정보와 인물, 풍속 등을 적은 책이에요. 『동국여지승람』에는 ‘안압지’가 문무왕 때 만들어진 연못이라고 기록되어 있어요.</p><p><br /></p><p>‘월지’는 신라가 멸망한 후 점점 관리가 소홀해졌어요. 세월이 흐르면서 거의 폐허가 되었어요. 조선 시대 사람들은 월지를 ‘안압지’라고 불렀어요. ‘안압지’가 무슨 뜻이냐구요?</p><p><br /></p><p>한자로 ‘안(雁)’은 ‘기러기’, ‘압(鴨)’은 ‘오리’, ‘지(池)’는 ‘연못’을 뜻해요. 즉, 이곳이 기러기나 오리들이 살던 곳으로 변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던 것이죠.</p><p><br /></p><p>‘동궁과 월지’에 대해 잘 알게 되었나요? 경주에 갈 기회가 생긴다면 ‘동궁과 월지’를 꼭 가보세요. ‘동궁과 월지’는 낮에 가서 보는 것도 좋지만 밤에 보는 풍경도 무척 아름다워요. ‘동궁과 월지’를 거닐면서 신라 귀족들의 생활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601127_1062.png" title="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601127_1062.png" alt="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601127_1062.png" /><br style="clear:both;" />월지의 야경</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1T11:32:19+09:00</dc:date>
</item>


<item>
<title>신라 사람들은 어떤 건물을 지었을까?</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600s/82</link>
<description><![CDATA[<p>월지에서 발굴된 유물 중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세요?</p><p>바로 기와 조각이랍니다. 발굴된 유물 약 3만 점 중 80% 정도의 비율이에요. 기와 중에는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연꽃무늬 수막새와 암막새 이외에도 도깨비 얼굴의 기와도 볼 수 있어요. 그래서 신라 사람들이 건물을 지을 때 지붕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잘 알 수 있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600888_8219.png" title="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600888_8219.png" alt="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600888_8219.png" /><br style="clear:both;" />월지에서 발견된 곱새기와(한국학중앙연구원)와 짐승 얼굴 무늬 기와(국립중앙박물관)</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1T11:28:32+09:00</dc:date>
</item>


<item>
<title>신라인은 사용한 생활용품은 무엇이 있을까?</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600s/81</link>
<description><![CDATA[<p>월지에서 발굴된 유물들은 다른 유물과 다른 점이 한 가지 있어요. 바로 신라인들이 직접 사용했다는 것이죠. 우리가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유물 대부분은 신라의 여러 고분에서 발굴된 것들이에요. 이 유물들은 실제로 사용한 것이라기보다는 죽은 사람을 위해 무덤에 함께 넣어주었던 부장품일 가능성이 더 높아요.</p><p>월지에서 발굴된 생활용품은 무엇이 있을까요? 가장 대표적인 것이 청동으로 만든 가위에요. 청동 가위는 생긴 모습도 무척 아름다워요. 신라인들은 이 가위로 초의 심지를 잘랐을 것으로 생각되어요.</p><p><br /></p><p>그런데 월지에서 발견된 금동초심지 가위와 거의 비슷한 모양의 가위가 발견되었어요. 바로 일본의 정창원에서지요. 정창원은 일본 고대 왕실의 보물창고라고 생각하면 돼요. 이를 통해 신라와 일본 사이의 교류 모습을 짐작할 수 있겠죠.</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600753_6771.png" title="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600753_6771.png" alt="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600753_6771.png" /><br style="clear:both;" />월지 출토 금동 초심지 가위</p><p>문화재청</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1T11:26:06+09:00</dc:date>
</item>


<item>
<title>주령구가 뭐예요?</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600s/80</link>
<description><![CDATA[<p>술잔 비우고 크게 웃기</p><p><br /></p><p>스스로 노래 부르고 마시기</p><p><br /></p><p>소리 없이 춤추기</p><p><br /></p><p>얼굴을 간지럽혀도 참기</p><p>이게 무엇일까요? 월지에서 발견된 주령구에 쓰여 있는 글이에요. 주령구는 14개의 면으로 이루어진 주사위에요. 그중 사각형은 6개 면, 육각형은 8개 면으로 되어 있어요. 또 각각의 면에는 다른 내용의 글귀가 새겨져 있지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600547_3052.png" title="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600547_3052.png" alt="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600547_3052.png" /><br style="clear:both;" />주령구</p><p>국립민속박물관</p><p><br /></p><p>주령구는 신라의 왕과 귀족들이 모여서 잔치를 벌일 때 굴리며 놀던 놀이도구이지요. 나머지는 어떤 글이 새겨져 있는지 살펴볼까요? 몇 가지는 여러분도 할 수 있는 놀이랍니다.</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600575_4959.png" title="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600575_4959.png" alt="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600575_4959.png" /><br style="clear:both;" />주령구의 단면도</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1T11:23:40+09:00</dc:date>
</item>


<item>
<title>월지에서 동물을 키웠다구요?</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600s/79</link>
<description><![CDATA[<p>문무왕 때 월지가 만들어진 후 연못 가운데에 있는 섬과 주변에 나무와 꽃을 심었다고 해요. 또 그곳에 진귀한 새와 기이한 동물도 길렀어요. 궁의 정원에서 신기한 동물을 키우는 것은 당시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유행했던 것이래요.</p><p><br /></p><p>그렇다면 월지에서 어떤 동물을 키웠을까요? 안타깝게도 우리나라 역사책에는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요. 하지만 실망하지 마세요. 월지에서 발견된 동물 뼈와 신라가 일본에 동물을 선물로 보냈다는 기록에서 어떤 동물을 키웠는지 짐작할 수 있어요.</p><p><br /></p><p>월지에서 발견된 동물 뼈는 기러기, 꿩, 오리, 산양, 노루, 말, 사슴, 호랑이 등이에요. 그리고 일본에 보낸 많은 동물 중에는 앵무새와 공작, 낙타 등이 있었다고 해요. 일본에 보낸 동물은 신라에서도 키웠겠죠.</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600281_5036.png" title="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600281_5036.png" alt="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600281_5036.png" /><br style="clear:both;" />월지의 숲에 사는 동물들</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1T11:18:17+09:00</dc:date>
</item>


<item>
<title>월지는 배를 타고 다닐 정도로 규모가 커요</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600s/78</link>
<description><![CDATA[<p>1975년 월지의 유물을 발굴할 때 연못 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나무배가 거의 완전한 모습으로 발견되었어요. 이를 통해 신라 사람들이 월지에서 뱃놀이를 즐겼던 것을 알 수 있어요.</p><p>그런데 월지에서 배를 타려면 물이 충분히 있어야겠죠. 월지의 물은 어디에서 공급될까요? 월지의 동남쪽에는 물이 흘러 들어가는 입수구가 있어요. 이곳에서 흘러들어온 물은 월지 곳곳을 지나 동북쪽에 있는 곳으로 흘러나가도록 만들었어요. 그런데 물이 그냥 흘러가는 것이 아니에요. 나무로 된 마개로 나가는 물의 양을 조절했다고 하니 연못을 관리하는 신라인의 세심함을 엿볼 수 있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600145_2881.png" title="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600145_2881.png" alt="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600145_2881.png" /><br style="clear:both;" />월지 입수부</p><div><br /></div>]]></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1T11:16:02+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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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신라의 삼국 통일 무렵 만들어진 인공연못 월지</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600s/77</link>
<description><![CDATA[<p>“폐하! 드디어 동궁 옆에 커다란 연못을 완성했습니다.”</p><p><br /></p><p>“수고하였소. 앞으로 연못 주변에 화초를 심고 진기한 새와 동물을 키우는 것이 좋겠소.”</p><p><br /></p><p>674년 문무왕 때 신라 왕궁에 연못이 만들어졌어요. 이 연못을 월지라고 해요. 월지를 만든 2년 후 신라는 한반도에서 당나라를 완전히 몰아냈지요. 문무왕은 아버지인 태종 무열왕(김춘추)의 뜻을 이어받아 삼국 통일을 완성했어요.</p><p><br /></p><p>월지는 아주 커다란 인공연못이에요. 전체적인 모습을 살펴보면 서쪽과 남쪽은 직선으로 이어지게 만들고, 북쪽과 동쪽은 바닷가의 해안선처럼 복잡하게 만들었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9878_2541.png" title="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9878_2541.png" alt="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9878_2541.png" /><br style="clear:both;" />동궁과 월지</p><p><br /></p><p>월지를 만들 때 연못 안에 3개의 섬도 함께 만들었다고 해요. 이 3개의 섬은 불로초가 자란다는 바다에 있는 삼신산을 생각하며 만들었다고 전해져요. 월지의 동쪽과 북쪽에는 산봉우리도 12개나 만들었어요. 12개의 봉우리는 신선이 산다는 중국 사천성에 있는 무산의 12봉우리를 본떠 만들었다고 해요. 이때 만든 산봉우리 중 낮은 것은 3m 정도이고 높은 것은 무려 6m나 되었어요.</p><p><br /></p><p>동궁은 신라의 태자가 머물던 곳이에요. 현재 경주에는 동궁 건물이 남아 있지 않아요. 그렇다면 동궁은 어디에 있었을까요?</p><p>1974년 월지를 발굴할 때 여러 개의 건물터를 발견했어요. 그리고 그중에 3개의 건물을 복원도 했어요. 그중 하나가 임해전인데 많은 역사학자들은 임해전이 동궁의 건물 중 하나였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9929_2875.png" title="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9929_2875.png" alt="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9929_2875.png" /><br style="clear:both;" />월지 임해전 앞의 건물터</p><p><br /></p><p>1974년 11월 월지 준설공사에서 기와와 와당 조각이 발견되었고, 이듬해인 1975년~1976년에 걸쳐 발굴조사가 이루어졌어요. 이때 진흙 바닥에서 여러 가지 유물을 찾아냈어요. 그 유물의 수는 무려 3만 점이나 되었다고 해요. 월지에서 발굴된 유물은 어떤 것이 있는지 살펴볼까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9953_2148.png" title="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9953_2148.png" alt="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9953_2148.png" /><br style="clear:both;" /> </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1T11:12:41+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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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신라의 생활을 알려주는 동궁과 월지</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600s/76</link>
<description><![CDATA[<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9637_1531.png" title="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9637_1531.png" alt="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9637_1531.png" /><br style="clear:both;" />동궁과 월지(경북 경주시)</p><p><br /></p><p>“월지는 매우 아름다운 연못이군요.”</p><p><br /></p><p>“고려에서 이곳까지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 신라는 후백제의 공격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고려의 도움이 꼭 필요합니다.”</p><p><br /></p><p>931년 신라의 경순왕이 왕건을 초대하여 잔치를 베풀었어요. 잔치가 벌어진 곳은 월지가 보이는 한 건물이었어요. 월지는 어떤 곳일까요? 또 이곳에서 발굴된 유물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1T11:07:44+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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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역사 속 작은 이야기: 남산에 있는 목이 잘린 불상</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600s/75</link>
<description><![CDATA[<p>경주 남산에는 80여 기가 넘는 불상이 남아 있어요. 그 불상 중에는 이상하게도 머리가 잘려 나간 불상이 많아요. 남산 삼릉계 석조여래좌상도 그런 불상 중 하나지요. 사람들은 목 잘린 불상을 보고 깜짝 놀라곤 했어요. 이 불상은 발견될 당시 머리는 골짜기에 떨어져 있었고, 불상 몸체와 광배(부처의 몸 주위에서 나는 빛을 부처님 몸 뒷면에 표현한 것)도 여기 저기 나뒹굴고 있었어요.</p><p><br /></p><p>이 불상 외에도 남산 여기저기에서 목 잘린 불상들이 많이 발견되었어요. 분황사 우물에서도 목이 잘린 불상이 많이 묻혀 있었어요.</p><p>도대체 왜 불상들의 목이 잘린 것일까요? 비바람에 견뎌내지 못해 목이 떨어져 나간 것일까요? 아니면 누군가 의도적으로 파괴한 것일까요? 이런 의문을 품고 자세히 살펴보니 목 부분에서 파괴된 흔적을 찾을 수 있었대요. 기록을 찾아보니, 『조선왕조실록』에 불상 목을 잘라 우물에 묻었다는 내용도 있었지요.</p><p><br /></p><p>도대체 왜 조선 시대에 그 많은 불상의 목을 자른 것일까요? 유교를 중요시해서 불상 목을 잘라버린 것일까요? 정확한 기록이 없어 그 이유는 알 수 없어요. 다만 짐작할 뿐이지요.</p><p><br /></p><p>지금도 잘려 나간 불상 머리를 찾기 위한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어요. 최근에도 불상 머리 하나가 발견되었어요. 남산 삼릉계 석조여래좌상도 목과 광배를 붙여 온전한 모습을 볼 수 있게 해 놓았어요.</p><p><br /></p><p>경주 남산을 돌아보니 왜 신라의 보물 창고라고 하는지 알겠지요? 수많은 절과 탑, 불상이 있던 이곳은 신라인들이 믿음으로 만든 부처의 나라였어요. 단단한 바위에 불상을 새기고, 무거운 돌을 지고 산에 올라 탑을 세우려면 얼마나 힘들었을까요?</p><p><br /></p><p>하지만 신라 사람들은 몸이 힘든 것보다 부처와 보살이 자신들을 지켜줄 거라는 믿음이 더 컸기에 곳곳에 많은 불상과 탑을 만들었던 것 같아요. 여러분도 부모님과 함께 경주 남산을 둘러보며 신라의 보물을 만나보세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9349_9445.png" title="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9349_9445.png" alt="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9349_9445.png" /><br style="clear:both;" />경주 남산 삼릉계 석조여래좌상</p><p>문화재청</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1T11:02:42+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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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경주 남산을 받침돌 삼아 서 있는 용장사곡 3층 석탑</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600s/74</link>
<description><![CDATA[<p>경주 남산 서쪽의 용장사가 있었던 골짜기 정상에 단정한 모습으로 서서 산 아래를 내려다보는 탑이 있어요. 바로 용장사곡 3층 석탑이지요. 통일 신라 시대 만들어진 탑으로 남산 바위 위에 세웠어요. 탑머리 장식은 모두 없어져 온전한 모습을 볼 수는 없지만, 탑의 모습은 어느 정도 추측할 수 있어요. 통일 신라 시대에 흔히 볼 수 있었던 3층 탑 구조예요. 자연적인 기단인 바위에 2층 기단을 세우고, 그 위에 탑의 몸체를 세웠어요.</p><p><br /></p><p>아래에서 보면 남산 정상에 꼿꼿하게 서 있어 마치 남산 전체를 받침돌로 삼고 있는 것 같아요. 탑의 머리는 하늘과 맞닿은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요. 신라 사람들은 하늘과 맞닿아 있는 탑을 세워 자신들의 소망을 하늘에 전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또한 탑 옆에 서서 산 아래를 내려다보면, 세상을 껴안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9205_6586.png" title="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9205_6586.png" alt="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9205_6586.png" /><br style="clear:both;" />경주 남산 용장사곡 3층 석탑</p><p>문화재청</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1T11:00:22+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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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em>
<title>7개의 불상이 조각된 칠불암 마애불상군</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600s/73</link>
<description><![CDATA[<p>경주 남산에 있는 대표적인 불상 중 하나는 바로 7개의 불상이 조각되어있는 칠불암 마애불상군이에요. 남산에는 바위에 새긴 ‘마애불’이 많은데, 하늘신과 땅의 신이 바위에 머물며 사람들을 지켜줄 거라는 믿음으로 불상을 바위 곳곳에 새겼어요. 지배층이나 왕이 나라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면, 남산 곳곳에 숨어 있는 신들이 나타나 그들을 혼내줄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p><p>칠불암은 통일 신라 시대(8세기 중엽으로 추정)에 만들어진 암자(큰절에 딸린 작은 절)로 암자 옆에 있는 바위에 새겨진 7개의 불상이 유명해요. 바위 면에 새겨놓은 세 불상과 사각의 돌기둥 각 면에 새겨놓은 네 개의 불상으로 모두 7구의 불상이 있어요.</p><p><br /></p><p>화강암에 새겨진 삼존불은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불상이에요. 가운데 본존불이 자리하고 있고 양옆에 보살이 있어요. 가운데 있는 본존불은 햇빛에 따라 느낌이 달라진다고 해요. 마치 석굴암에 있는 본존불과 비슷한 느낌을 주기도 해요. 어떤 때는 포근한 미소를 짓는 것 같고, 어떤 때는 근엄한 표정을 짓는 듯해요.</p><p><br /></p><p>사각 기둥 네 면에 불상이 새겨진 것을 사방불이라고 해요. 이런 불상은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물어요. 사방불은 사방 어디에나 부처가 있음을 뜻해요. 이 불상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눈을 지그시 감고 입을 꾹 다물고 있어요. 세상의 고통을 내가 다 알고 있으니 걱정 말라고 위로하는 느낌을 주지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9065_6102.png" title="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9065_6102.png" alt="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9065_6102.png" /><br style="clear:both;" />경주 남산 칠불암 마애불상군</p><p>문화재청</p><div><br /></div>]]></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1T10:57:58+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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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넉넉한 미소를 짓고 있는 배동 석조여래삼존입상</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600s/72</link>
<description><![CDATA[<p>경주 남산에는 햇빛 각도에 따라 인상이 바뀌는, 천진한 미소로 유명한 불상이 있어요. 바로 배동 석조여래삼존입상이지요. 아기 같은 작은 키와 얼굴로도 유명해요. 지금은 세 개의 불상이 한자리에 서 있지만 원래는 남산 기슭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고 해요.</p><p><br /></p><p>중앙에 있는 본존불이 가장 눈에 띄는데, 통통하게 살이 오른 얼굴이 푸근하고 넉넉한 느낌을 주지요. 오른손은 하늘을 향해 치켜들고 있고, 왼손은 아래로 내린 채 손바닥을 쫙 펴 내려뜨리고 있어요. 이런 손의 모습은 부처님이 중생들의 공포와 걱정을 없애주는 것을 의미한답니다.</p><p><br /></p><p>왼쪽 보살상은 긴 목걸이를 걸고, 불경과 비슷한 것을 쥐고 서 있어요. 뒤쪽에는 동그란 광배가 있지요. 무릎 아랫부분이 부러져 안타까움을 주고 있어요. 오른쪽 보살상은 꼿꼿하고 다부진 모습으로 서 있어요. 두 보살상 모두 장식이 세밀하게 묘사되었어요. 신라 사람들은 아이와 같은 미소를 짓고 있는 세 불상을 보며 세상 근심을 잠시 잊을 수 있었을 거예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8915_5352.png" title="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8915_5352.png" alt="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8915_5352.png" /><br style="clear:both;" />경주 남산 배동 석조여래삼존입상</p><p>문화재청</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1T10:55:30+09:00</dc:date>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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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신비로운 삼릉계곡 선각육존불</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600s/71</link>
<description><![CDATA[<p>경주 남산을 오르다 땀이 송골송골 맺힐 정도가 되면 만나는 불상이 있어요. 바로 커다란 바위에 새겨진 선각육존불이에요. ‘선각’이란 선으로 새겼다는 뜻이에요. 선으로 새겨진 여섯 불상을 보는 순간 저절로 ‘와!’하는 감탄사가 나오지요.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도 바위 선들이 비교적 또렷해 신비로움까지 더해줘요. 조각이 섬세하고 뛰어나 바위에 선으로 새긴 불상 중 으뜸으로 꼽히는 문화유산이에요.</p><p>앞쪽 바위에는 중앙에 석가여래불이 서 있어요. 그 불상 오른쪽과 왼쪽에는 두 보살이 불상을 향해 무릎을 꿇고 있어요. 안쪽 바위에는 중앙에 석가여래불이 어깨에만 옷을 걸치고 연꽃 의자에 앉아 있어요. 오른쪽과 왼쪽에는 목걸이를 걸고 있는 두 보살이 연꽃을 밟고 가운데 불상을 바라보고 서 있어요.</p><p><br /></p><p>바위 위에는 빗물이 흘러가도록 파 놓은 물길과 홈이 있어요. 주변에서는 깨진 기와 조각도 발견되었지요. 학자들은 불상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었던 지붕 흔적으로 보고 있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8803_4473.png" title="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8803_4473.png" alt="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8803_4473.png" /><br style="clear:both;" />경주 남산삼릉계곡 선각육존불</p><p>문화재청</p><div><br /></div>]]></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1T10:53:37+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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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경주 남산을 야외 박물관이라고 부르는 이유는?</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600s/70</link>
<description><![CDATA[<p>경주 남산은 경주시 남쪽에 있는 산이에요. 높이 500m 정도 되는 높지 않은 산으로 토함산과 함께 경주의 대표적인 산이에요. 신라 사람들은 이곳을 특별하게 여겼어요. 신라를 세운 박혁거세가 태어난 곳도, 신라 왕실의 별궁이 있던 포석정지도 경주 남산 자락에 있어요.</p><p><br /></p><p>포석정지는 신라왕들이 제사를 지내던 곳이었는데, 후삼국 시대에 신라 경애왕이 후백제의 공격으로 견훤에게 죽음을 맞게 되는 곳으로 알려져 있어요. 국력이 약했던 신라 말의 상황을 보여주는 곳이에요. 남산에는 신라 건국에서부터 신라가 역사 속에서 사라지던 순간의 유적들, 그리고 신라 사람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다양한 유적들이 곳곳에 숨어 있지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8585_6363.png" title="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8585_6363.png" alt="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8585_6363.png" /><br style="clear:both;" />경주 나정과 포석정지</p><p>문화재청</p><p><br /></p><p>남산의 유래와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어요. 옛날 서라벌(신라)에 남녀 두 신이 찾아왔어요. 두 신은 서라벌의 경치를 둘러보며 빼어난 모습에 감탄했어요.</p><p><br /></p><p>“경치가 멋지군요! 우리가 살 곳은 이곳인 듯합니다.”</p><p><br /></p><p>그때 빨래터에서 빨래를 하던 한 처녀가 이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려보니 산처럼 생긴 남녀가 가까이 오고 있었어요. 깜짝 놀란 처녀는 소리를 지르며 기절했어요.</p><p><br /></p><p>“산 봐라. 사람 살려!”</p><p><br /></p><p>그 순간 두 신은 산으로 변했대요. 이 산이 바로 경주 남산과 망산이에요. 그런데 두 신은 왜 산으로 변했을까요? ‘산 같은 사람 봐라!’ 하고 외쳐야 하는데 ‘산 봐라!’하고 외쳤기 때문이라고 전해요.</p><p><br /></p><p>이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듯 신라 사람들은 남산을 신이 변해 만들어진 신성한 곳으로 여겼어요. 이런 특별한 곳이니 왕이 나올 만하지요? 경주 남산에 모여 나랏일을 의논하면 모두 잘되었다는 기록이 전해요. 신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남산에 신령이 나타나 계시를 주었다는 기록도 전하지요.</p><p>한편, 경주 토함산에 세워진 석굴암과 불국사로 알 수 있듯 신라 사람들은 이 땅을 부처의 나라로 만들려고 했어요. 신라 제23대 법흥왕부터 제28대 진덕왕까지 불교식 왕명을 쓰고 불교식 이름을 붙였어요. 수도인 금성(경주) 곳곳에 절을 세우고, 탑을 높이 올렸지요.</p><p><br /></p><p>황룡사 9층 목탑 등 큰 규모의 탑을 세워 나라를 지키려고 했어요. 백성들에게 ‘왕이 곧 부처’라는 생각을 심어주었던 불교는 신라 왕실의 보호를 받으며 일반 백성들에게 널리 퍼져나갔어요.</p><p><br /></p><p>불교에서 세상의 중심이 되는 곳을 수미산이라고 해요. 신라 수도인 경주에 부처의 나라를 세우려고 했으니, 경주 남산은 수미산에 해당하는 곳이지요.</p><p><br /></p><p>그래서일까요? 경주 남산 곳곳에서 절과 탑, 불상을 볼 수 있어요. 지금도 남산에는 100여 곳의 절터와 80여 구의 석불이 남아 있어요. 석탑도 60여 기나 남아 있지요. 한 마디로 산 전체가 야외 박물관과 같아요. 남산 주변 마을 이름도 미륵골, 탑골, 부처골 등 불교와 관련된 이름이 많아요.</p><p><br /></p><p>지금도 경주 남산에는 불공을 드리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요. 신라 사람들도 마찬가지였겠지요? 왕이나 귀족은 물론 일반 백성들도 여러 이유로 경주 남산을 찾았을 거예요. 이웃 나라의 침입을 막고, 복된 삶을 살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처님께 빌었을 거예요. 무더운 여름에도, 눈보라가 치는 겨울에도.</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8637_265.png" title="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8637_265.png" alt="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8637_265.png" /><br style="clear:both;" />남산을 찾아 부처님께 기도하는 신라인들</p><p><br /></p><p>지금부터 신라인이 남긴 보물이 가득한 경주 남산을 돌아보며 그들의 바람이 무엇이었는지 알아볼까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8683_9501.png" title="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8683_9501.png" alt="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8683_9501.png" /><br style="clear:both;" /> </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1T10:51:31+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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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신라의 보물 창고, 경주 남산</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600s/69</link>
<description><![CDATA[<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8182_1987.png" title="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8182_1987.png" alt="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8182_1987.png" /><br style="clear:both;" />경주 남산 칠불암 마애불상군(경북 경주시)</p><p>문화재청</p><p><br /></p><p>“산 서쪽 기슭에 있는 우물인 나정에서 빛이 비치고 있소.”</p><p><br /></p><p>“말이 절하고 있는 것 같은데, 얼른 가봅시다.”</p><p><br /></p><p>어느 날 진한 땅의 여섯 마을 촌장들이 이 광경을 목격하고 서둘러 나정으로 가 보았어요. 그곳에는 커다란 자줏빛 알이 하나 있었어요. 말은 울음소리를 내며 하늘로 올라갔어요. 얼마 후 알에서 어린아이가 나왔는데, 그 아이가 바로 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예요.</p><p>박혁거세가 태어난 이곳은 어디일까요? 바로 경주 남산의 서북쪽 자락이에요. 신라의 첫 임금이 태어난 남산은 신라 사람들에게 어떤 존재였을까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1T10:43:19+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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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역사 속 작은 이야기: 미륵사를 지어달라고 무왕에게 요청한 왕비는 누구일까?</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600s/68</link>
<description><![CDATA[<p>미륵사지 석탑의 서탑을 해체·수리하던 2009년 1월, 역사학계를 크게 흥분시킨 일이 일어났어요. 미륵사지 석탑 1층 심초석(탑의 중앙 기둥을 받치는 돌) 내부에서 석탑 건립 당시 묻었던 금동제 사리외호와 금제 사리내호, 유리제 사리병, 금제 사리봉안기, 칼, 유리판 등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던 것이에요.</p><p><br /></p><p>사리장엄구는 불탑에 사리를 넣을 때 함께 넣은 용기나 공예품 등을 총칭해서 나타내는 말이에요. 그중에서도 금으로 제작된 사리봉안기에는 미륵사를 창건해 달라고 요청한 사람의 이름이 쓰여 있어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답니다.</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7980_5034.png" title="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7980_5034.png" alt="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7980_5034.png" /><br style="clear:both;" />복원 공사 중에 발견된 익산 미륵사지 석탑 사리장엄구와 금제 사리봉안기</p><p>국립문화재연구소</p><p><br /></p><p>사리봉안기가 발견되기 전까지 사람들은 『삼국유사』의 내용을 바탕으로 백제 무왕에게 시집온 신라의 선화공주가 미륵사를 지어달라고 무왕에게 요청했었다고 생각해 왔어요. 그런데, 금으로 제작된 사리봉안기에는 ‘사택적덕의 딸’이 백제 무왕의 왕비이자 미륵사를 창건해달라고 요청한 주인공이라고 적혀 있었던 것이에요.</p><p><br /></p><p>이 발견으로 인해 역사학계는 발칵 뒤집혔답니다. 지금까지 알고 있던 사실이 완전히 틀린 내용으로 판명 났기 때문이었죠. 즉, 미륵사지 석탑의 사리봉안기 발견 이후 백제 무왕의 부인이 선화공주였다는 것과 선화공주의 요청으로 미륵사가 창건되었다는 이야기가 모두 후대에 만들어진 허구였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어요. 그렇다면 『삼국유사』의 미륵사 창건 관련 기록은 정말 가공된 설화이며, 선화공주는 허구의 인물에 불과한 것일까요?</p><p><br /></p><p>아직까지 일부 학자들은 금제 사리봉안기의 내용만으로 백제 무왕과 선화공주가 부부가 아니었다고 단정적으로 이야기할 수는 없다고 보기도 해요. 즉, 미륵사는 세 개의 탑과 세 개의 금당으로 이루어진 구조를 갖추고 있는데, 서탑을 만들자고 요청한 인물이 사택 왕후라면 중앙의 목탑이나 동탑은 선화공주나 또 다른 왕후의 요청으로 만든 탑일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p><p>또 다른 사람은 사택 왕후가 선화공주 대신 자신의 이름을 사리봉안기에 남겼을 수도 있다고 주장해요. 왜냐하면 선화공주는 백제의 적국인 신라 진평왕의 딸이었던 반면, 사택 왕후는 당시 백제에서 가장 힘이 센 귀족인 사택 가문 출신이자 최고 높은 관직인 좌평으로 있던 사택적덕의 딸이었기 때문이에요. 즉, 백제 무왕에게는 처음에 미륵사를 짓자고 요청한 사람은 선화공주이지만, 그녀가 죽은 후에는 사택적덕의 딸이 왕비가 되었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p><p><br /></p><p>이처럼 유물의 발견에 따라 역사적 사실이 바뀔 수도 있고, 같은 유물을 두고 여러 해석이 나올 수도 있어요. 여러분도 방학이나 주말에 미륵사지 석탑을 보러 가서 실제 석탑의 모습과 유물을 보면서 미륵사의 주인공이 누구일지 상상해 보아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1T10:39:57+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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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경주 분황사 모전 석탑</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600s/67</link>
<description><![CDATA[<p>삼국 시대에 불교가 전래되었던 초기에는 나무로 탑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나무로 만든 목탑은 불에 타 버리기 쉬워서 점차 불에 강한 돌로 탑을 만들게 되었지요.</p><p><br /></p><p>7세기 신라 선덕 여왕 때 만들어진 경주 분황사 모전 석탑은 당시 중국에서 유행하던 벽돌탑을 모방해서 만들었어요. 진짜 벽돌은 아니고 돌을 벽돌처럼 깎아서 쌓아 올린 탑이지요. 그래서 모방한다는 뜻의 ‘모(模)’, 벽돌이라는 뜻의 ‘전(塼)’자를 넣어 탑의 이름이 붙여졌어요.</p><p><br /></p><p>경주 분황사 모전석탑은 일제강점기인 1915년에 일본인들이 해체 수리를 한 적이 있어요. 현재의 모습은 그 때의 모습대로 복원해놓은 것이랍니다. 원래는 7층으로 추정되지만, 현재는 3층만 남아 있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7793_5027.png" title="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7793_5027.png" alt="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7793_5027.png" /><br style="clear:both;" />경주 분황사 모전 석탑(경북 경주시)</p><p>문화재청</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1T10:36:43+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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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부여 정림사지 5층 석탑</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600s/66</link>
<description><![CDATA[<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7625_4557.png" title="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7625_4557.png" alt="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7625_4557.png" /><br style="clear:both;" />부여 정림사지 5층 석탑(충남 부여군)</p><p>문화재청</p><p><br /></p><p>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 군대는 사비성 한가운데에 있는 절을 점령한 뒤, 그곳에 있는 빼어난 모양의 석탑에 자신들이 백제를 멸망시켰다고 자랑하는 글을 새겼어요. 나라를 잃은 백제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얼마나 큰 슬픔과 모욕감을 느꼈을까요?</p><p><br /></p><p>당시 아시아에서 으뜸가는 문화 대국을 자부하던 당나라는, 자기네가 정복한 나라의 귀중한 문화재를 훼손하는 야만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았던 것이에요.</p><p><br /></p><p>이 탑은 소정방이 새긴 글로 인해 한때 ‘백제를 평정하고 세운 탑’이라는 뜻의 ‘평제탑’이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이 탑을 소정방이 세운 전승기념물로 알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1942년에 절터 발굴 과정에서 ‘정림사’라는 글귀가 새겨진 기와 조각이 발견되어 정림사지 5층 석탑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자신의 이름을 드디어 찾은 셈이지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7664_2198.png" title="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7664_2198.png" alt="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7664_2198.png" /><br style="clear:both;" />‘정림사(定林寺)’라는 글자가 거꾸로 새겨진 기와 조각</p><p>국립문화재연구소</p><p><br /></p><p>보통 석탑은 커다란 돌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요. 하지만 정림사지 5층 석탑은 무려 149개나 되는 돌을 이용해서 만들었답니다. 마치 목재를 짜맞추듯이 말이에요. 겉으로 보기에는 석탑 같지만, 탑을 만드는 방식은 목탑의 양식을 활용했어요. 불교가 전해진 초기에는 목탑이 많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정림사지 5층 석탑은 목탑에서 석탑으로 발전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소중한 유물이랍니다.</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1T10:34:37+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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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미륵사지 석탑</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600s/65</link>
<description><![CDATA[<p>백제 무왕 때 세워졌다고 전하는 미륵사는 현재 건물은 없고 그 터에 탑이 남아 있어요. 그래서 미륵사 터에 있는 탑이라는 뜻으로 미륵사지 탑이라고 이름이 붙여졌어요. 미륵사는 3개의 금당(불상을 모셔 놓은 건물)이 나란히 늘어서고 금당마다 탑이 하나씩 있도록 설계되었어요. 3개의 절이 모여 하나의 큰 절을 이루는 형식처럼 지어진 대규모 사찰이었지요.</p><p>또 3개의 금당(동원, 중원, 서원)은 각기 긴 회랑(건물에서 지붕이 딸린 복도)으로 구획되어 독립된 공간을 이루고 있으며, 북쪽으로는 1동의 큰 강당 터로 연결됩니다. 강당 북쪽에는 인공 물길 위에 두 개의 다리를 놓아 뒤편의 후원 지역으로 연결했어요. 다음 그림은 미륵사의 옛 모습을 상상하여 그린 것이에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7289_8979.png" title="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7289_8979.png" alt="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7289_8979.png" /><br style="clear:both;" />미륵사 상상도</p><p><br /></p><p>사실 미륵사지 석탑은 슬픈 과거가 있습니다. 이 석탑은 조선 중기인 16세기를 전후해 미륵사가 문을 닫으면서 상당 부분이 훼손된 채 방치되어 있었어요. 이후 일제 강점기에 조선 총독부는 문화재 보전에 대한 기본 지식 없이 미륵사지에 대해 날림으로 발굴 조사를 했어요. 특히 1915년 벼락에 맞아 무너져버린 서탑에 대해 옛 기록이나 건축 양식에 대해 사전에 연구하지 않은 채 성급하게 보수 공사를 하기로 결정했어요.</p><p><br /></p><p>이에 따라 무려 185t에 이르는 콘크리트를 서탑에 들이부었습니다. 콘크리트는 탄산칼슘 등의 성분으로 인해 백화현상과 풍화작용을 촉진하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어요. 일본의 졸속한 복원 공사가 오히려 문화재를 크게 훼손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p><p><br /></p><p>게다가 덕지덕지 발라놓은 콘크리트는 1000년이 넘는 역사를 간직한 미륵사지 석탑을 그저 흉측한 몰골의 돌덩어리로 둔갑 시켜 버렸어요. 사진을 통해 콘크리트를 발라 놓은 미륵사지 석탑의 옛 모습을 확인할 수 있어요.</p><p>한편, 터만 남아 있던 미륵사지 석탑의 동탑은 4년간의 공사를 거쳐 1993년 복원 완료했어요. 그런데, 이 복원 사업은 나쁜 문화재 복원 사례로 평가받고 있어요. 왜냐하면 충분한 조사를 하지 않은 채 단순히 서탑의 형태를 모방해서 만들었기 때문이죠. 동탑과 서탑이 같은 형태인지, 또 같은 층수인지에 대한 자세한 연구 없이 복원 사업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많은 비판을 받았어요.</p><p><br /></p><p>그래서 1998년에 해체·보수가 결정된 익산 미륵사지 석탑의 서탑은 동탑에서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으려고 신중하게 보수 공사를 진행했어요. 또 확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복원하지 않고, 남아 있는 돌들을 이용해 확실한 부분까지만 보수 공사를 하기로 했어요. 2000년부터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익산 미륵사지 석탑에 대한 대대적인 보수 공사를 시작해 20년 만인 2019년에 일반에 공개하게 되었어요.</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7337_9324.png" title="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7337_9324.png" alt="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7337_9324.png" /><br style="clear:both;" />미륵사지 석탑의 보수 공사 전과 후의 모습</p><p>국립문화재연구소</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1T10:31:16+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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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부처님의 무덤, 탑</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600s/64</link>
<description><![CDATA[<p>절(사찰)에 가면 부처님을 모신 건물 앞마당에 탑이 세워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어요. 절에는 왜 탑이 세워져 있을까요? 탑은 불교에서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p><p><br /></p><p>탑이라는 말은 원래 우리말이 아니라 인도에서 무덤을 의미하는 ‘스투파’에서 나왔어요. 석가모니에 의해 창시된 불교가 전파되는 과정에서 ‘스투파’가 ‘타파’라는 말이 되고, 그 말이 줄어서 ‘탑’이 된 거예요</p><p><br /></p><p>불교에서 탑은 석가모니, 즉 부처님의 몸속에서 나온 구슬 모양의 사리를 모신 불교식 무덤이에요. 인도에서는 석가모니가 태어난 곳, 진리를 깨달은 곳, 진리를 가르친 곳, 돌아가신 곳 등에 탑을 세웠어요. 그 후 불교가 중국, 우리나라, 일본 등 여러 나라로 전해지면서 탑이 함께 만들어졌어요.</p><p><br /></p><p>탑은 재료에 따라 전탑(벽돌을 쌓아 올린 탑), 석탑(돌로 만든 탑), 목탑(나무로 만든 탑)으로 나누어지는데, 전탑은 중국에서, 석탑은 우리나라에서, 목탑은 일본에서 많이 만들어졌어요. 탑이 처음 만들어질 때는 부처님의 사리를 나누어 넣었다고 해요. 하지만 부처님의 사리가 한정되어 있어서 그 이후에는 불교 경전이나 부처님의 물건처럼 부처님을 상징하는 것들을 대신 넣게 되었어요.</p><p>이처럼 탑은 부처님의 몸이 묻힌 불교식 무덤에서 부처님을 상징하는 기념물로 그 의미가 확대되었지요. 또 탑은 단순히 종교적 목적뿐만 아니라, 각 시대의 미의식과 건축 기술을 반영하는 뛰어난 예술 작품이라고 할 수 있어요.</p><p><br /></p><p>삼국은 영토를 넓히고 왕권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불교를 받아들였어요. 그렇게 해서 지방 세력을 포용하고 백성의 사상을 통합하고자 하였어요. 불교는 특히 왕실에서 적극적으로 수용하였고, 점차 백성에게 전해졌어요.</p><p><br /></p><p>불교가 전해진 뒤 삼국에서는 불교 예술이 발달하였어요. 삼국은 많은 절(사찰)과 탑을 세우고, 불상을 만들었지요. 신라 진흥왕 때 세운 황룡사와 백제 무왕 때 세운 미륵사가 대표적인 절(사찰)이지만, 현재는 터만 남아 있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6925_9752.png" title="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6925_9752.png" alt="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6925_9752.png" /><br style="clear:both;" />황룡사 목탑(상상도)</p><p><br /></p><p>절(사찰)에는 탑을 세웠는데, 초기에는 목탑을 많이 만들다가 점차 석탑을 만들었어요. 백제의 탑은 익산 미륵사지 석탑과 부여 정림사지 5층 석탑이 남아 있어요. 신라는 황룡사 9층 목탑을 세웠으나 불에 타 남아 있지 않으며, 경주 분황사 모전 석탑이 남아 있어요. 안타깝게도 고구려의 탑은 현재 남아 있는 것이 없답니다.</p><p><br /></p><p>지금부터 백제와 신라에 남아 있는 탑들의 모습과 특징을 살펴볼까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6954_9641.png" title="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6954_9641.png" alt="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6954_9641.png" /><br style="clear:both;" /> </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1T10:22:41+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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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불교가 융성했던 삼국 시대의 탑</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600s/63</link>
<description><![CDATA[<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6694_1294.png" title="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6694_1294.png" alt="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6694_1294.png" /><br style="clear:both;" />미륵사지 석탑(전북 익산시)</p><p><br /></p><p>“폐하! 이곳 연못가에 큰 절을 세워주십시오. 제 소원입니다.”</p><p><br /></p><p>“왕비의 소원을 내가 들어주리다. 여봐라! 이 연못을 흙으로 메운 뒤 큰 절을 짓도록 하여라.”</p><p><br /></p><p>전라북도 익산에 있는 미륵사는 백제 무왕이 왕비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세웠다고 전해요. 미륵사는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없지만, 동쪽과 서쪽에서 큰 석탑을 볼 수 있습니다. 두 탑은 언제 만들어졌을까요? 미륵사에 남아 있는 석탑을 비롯해 삼국 시대에 세워진 여러 탑을 살펴보겠습니다.</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1T10:18:29+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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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역사 속 작은 이야기: 황룡사의 커다란 불상 이야기</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600s/62</link>
<description><![CDATA[<p>신라는 삼국 가운데 가장 늦게 불교를 받아들였지만, 일단 불교를 받아들인 다음에는 발 빠르게 움직였어요. 흥륜사, 황룡사, 영흥사 등 대규모 사찰을 세우고 불교에 심취한 나머지 자기 나라를 ‘불국토’, 즉 부처가 사는 나라라고 생각했어요.</p><p><br /></p><p>신라의 자부심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설화가 있어요. 신라 제24대 진흥왕(재위 540～576) 때의 일이었어요. 이 무렵, 나라에서 용궁 남쪽에 궁전을 지으려고 하였어요. 그런데 그 터에서 갑자기 황룡이 나타났어요. 그 일로 궁궐 대신 절을 짓게 되었고 절의 이름을 ‘황룡사’로 지었지요.</p><p><br /></p><p>황룡사를 모두 지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남쪽 바다에 큰 배 한 척이 나타났어요. 나라에서 그 배를 조사해 보니 편지가 있었어요.</p><p><br /></p><p>“인도의 아육왕(인도의 아소카왕으로 불교를 크게 융성시켰다)이 매우 많은 양의 황철과 황금을 가지고 불상을 만들려고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배에 실어 바다에 띄워 보냅니다. 원컨대 이 배가 멈추는 곳에 장륙의 불상을 이룩하여 모시도록 하십시오. 아울러 이 배에 불상 하나와 보살상 두 개를 함께 실었습니다.”</p><p>신하에게 이 소식을 듣게 된 국왕은 배가 도착한 지방(하곡현)에 ‘동축사’라는 절을 짓게 하고 배에 실렸던 불상과 보살상을 법당에 모셨어요. 또 함께 실려 있던 철과 황금으로 커다란 불상을 만들기 시작해 얼마 후에 완성했어요. 그리고 그때 새로 만든 불상은 황룡사에 모셨어요. 그리고 이듬해의 일이었어요.</p><p><br /></p><p>장륙불상(크기가 매우 큰 불상)이 갑자기 눈물을 흘리기 시작해 바닥을 1척이나 적셨어요.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는 왕이 세상을 떠날 징조라고 여겼지요.</p><p><br /></p><p>한편 황룡사의 불상에는 또 다른 기록도 전해지고 있어요. 인도의 아육왕이 지극한 마음으로 부처님을 받들려고 불상을 세 번이나 만들었지만 모두 실패했어요. 더구나 아육왕의 태자는 불상 만드는 일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어요. 이에 아육왕이 못마땅하여 물었어요.</p><p><br /></p><p>“태자는 왜 불상 짓는 일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이냐?”</p><p><br /></p><p>태자가 대답하였어요.</p><p><br /></p><p>“폐하, 그건 혼자의 힘으로 만들 수 없습니다. 저는 일찍이 그 사실을 알았지만 일부러 모른 체했던 것입니다.”</p><p>아육왕은 이때 느낀 바가 있어서 불상을 만들 수많은 황철과 황금을 배에 싣고 바다로 띄워 보냈던 것이에요. 그 뒤 배는 바다를 끼고 있는 수많은 나라에 도착했지만 어떤 나라에서도 불상을 만들지 못했어요. 그에 따라 마지막으로 신라에 도착했는데 마침내 진흥왕이 그 일을 마칠 수 있었어요.</p><p><br /></p><p>한편 그 소식을 듣게 된 아육왕은 비로소 근심을 떨쳐 냈다고 전하고 있어요.</p><p><br /></p><p>삼국 시대의 다양한 불상을 잘 만나 보았나요? 이제 불상이 낯설지 않을 거예요. 불상을 통해 우린 당시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엿볼 수 있어요. 앞으로 불상을 만나면 더 친하게 볼 수 있겠지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1T10:16:04+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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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불상의 명칭과 구조</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600s/61</link>
<description><![CDATA[<p>불상에는 부처의 초인간적인 속성을 나타내기 위한 장치가 몇 가지 있어요. 불상 뒤에는 부처의 진리와 지혜의 무한한 빛을 상징하는 ‘광배’를 두고 있어요. 머리 위에는 신비로운 혹인 ‘육계’를 두고, 머리카락은 소라처럼 말려진 ‘나발’ 모양이며, 귀는 길고 두 눈썹 사이에는 지혜의 빛을 내보내 온 누리를 밝혔다는 ‘백호(하얀 털)’가 나 있지요.</p><p><br /></p><p>불상은 보살상‧천왕상 등과 달리 부속물이나 장식이 없는 단순한 수행자 복장을 함으로써 세속을 초월한 지고함을 보여주지요.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에는 우주를 상징하는 연꽃을 새겨요. 연꽃 위의 부처는 세계의 정신적인 통치자이자 절대자를 상징하지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6445_5545.png" title="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6445_5545.png" alt="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6445_5545.png" /><br style="clear:both;" />불상의 명칭</p><p>경주 남산 삼릉곡 석조약사여래좌상(국립중앙박물관)</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1T10:14:18+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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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무엇을 생각하는 불상의 모습일까요?</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600s/60</link>
<description><![CDATA[<p>삼국 시대의 불상 중에는 특히 금동으로 만든 반가사유 보살상이 많이 만들어졌어요. ‘반가’는 반만 책상다리를 한 모습으로 걸터앉아서 한쪽 다리를 다른 쪽 다리 위에 올린 자세를 가리켜 말해요. ‘사유상’은 생각하는 모습을 새긴 조각상이라는 뜻이에요. 즉 반가사유상이란 반가좌 형태로 앉아 오른손을 뺨에 살짝 대고 사색하는 자세의 보살상을 말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6285_545.png" title="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6285_545.png" alt="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6285_545.png" /><br style="clear:both;" />금동 미륵 보살 반가사유상(국보 제78호와 국보 제83호)</p><p>문화재청</p><p><br /></p><p>삼국 시대에 만들어진 금동 미륵보살 반가 사유상은 우리 조상들의 뛰어난 조각 솜씨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유명하지요. 국보 제78호인 금동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은 부처가 한쪽 다리를 다른 쪽 다리에 걸치고 앉아 손으로 턱을 괸 자세로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이에요. 가냘픈 몸매에 살아 움직일 듯한 자태, 얼굴에 띤 자비로운 미소를 짓고 있지요. 삼국 시대 사람들의 예술 감각이 가장 잘 드러나는 작품이라 할 수 있어요.</p><p><br /></p><p>국보 제83호인 금동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은 높이가 93.5㎝로 국보 제78호인 금동 미륵보살 반가사유상과 함께 국내에서는 가장 큰 금동 반가사유상이에요. 머리에 3면이 둥근 산 모양의 관을 쓰고 있어서 ‘삼산관 반가사유상’으로도 불리고 있지요.</p><p><br /></p><p>단순하면서도 균형 잡힌 신체 표현과 자연스러우면서도 입체적으로 처리된 옷 주름, 분명하게 조각된 눈·코·입의 표현이 정교하게 다듬어져 있어요. 삼국 시대 사람들의 뛰어난 조각 기술을 보여주고 있지요. 또 잔잔한 미소에서 느껴지는 자비로운 모습은 아름다운 예술 작품으로 손꼽히고 있지요.</p><p><br /></p><p>특히 국보 제83호의 금동 미륵보살 반가사유상과는 거의 같은 형태의 목조 반가 사유상이 일본 고류사에 있어요. 삼국 시대에 제작된 반가사유 보살상은 일본에 큰 영향을 주었지요.</p><div><br /></div>]]></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1T10:11:44+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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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불상의 모습은 왜 이렇게 다양할까요?</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600s/59</link>
<description><![CDATA[<p>부처는 깨달은 사람을 말해요. 석가모니뿐 아니라 그 이전과 이후에도 깨달은 이들을 모두 부처라 하지요. 그래서 부처 중에는 석가모니불만 있는 것이 아니에요. 미륵불, 아미타불, 약사불, 비로자나불 등 많은 부처가 있어요. 삼국에 들어온 대승 불교 때문이지요.</p><p><br /></p><p>또 불교에서는 부처님 말고도 보살이나 여러 수호신을 믿고 받들었어요. 보살은 부처가 될 수 있는 충분한 자격을 갖추면서도 중생(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생물들)을 깨우치기 위해 부처가 되기를 미룬 존재예요. 보살은 자신의 깨달음보다 중생 구제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존재들이었지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6141_1206.png" title="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6141_1206.png" alt="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6141_1206.png" /><br style="clear:both;" />경주 감산사 석조 미륵보살 입상과 경주 감산사 석조 아미타여래 입상</p><p>문화재청</p><p><br /></p><p>대승 불교에서는 이 세상에 많은 부처가 있듯이 또한 많은 보살이 시공을 초월하여 존재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보살은 인간과 더 가까운 존재로 여겨져 부처님 다음으로 예배의 대상이었지요. 그리하여 삼국 시대 사람들은 우리가 보듯 수많은 종류의 불상을 만들게 된 것이지요.</p><p>보살상과 불상의 차이는 거의 보살만이 머리에 관을 쓴다는 데에 있어요. 보살상은 화려한 옷에 머리 장식, 구슬 장식 등을 하고 있어서 아무 장식도 없는 간결한 옷차림의 불상과 금방 구별되지요. 또 보살상은 손에 연꽃이나 병, 구슬 따위를 들고 있는 경우가 많아요.</p><p><br /></p><p>삼국 시대에는 세 나라 사이의 전쟁이 치열하던 때라 특히 미륵보살이 큰 인기를 끌었어요. 미륵보살은 천상의 도솔천에 계시면서 먼 훗날 인간 세상에 내려와 사람들을 구원한다는 보살이에요. 한시라도 빨리 내려와 고통에 빠진 사람들을 구원해주길 바란 거죠.</p><p><br /></p><p>8세기에는 무량수불로도 불리는 아미타불의 시대가 열렸어요. 아미타불은 극락세계에서 사람들을 가르친다는 부처님이에요. 이 무렵 유행하기 시작한 ‘정토 신앙’에서는 보통 사람도 서방 극락정토에 있는 아미타불과 그의 조수인 관음보살만 열심히 외면 극락에 갈 수 있다고 했어요. 바야흐로 신라의 방방곡곡은 ‘나무아미타불(아미타불에 귀의합니다)’이라는 기도로 가득 차기 시작했지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1T10:09:13+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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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em>
<title>신라 문화 전성기를 담은 신라의 불상</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600s/58</link>
<description><![CDATA[<p>신라의 국력은 불교의 발전과 더불어 상승하였어요. 신라의 국격이 높아지면서 불상을 만드는 솜씨 역시 더욱 발전하였어요. 신라의 대표적 불상으로 보물 제63호인 경주 배동 석조 여래 삼존 입상이 있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6000_3329.png" title="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6000_3329.png" alt="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6000_3329.png" /><br style="clear:both;" />경주 배동 석조 여래 삼존 입상(경북 경주시)</p><p>문화재청</p><p><br /></p><p>경주 배동 석조 여래 삼존 입상은 원래는 경주 남산 기슭에 흩어져 있었는데 1923년 지금의 자리(경북 경주시 내남면 용장리)에 모아 세웠어요. 이 불상도 돌로 만든 세 분의 부처님이 서 있는 모습이라는 뜻에서 석조 여래 삼존 입상이라 이름 붙였어요.</p><p><br /></p><p>이 불상 가운데 본존불은 머리에 상투 모양의 머리가 있는데, 특이하게 이중으로 되어 있어요. 눈두덩과 양쪽 뺨을 부풀린 어린아이 같은 표정이 온화하고 자비로운 부처님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어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1T10:06:54+09:00</dc:date>
</item>


<item>
<title>백제 사람들의 미소를 담은 백제 불상</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600s/57</link>
<description><![CDATA[<p>백제는 불교를 받아들인 후 많은 불상을 만들었어요. 그 가운데 백제를 대표하는 불상으로 국보 제84호인 서산 용현리 마애 여래 삼존상이 있어요. 서산 용현리 마애 여래 삼존상은 백제가 중국과 왕래하던 교통로 상에 있는 충청남도 서산의 한 골짜기 바위 면에 새겨진 불상이에요. 이와 같이 깎아지른 절벽을 그대로 재료로 삼아 불상을 조각했기에 ‘마애’라 이름 붙였어요. ‘여래’란 부처님을 높이는 말이에요.</p><p><br /></p><p>불상은 혼자 있기도 하지만 서산 용현리 마애 여래 삼존상처럼 양쪽 옆에 불상을 하나씩 끼고 있을 때가 많아요. 엄밀하게 따지면 부처님을 조각한 불상이 아니라 보살을 조각한 보살상이에요.</p><p><br /></p><p>불교에서 받들어 모셔야 할 세 분의 존귀한 사람 즉 부처와 양옆에 두 보살이 나란히 있는 불상을 ‘삼존불’이라고 해요. 삼존불 속의 보살은 부처를 도와 중생을 구제하는 역할을 하지요. 삼국 시대 불상 중에는 삼존 형식의 불상이 많았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5856_1568.png" title="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5856_1568.png" alt="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5856_1568.png" /><br style="clear:both;" />서산 용현리 마애 여래 삼존상</p><p>문화재청</p><p><br /></p><p>서산 용현리 마애 여래 삼존상은 전체적으로 부드럽고 넉넉한 분위기를 풍겨요. 특히 가운데 본존불의 미소는 웃는 듯 마는 듯 온화한 웃음으로 유명해요. 그래서 이를 ‘백제의 미소’라고 불러요. 이 미소는 햇빛이 비치는 각도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고 해요. 마치 자기들 얼굴 모습을 부처님의 미소로 담고 싶어 했던 백제 사람들의 마음이 보이는 듯하지요.</p><p><br /></p><p>서산 용현리 마애 여래 삼존상을 보면 백제 장인들이 돌을 다루는 솜씨가 얼마나 뛰어난지 알 수 있어요. 또한, 백제 사람들의 불교 신앙과 예술 정신을 엿볼 수 있지요.</p><p><br /></p><p>이 밖에도 백제에는 많은 불상이 있어요. 국보 제128호인 금동 관음보살 입상은 공주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높이 15.2㎝의 자그마한 보살상으로 백제의 불상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어요. 머리에는 꽃무늬로 장식한 반원 모양의 관을 썼고 그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높이 표현되어 있으며, 얼굴은 미소가 없어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지요.</p><p><br /></p><p>국보 제134호인 금동 보살 삼존 입상은 하나의 광배에 삼존상을 배치한 형식으로, 보살상을 중심에 두고 양옆에 나한상을 배치한 독특한 작품이에요.</p><p>국보 제247호인 공주 의당 금동 보살 입상은 1974년 충청남도 공주시 의당면 송정리의 한 절터에서 출토된 보살상이에요. 머리에는 삼면보관을 쓰고 있는데, 가운데에 작은 부처가 표현되어 있어 관음보살을 형상화한 것으로 알려져 있어요.</p><p><br /></p><p>국보 제293호인 부여 규암리 금동 관음보살 입상은 그 높이가 21.1㎝로 1907년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의 절터에서 발견되었어요. 머리에는 작은 부처가 새겨진 관을 쓰고 있으며, 크고 둥근 얼굴에는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어요. 보살이 서 있는 대좌는 2중의 둥근 받침에 연꽃무늬가 새겨진 형태로 소박한 느낌을 주고 있지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1T10:04:52+09:00</dc:date>
</item>


<item>
<title>부처님 나라의 소망이 담긴 고구려의 불상</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600s/56</link>
<description><![CDATA[<p>고구려의 대표적 불상으로 국보 제119호인 ‘금동 연가 7년명 여래 입상’이 있어요. 높이가 16.2cm로 매우 작은 불상이에요. ‘금동’은 청동에 얇게 금을 입혀 만든 것을 말해요.</p><p><br /></p><p>그런데 왜 불상에 금을 입혔을까요? 금은 매우 귀한 금속이에요. 부처를 보통 사람과 다른 귀한 모습으로 표현한 것이에요. 이 불상 뒷면에는 ‘연가 7년’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어요.</p><p>여기서 ‘연가’는 고구려가 쓰던 연호에요. 그래서 이 불상의 이름에 ‘연가 7년명(銘)’이 붙었어요. ‘연가 7년명’은 ‘연가 7년이 새겨진’이라는 의미에요. 여래는 부처님을, 입상은 서 있는 모습을 말해요. 이대로 이름을 풀이해 보면 연가 7년이 새겨진 금동으로 만든 부처님의 서 있는 모습의 조각상이라 할 수 있지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5652_8482.png" title="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5652_8482.png" alt="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5652_8482.png" /><br style="clear:both;" />금동 연가 7년명 여래 입상의 앞면과 뒷면</p><p>문화재청</p><p>금동 연가 7년명 여래 입상은 뒷면에 새겨진 글 때문에 사람들이 여러 가지 사실들을 알 수 있었어요. ‘연가 7년’이란 글자로 이 불상이 신라의 영토인 경상남도 의령에서 발견되었지만, 고구려에서 만들었음을 알 수 있지요. 또한 6세기에 고구려의 힘이 신라에까지 미쳤음을 알 수 있지요.</p><p><br /></p><p>또 ‘1,000개의 불상 중 29번째’라고 적혀 있어 이 불상이 평양 동사라는 절의 승려 등 40명이 세상에 널리 퍼뜨리고자 만든 1,000개의 불상 가운데 29번째 불상임을 알 수 있어요.</p><p><br /></p><p>이 밖에 고구려 불상으로 ‘금동 신묘명 삼존불 입상’이 있어요. 부처님의 빛을 상징하는 광배 하나에 본존불과 좌우보살상이 조각된 삼존불의 형식이에요. 광배 뒷면에는 다섯 사람이 모여 그들의 스승과 부모를 위해 이 불상을 만들었다는 글이 새겨져 있어요.</p><p><br /></p><p>고구려 사람들은 불상에 글자를 새겨 간절한 소망을 담았어요. 불상을 1,000개 만들어 온 세상이 부처님 나라가 되기를 말이지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1T10:01:13+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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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불상, 소망을 담아 부처님을 새기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600s/55</link>
<description><![CDATA[<p>불상은 ‘부처의 상’을 뜻해요. 그런데 불교가 처음 일어났을 때는 불상을 만들지 않았어요. 부처님과 같이 뛰어난 존재를 인간의 손으로 표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부처님의 유골을 담은 탑에 예배를 드렸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5470_3467.png" title="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5470_3467.png" alt="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5470_3467.png" /><br style="clear:both;" /> </p><p>그러나 무엇보다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신앙의 대상은 부처님이었어요. 결국 인도에서는 불상을 만들었어요. 삼국 시대 사람들도 점차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 부처님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조각상으로 만들어 표현하였어요. 이렇게 불상은 탑과 함께 불교 신앙의 중심이 되었어요.</p><p><br /></p><p>불교 전래의 초기에는 대체로 중국식 불상 양식을 모방하거나 그 영향을 크게 받았어요. 그러나 곧이어 삼국 시대에는 우리나라의 독자적인 불상을 만들기 시작하였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5494_7064.png" title="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5494_7064.png" alt="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5494_7064.png" /><br style="clear:both;" /> </p><div><br /></div>]]></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1T09:58:25+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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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고구려‧백제‧신라, 삼국 모두 불교를 받아들이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600s/54</link>
<description><![CDATA[<p>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은 모두 불교를 받아들여 나라의 종교로 삼았어요. 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종교에요. 인도에서 일어난 불교는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와 일본으로 전해졌지요. 삼국은 불교의 어떤 점이 좋아서 불교를 받아들였을까요?</p><p><br /></p><p>당시 고구려‧백제‧신라 세 나라는 서로 세력을 다투고 있었어요. 잦은 전쟁 속에 삼국 시대 사람들은 삶의 불안을 많이 느꼈지요. 이때 인간사의 고통을 초월하게 해준다는 불교의 가르침은 많은 사람에게 위안을 주었어요.</p><p><br /></p><p>또 한편으로 불교는 고대 아시아 세계에서 단순한 종교가 아니라 보편적이고 수준 높은 문화 체계였어요. 어떤 나라가 불교를 받아들였다는 것은 그 나라가 당시 국제적으로 요구되는 문화 수준에 도달했다는 징표였어요.</p><p>삼국의 왕들은 중국의 발달한 문물을 받아들여 나라를 강하게 키우고 싶어 했지요. 중국의 발달한 문물 중에는 불교도 있었지요. 불교를 받아들이기 전의 삼국은 아직 나라다운 틀을 갖추고 있지 못했어요. 삼국의 왕들은 불교를 받아들여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뭉치게 하고 싶어 했어요. 더불어 백성들이 부처님을 섬기듯 자신을 섬기게 하려는 뜻도 있었지요.</p><p><br /></p><p>가장 먼저 불교를 받아들인 나라는 중국과 직접 국경을 맞대고 있던 고구려였어요. 당시 소수림왕은 위축되어있는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어요. 그래서 불교를 받아들이는 데에도 적극적이었지요.</p><p><br /></p><p>소수림왕(재위 371～384)은 372년 중국 전진에서 순도라는 스님이 불경과 불상을 가지고 오자 그를 높이 받들었어요. 나중에는 절을 지어 머물게 하면서 온 나라에 불교를 퍼뜨리게 했지요.</p><p><br /></p><p>곧이어 백제에도 침류왕(재위 384～385) 때인 384년에 중국 동진에서 마라난타라는 스님이 불경을 가지고 왔어요. 마라난타는 인도 사람이니 매우 먼 길을 온 거지요. 백제의 침류왕은 마라난타를 귀한 손님으로 대접하고 이듬해에는 도읍에 절을 세워 머물게 했어요. 이때부터 백제 사람들에게 불교가 널리 퍼지기 시작했어요.</p><p>신라는 한반도 동남쪽에 치우쳐 있어서 고구려를 통해 불교가 전해졌어요. 하지만 신라는 고구려나 백제보다 발전이 늦었기 때문에 신라의 왕들은 불교를 받아들이는 데 관심이 적었어요.</p><p><br /></p><p>신라는 법흥왕(재위 514～540) 때인 527년에야 정식으로 불교를 받아들였어요. 그런데 신라가 불교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고구려나 백제와 달리 귀족 세력의 반발이 매우 심했어요. 부족마다 예부터 믿어 오던 신앙을 버릴 수 없다며 강력하게 반대했기 때문이지요. 그러다 이차돈의 희생을 계기로 어렵사리 불교를 공인하게 되었지요.</p><p><br /></p><p>삼국은 부처님의 말씀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모으려고 했지요. 그런 마음으로 절을 짓고, 종을 만들고, 탑을 세웠으며, 경전을 인쇄하여 부처님의 말씀을 널리 알렸지요. 이렇게 삼국은 불교를 받아들여 나라의 종교로 삼아 연맹 왕국에서 고대 국가로 발돋움하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했지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1T09:42:43+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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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em>
<title>삼국 시대 사람들의 소망을 새긴 불상</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600s/53</link>
<description><![CDATA[<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4429_8412.png" title="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4429_8412.png" alt="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4429_8412.png" /><br style="clear:both;"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충남 서산시)</p><p>문화재청</p><p><br /></p><p>“자네 아침 일찍 어딜 다녀오나?”</p><p><br /></p><p>“응. 절에 다녀오네. 신통하다고 소문난 관세음보살상께 온 마음을 다해 우리 자식을 지켜달라고 기도하고 왔다네.”</p><p><br /></p><p>고구려‧백제‧신라는 모두 불교를 믿었어요. 삼국 사람들은 일상생활 속에서 절에 가고 불상 앞에서 기도하였지요. 삼국 시대 불상의 모습은 어떠했을까요? 서로 달랐을까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1T09:40:47+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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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역사 속 작은 이야기: 향로는 왜 만들어졌을까요?</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600s/52</link>
<description><![CDATA[<p>향로는 향을 피울 때 사용하는 물건을 말해요. 절에서 의식을 거행하거나, 제사를 지낼 때 향을 피우지요. 인도에서 좋지 않은 냄새를 없애고, 실내의 습기를 없애기 위해 향을 피우기 시작했다고 해요. 불교가 탄생하면서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물 중 하나가 되었지요.</p><p><br /></p><p>그러면서 향을 피우는 의식이 단순히 냄새와 습기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깨끗이 하고, 자신을 태워 다른 사람을 구하는 의미로 쓰이기도 했어요. 유교에서도 제사를 지낼 때 죽은 사람의 혼을 불러드리기 위해 향을 피웠지요.</p><p><br /></p><p>중국에서는 불교가 전해지기 전부터 향로를 사용했어요. 한나라 때 만든 박산향로가 그 증거죠. 하지만 본격적으로 향로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불교가 전해지면서부터예요. 박산향로는 신선들이 살았다고 전하는 산인 중국의 박산 모양을 본떠 만든 향로예요.</p><p>우리나라에서는 삼국 시대에 향로를 제작하고 사용했던 증거들이 발견되었어요. 벽화에 향로의 모습이 등장하기도 하지요. 백제 금동 대향로는 이 사실을 분명하게 알려주고 있어요.</p><p><br /></p><p>우리나라에서는 시대마다 다양한 향로가 만들어졌어요. 삼국 시대와 남북국 시대에는 주로 흙으로 만든 향로를 사용했어요. 청동 향로도 만들었고요. 고려 시대에는 청자나 청동으로 만들었고요. 조선 시대에는 백자와 유기로 만든 향로가 널리 사용되었어요. 아주 오래전부터 사용된 향로가 지금까지 사용되는 걸 보면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것이 있음을 알 수 있지요.</p><p><br /></p><p>백제 금동 대향로에 대해 배우고 나니 왜 이 향로를 백제 문화의 꽃이라고 부르는지 알게 되었지요? 백제 장인들이 온 정성을 담아 만들어낸 백제 금동 대향로를 보고 있으면 향로 속에 새겨진 악사들이 연주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할 거예요. 또 각종 동물들이 평화롭게 뛰어노는 모습이 눈앞에 펼쳐지는 듯할 거예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4268_6535.png" title="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4268_6535.png" alt="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4268_6535.png" /><br style="clear:both;" />박산향로(낙랑)와 청자투각칠보무늬향로(고려)</p><p>국립중앙박물관</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1T09:38:05+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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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백제 금동 대향로 속에 새겨진 코끼리와 원숭이</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600s/51</link>
<description><![CDATA[<p>백제 금동 대향로에 등장하는 동물 중 당시 한반도에서는 볼 수 없었던 동물이 있어요. 바로 원숭이, 악어, 코끼리지요. 백제 사람들은 본 적이 없었던 동물들을 어떻게 백제 금동 대향로에 조각해 놓을 수 있었을까요?</p><p><br /></p><p>백제는 바다를 통해 중국, 일본과 활발한 교류를 하며 해상왕국으로 불렸던 나라에요. 기록에 나와 있지는 않지만, 중국을 넘어 코끼리와 원숭이가 사는 인도나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와 교류를 했던 것으로 보여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4132_2707.png" title="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4132_2707.png" alt="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4132_2707.png" /><br style="clear:both;" />백제 금동 대향로에 새겨진 꼬끼리, 악어, 원숭이</p><p>국립부여박물관</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1T09:35:43+09:00</dc:date>
</item>


<item>
<title>다양한 이야기가 담겨 있는 백제 금동 대향로</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600s/50</link>
<description><![CDATA[<p>백제 금동 대향로는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어요. 받침, 몸체, 뚜껑, 그리고 맨 위 봉황으로 이어졌어요.</p><p>받침은 용이 몸체를 받치고 있어요. 앞발을 치켜들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듯한 모습이죠. 마치 용이 살아 꿈틀거리는 듯한 모습은 생동감을 느끼게 해주지요. 용의 세 발은 삼각형 모양으로 바닥을 딛고 있어요. 앞발은 치켜세워 향로가 균형감을 갖추도록 표현했어요. 용의 꼬리는 물결이 일렁이는 것처럼 표현되어 있어 물을 상징하는 용을 강조하고 있어요.</p><p><br /></p><p>몸체는 연꽃 봉우리가 막 피어난 모습이에요. 진흙 속에서 피어나는 연꽃은 불교를 상징하는 꽃이지요. 연꽃잎에서는 주로 물과 관련된 생물들을 볼 수 있어요. 신선 두 사람과 날개 달린 물고기를 비롯한 상상 속의 동물 27마리가 새겨져 있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3984_172.png" title="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3984_172.png" alt="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3984_172.png" /><br style="clear:both;" />백제 금동 대향로의 세부 ①받침, ②몸체, ③뚜껑, ④손잡이</p><p>문화재청</p><p><br /></p><p>뚜껑에는 74개의 산봉우리가 첩첩이 겹쳐져 솟아있고, 악기를 연주하는 5명의 악사와 17명의 신선, 그리고 호랑이, 사슴, 코끼리, 원숭이 등 39마리의 다양한 동물들이 새겨져 있어요.</p><p>산 사이로 작은 길도 나있고, 시냇물도 흐르죠. 신선들이 낚시하는 호수도, 폭포수가 흐르는 모습도 있어요. 아기자기하게 펼쳐진 이곳은 마치 신선들이 사는 세상 같아요. 5명의 악사는 각각 완함(비파), 적(피리), 소(관), 백제금(현·거문고), 고(북)를 연주하고 있어요.</p><p><br /></p><p>뚜껑 맨 끝에는 봉황이 앉아 있어요. 봉황은 어진 임금이 나라를 잘 다스리는 태평성대에 나타난다는 새로, 신성하게 여겨지는 동물이지요. 그런 봉황이 여의주를 턱 밑에 끼고, 꼬리를 곧게 치켜올리고 날개를 활짝 펴 날아오를 듯한 기세를 하고 있어요.</p><p><br /></p><p>뚜껑 윗부분에 10개의 구멍과 봉황의 가슴에 2개의 구멍이 뚫려 있어요. 이 구멍을 통해 향이 피어오르면 신비스러운 느낌마저 들지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1T09:33:20+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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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em>
<title>백제 금동 대향로를 땅 속에 묻은 이유는?</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600s/49</link>
<description><![CDATA[<p>백제 금동 대향로는 1,500여 년 전에 만들어졌다고 해요. 그렇게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도 어떻게 녹슬지도 않고, 원래 모습 그대로 있었을까요?</p><p><br /></p><p>그것은 바로 진흙 속에 묻혀 있었기 때문이지요. 진흙 때문에 공기가 잘 통하지 않아 형태가 변하지 않았던 거예요. 백제 금동 대향로 주변에서는 나무 곽과 천 조각이 발견되었는데, 아마도 천으로 향로를 싸서 나무 곽 속에 넣어 땅속에 묻었던 것 같아요.</p><p><br /></p><p>그런데 누가, 왜 이곳 능산리 절터에 백제 금동 대향로를 묻었던 것일까요? 혹시 백제의 멸망과 관련 있는 것은 아닐까요?</p><p><br /></p><p>사비에서 부흥을 꾀한 성왕은 고구려에 빼앗긴 한강 유역을 다시 찾을 궁리를 하기 시작했어요. 신라 진흥왕과 군사 동맹을 맺어 고구려로부터 한강 유역을 빼앗았어요. 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 백제는 신라 진흥왕으로부터 배신을 당하고 말았어요. 진흥왕은 한강 상류 지역을 차지하고 난 뒤 군사를 이끌고 백제를 공격해 한강 하류마저 점령해 버렸지요.</p><p>그러자 백제는 신라와 전투를 벌였어요. 어제의 동지가 오늘은 적이 되어 전투를 치르게 된 거지요. 성왕의 태자 여창(훗날 위덕왕)이 3만의 대군을 이끌고 관산성으로 나가 신라군과 전투를 벌였어요. 처음에는 백제가 승리하는 듯했지만 이내 신라에 유리한 상황이 되었지요.</p><p><br /></p><p>성왕은 신라군과 힘들게 싸우고 있는 태자를 위로하고자 5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관산성으로 향했어요. 하지만 관산성으로 가던 길에 성왕은 숨어 있던 신라군의 공격을 받고 사로잡혀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어요.</p><p><br /></p><p>이후 성왕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위덕왕이 관산성 전투에서 안타깝게 목숨을 잃은 아버지 성왕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능산리에 절을 세웠던 것 같아요.</p><p><br /></p><p>이 능산리 절터에서는 창왕(위덕왕)이 만들고, 성왕의 딸이 사리를 공양했다는 글이 새겨진 사리 보관 용기(창왕명 석조사리감)가 발견되기도 했어요. 백제 금동 대향로가 발견된 그 절터이지요. 백제 금동 대향로도 성왕의 제사 때 향을 피우기 위해 절 공방에서 만든 것으로 보여요.</p><p>그렇다면 백제 금동 대향로를 목곽 안에 넣어 공방 터에 묻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백제가 멸망할 즈음 스님들이 귀중한 향로가 적들에 의해 훼손될까봐 땅에 묻은 것으로 추측하고 있어요. 여러분은 백제의 멸망이 스님들에게는 얼마나 갑작스럽고 당황스러운 일이었는지 짐작이 되나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3791_106.png" title="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3791_106.png" alt="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3791_106.png" /><br style="clear:both;" />백제 금동 대향로를 만드는 모습</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1T09:30:06+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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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뛰어난 공예 기술로 만들어진 백제 금동 대향로</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600s/48</link>
<description><![CDATA[<p>한강 유역에서 건국된 백제는 4세기 근초고왕 때 전성기를 누리며 발전했어요. 하지만 백제는 5세기에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을 받아 수도인 한성을 빼앗기고, 문주왕 때 웅진(지금의 공주)으로 수도를 옮겼어요. 무령왕 때에는 지방에 왕족을 보내 지방 세력을 통제하는 등 왕권을 강화하며 백제를 안정시켰지요.</p><p><br /></p><p>무령왕에 이어 성왕이 왕위에 올랐어요. 그는 다시 백제의 수도를 옮겼어요. 좁은 웅진에서 벗어나 넓은 벌판이 펼쳐진 사비(지금의 부여)로 수도를 옮기고 부흥을 꿈꾸었어요.</p><p><br /></p><p>백제는 사비로 수도를 옮긴 후 국가 체제를 정비하고 더욱 발전해 나갔어요. 문화도 활짝 꽃피었지요. 이런 백제 문화의 모습을 보여주는 작품이 바로 백제 금동 대향로예요.</p><p><br /></p><p>백제 금동 대향로는 불교와 유교, 도교 사상이 드러난 공예품으로 백제인들이 꿈꾸던 이상 세계가 표현되어 있어요. 높이는 61.8cm이고, 무게는 11.85kg나 돼요. 중국이나 주변 국가에서 발견된 향로가 보통 20cm 정도인데, 그것의 3배나 되는 대형 향로지요.</p><p>중국 한나라 때 유행한 박산향로의 영향을 받은 면이 있지만, 백제만의 독창적인 기술이 아니었다면 탄생하지 못했을 거예요. 과학 기술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이와 똑같은 향로를 만들기 어렵다고 하니, 백제인들의 공예 기술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짐작할 수 있어요.</p><p><br /></p><p>향로는 뚜껑, 몸체, 받침 부분을 각각 따로 만들어 이어 붙이고, 겉에는 금을 입혔어요. 무엇보다 특별한 것은 수많은 사람과 동물, 산봉우리 등을 붙여 만든 것이 아니라 틀을 만들어 거푸집 같은 곳에 쇳물을 부어 만들었다는 점이에요. 정교하고 섬세한 모습을 조각해 붙여넣지 않고, 한 덩어리로 만들었다는 것은 당시 백제 기술이 그만큼 뛰어났음을 이야기해 주고 있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3623_8702.png" title="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3623_8702.png" alt="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3623_8702.png" /><br style="clear:both;" />정교함을 엿볼 수 있는 몸체의 모습</p><p>국립부여박물관</p><div><br /></div>]]></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1T09:27:25+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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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백제 금동 대향로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600s/47</link>
<description><![CDATA[<p>이 문화유산이 바로 국보 제287호인 백제 금동 대향로예요. 백제 금동 대향로는 부여 능산리 고분군 주차장 공사를 하던 중 발굴되었어요. 부여 능산리 고분군은 백제의 세 번째 수도였던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에서 3km가량 떨어진 곳에 있는 고분군이지요. 사비 시대(538~660) 백제 왕릉으로 총 8기의 무덤들이 있어요.</p><p><br /></p><p>부여 능산리 고분군이 정비되면서 많은 관광객이 찾아오기 시작했어요. 부여군청은 관람객들을 위해 넓은 주차장을 만들기로 했어요. 1993년 12월, 공사를 진행하기에 앞서 발굴 조사를 벌였어요. 하지만 기대와 달리 특별한 것이 발견되지 않았어요. 국립부여박물관 발굴 조사단은 조사를 중단하는 것이 아쉬워 부여군청에 조금 더 시간을 줄 것을 요청했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3394_0973.png" title="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3394_0973.png" alt="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3394_0973.png" /><br style="clear:both;" />부여 능산리 고분군의 위치</p><p><br /></p><p>부여군청의 허락을 얻은 발굴 조사단은 새로운 문화유산이 발굴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안고 다시 조사를 시작했어요. 그렇게 며칠이 지난 12월 12일, 깜짝 놀랄 일이 벌어졌어요.</p><p><br /></p><p>부여 능산리 고분 북쪽에 있는 절터(능산리 절터)에서 작은 기와 조각들이 발견되었어요. 조사단은 몹시 흥분했어요. 무언가 더 나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땅을 깊게 파기 시작했어요. 진흙땅에 물이 가득 차 물을 퍼내면서 발굴을 하던 터라 땅을 파내는 일은 쉽지 않았어요. 한참 동안 땅을 파자 금속 조각이 보였어요.</p><p>조사 단원들은 금속 조각을 보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어요. 공사를 하던 인부들을 돌려보내고 연구사들만 남아 조용히 발굴 작업을 이어갔어요. 혹시 소문이 나면 사람들이 몰려들 테고, 그러면 발굴을 제대로 진행하기 어려울 수도 있으니 말이에요.</p><p><br /></p><p>발굴 조사단은 오후 5시부터 다시 발굴을 진행하기로 했어요. 빨리 진행하려는 마음에 어둠이 내려앉아 제대로 보이지 않는데도 불을 밝히며 발굴을 멈추지 않았어요. 한겨울이라 날까지 추워 발굴 작업에 어려움이 많았어요. 물이 차 있는 진흙 구덩이에 박혀 있는 금속 물체가 혹여 망가질까 봐 종이컵을 사용해 물을 퍼내며, 조심스럽게 땅을 파냈어요.</p><p><br /></p><p>발굴을 시작한 지 4시간 정도 지난 9시경, 여기저기서 흥분된 목소리가 들려왔어요. 향로 하나가 온전히 모습을 드러냈거든요. 향로는 뚜껑과 몸통이 따로 분리된 채 진흙 속에 묻혀 있었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3429_0104.png" title="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3429_0104.png" alt="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3429_0104.png" /><br style="clear:both;" />진흙에 묻혀 있는 백제 금동 대향로</p><p>국립부여박물관</p><p><br /></p><p>극적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문화유산이 바로 백제 금동 대향로에요. 백제 문화의 꽃이라고 불리는 공예품이지요. 도대체 이 향로는 어떤 문화유산이기에 백제 문화유산의 꽃이라고 불리고 있는 것일까요? 지금부터 그 이유를 알아봅시다.</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3466_8725.png" title="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3466_8725.png" alt="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3466_8725.png" /><br style="clear:both;" /> </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1T09:24:33+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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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백제인들이 꿈꾸던 세계, 백제 금동 대향로</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600s/46</link>
<description><![CDATA[<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3170_3716.png" title="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3170_3716.png" alt="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3170_3716.png" /><br style="clear:both;" />백제 금동 대향로</p><p>국립부여박물관</p><p><br /></p><p>“진흙 속에 무언가 묻혀 있습니다. 인부들을 모두 돌려보내시오.”</p><p><br /></p><p>“네. 알겠습니다.”</p><p><br /></p><p>“외부에 알려지면 오히려 발굴에 어려움이 있습니다.”</p><p>충남 부여군 부여읍 외곽에 있는 능산리 고분군에 주차장을 만들기 전 먼저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어요. 발굴 조사를 벌이던 사람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어요. 절터 물웅덩이에서 국보급 유물이 모습을 드러냈거든요. 이 문화유산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왜 땅속에 묻히게 된 것일까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1T09:19:43+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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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역사 속 작은 이야기: 최첨단 유리 세공 기술, 인면 유리구슬은 어떻게 만들었을까?</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600s/45</link>
<description><![CDATA[<p>미추왕릉지구의 4호분에서 나온 ‘인면 유리구슬’의 크기는 1.8cm 정도에요. 놀라운 것은 빨간 입술에 푸른 눈썹과 눈을 가진 4명의 사람과 노란색 발을 가진 흰 새 6마리, 꽃이 핀 나무 4그루, 거기에 구름까지 담았어요. 작은 크기의 유리구슬에 이 많은 것들을 모두 상감 기법으로 담은 최고의 예술품이죠.</p><p><br /></p><p>최첨단 유리 세공 기술을 사용한 이 인면 유리구슬은 어떻게 만들었을까요? 인도네시아 자바섬에 전해져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는 유리 세공 기술을 알아보도록 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2966_0595.png" title="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2966_0595.png" alt="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2966_0595.png" /><br style="clear:both;" /> </p><p>로마는 얼굴 조각을 하나의 구슬에 녹여 붙이는 방법을 사용했어요. 이 기술을 배운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유리 막대에 여러 조각을 녹여 붙여 이를 잘라서 구슬을 만드는 방법을 생각해 냈어요. 로마의 방법보다 한꺼번에 더 많은 구슬을 만들 수 있었죠. 새로운 기술을 접목한 인도네시아 인면 유리구슬은 서역인의 무역선을 타고 신라에 올 수 있었어요.</p><p><br /></p><p>작은 유리구슬 속에는 인류가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고, 서로 교류했던 역사를 담고 있어요. 세계와 교류하면서 신라도 함께 발전할 수 있었지요.</p><p><br /></p><p>기술 문명이 더 발달하면서 세계는 더 가까워지고 더 심하게 경쟁하는 세상이 되었어요. 세계 모든 인류가 함께 교류하고, 함께 성장하는 방법은 없을지 고민해 보아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1T09:16:35+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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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인면 유리구슬의 바닷길 대항해</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600s/44</link>
<description><![CDATA[<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2766_7558.png" title="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2766_7558.png" alt="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2766_7558.png" /><br style="clear:both;" />미추왕릉지구 4호분에서 출토된 경주 황남동 상감 유리구슬</p><p>문화재청</p><p><br /></p><p>1973년 실시된 미추왕릉지구의 4호분 발굴조사에서 매우 특이한 유리구슬이 출토되었어요. 유리구슬에는 사람 얼굴과 새, 나무, 구름 등이 새겨져 있었어요. 학자들은 이 특이한 사람의 얼굴을 닮은 유리구슬(인면 유리구슬)에 대해 연구를 시작했어요.</p><p>연구의 결과 ‘인면 유리구슬’을 처음 만든 곳이 고대 로마였음을 알아냈어요. 로마인들은 눈을 크게 부릅뜬 신화 속 메두사의 얼굴을 닮은 유리구슬을 목에 걸고 다녔다고 해요. 이 유리구슬을 부적처럼 걸고 다니면 질병이나 불행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고 믿었다고 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2800_0185.png" title="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2800_0185.png" alt="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2800_0185.png" /><br style="clear:both;" />로마 인면 유리구술</p><p>코닝 유리박물관</p><p><br /></p><p>하지만 로마의 인면 유리구슬은 신라의 것과 만드는 방법이나 얼굴의 생김새가 달랐어요. 학자들은 로마에서 한참 떨어진 인도네시아에서 다시 답을 찾았어요.</p><p><br /></p><p>고대 로마 상인들은 배를 타고 아라비아와 인도로 가서 무역을 했어요. 무역을 하면서 로마의 유리구슬 제작 기술은 인도네시아 사람들에게 전해졌어요.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로마의 기술에 자신들의 문화와 생각을 담아 새로운 인면 유리구슬을 만들었어요.</p><p>유리구슬 속 사람은 누굴 따라 만든 것일까요? 학자들은 당시 인도네시아 사람들이 믿었던 부처의 얼굴이라 추측해요. 구슬 속 흰 새는 부처의 해탈을, 꽃나무는 부처를 환영할 때 사용하는 상징이라 생각했어요. 작은 구슬을 부처와 관련된 상징으로 꽉 채운 것이지요.</p><p><br /></p><p>로마에서 시작된 인면 유리구슬은 인도와 인도네시아를 거쳐 멀리 떨어져 있는 신라에 도착한 것이에요. 작은 유리구슬 하나가 먼 옛날 로마에서 인도네시아를 거쳐 신라까지 이어진 교류의 역사를 증명하고 있어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1T09:13:36+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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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em>
<title>도로 공사 중 우연히 발견한 황금보검</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600s/43</link>
<description><![CDATA[<p>1973년 경주 대릉원을 정비하면서 주변의 계림로 도로 공사를 하고 있었어요. 이때 배수로 하수관을 묻기 위해 땅을 파던 중 작은 신라 고분 여러 개가 발견되었어요. 공사는 중지되고 박물관 직원들과 고고학자들이 나가 계림로 주변을 샅샅이 조사했어요. 그리고 수많은 유물을 발굴할 수 있었어요.</p><p><br /></p><p>계림로 고분에서 발굴된 여러 유물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14호분에서 나온 황금보검이었어요. 지금까지 발굴된 신라의 유물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한 유물이었어요. 황금보검은 빨간색의 석류석과 유리로 상감한 태극문양으로 장식되었어요. 왕릉에서 발굴된 유리 제품이 있었지만, 당시 신라 사람들에게는 유리를 가공할 기술이 없었지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2604_7065.png" title="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2604_7065.png" alt="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2604_7065.png" /><br style="clear:both;" />경주 계림로 보검(계림로 14호분)과 카자흐스탄 보로보에 보검 복원도</p><p>국립경주박물관</p><p><br /></p><p>당시 학자들은 지금껏 본 적 없었던 황금보검에 대해 어떤 것도 말할 수가 없었어요. 황금보검이 출토되고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머나먼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에서 미스터리를 풀 단서를 찾았어요.</p><p>카자흐스탄에서 황금보검과 거의 똑같은 모양을 한 보검이 있었던 것이에요. 동유럽에서 생산되는 석류석을 이용했다는 점, 금이나 유리를 녹여 상감하는 방법 등 황금보검이 당시 중앙아시아에서 만들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었어요.</p><p><br /></p><p>카자흐스탄에서 만들어진 보검이 약 5,000km 정도 떨어진 신라에 어떻게 전해졌을까요? 보검의 주인은 신라 사람이었을까요? 아니면 신라에 정착한 서역인이었을까요? 황금보검은 여전히 풀리지 않은 많은 미스터리를 갖고 있어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1T09:10:17+09:00</dc:date>
</item>


<item>
<title>로만글라스, 신라 왕릉에 묻히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600s/42</link>
<description><![CDATA[<p>유리는 5천 년 전 지중해 동쪽 연안에서 생활하던 상인들이 우연히 처음 발견했어요. 그리고 기원전 1세기쯤 이 지역의 유리 장인들이 ‘대롱불기’라는 기술을 개발하면서 본격적으로 유리그릇이 만들어졌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2375_5108.png" title="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2375_5108.png" alt="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2375_5108.png" /><br style="clear:both;" />대롱불기로 유리그릇 만들기</p><p><br /></p><p>대롱불기 기술은 당시 지중해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로마에 전해졌고, 유리그릇은 로마가 점령한 세계 여러 지역으로 수출되면서 로만글라스란 이름이 붙게 되었어요. 유리라는 재료도 특별했지만 이를 이용해 만든 로만글라스는 매우 비싸고 귀중한 무역품이었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2417_3082.png" title="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2417_3082.png" alt="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2417_3082.png" /><br style="clear:both;" />봉수형 유리병(황남대총 남분)과 4세기 지중해 지역의 로만글라스</p><p>국립중앙박물관</p><p><br /></p><p>지중해 지역에서 만들어진 로만글라스는 서역 상인들을 통해 거친 사막과 바다를 넘어 중국과 신라에 전해졌어요. 귀한 물건이다 보니 물론 신라의 왕이나 귀족들만이 가질 수 있는 물건이었죠. 로만글라스를 귀하게 여긴 신라 사람들은 왕이 죽자 로만글라스를 무덤에 함께 묻었어요. 그리고 왕이 영원히 로만글라스를 사용하기를 바랐어요.</p><p>지금도 유리그릇에 대해 풀지 못한 수수께끼가 많이 남아있어요. 하지만 왕과 함께 묻힌 유리그릇을 통해 당시 신라인들이 금과 함께 유리그릇을 매우 귀하게 여겼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또한 먼 옛날부터 신라가 멀리 떨어진 서역이나 로마와도 연결되어 있었다는 것을 유리그릇은 증명하고 있어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1T09:07:22+09:00</dc:date>
</item>


<item>
<title>신라, 서역과 교류하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600s/41</link>
<description><![CDATA[<p>고대 삼국의 역사를 기록한 책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는 고대 삼국 중 가장 먼저 나라를 세웠어요. 하지만 신라는 고구려, 백제에 둘러싸여 있었고, 지형적으로도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에 가로막혀 있었어요. 이렇게 한반도 동남부에 갇힌 신라는 나라의 발전 속도가 빠르지 않았어요.</p><p><br /></p><p>400년, 가야와 왜의 연합군이 신라에 쳐들어왔을 때는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도움을 받아 위기를 모면하기도 했고, 5세기에 고구려가 남쪽으로 진출할 때에는 백제와 동맹을 맺고 소백산맥에 의지해 간신히 나라를 지켜냈어요.</p><p><br /></p><p>백제와 고구려에 시달리며 나라를 유지하던 약소국 신라는 5세기 무렵에 왕권을 강화하면서 조금씩 힘을 키워갔어요. 왕권이 강해지면서 왕릉의 크기도 더욱 커졌지요. 황남대총이나 천마총같이 지금 남아있는 거대한 신라 왕릉들 대부분이 이 시기에 만들어졌어요.</p><p>신라가 왕을 중심으로 나라의 힘을 키워가면서 중국 여러 나라와의 소통에 큰 관심을 기울였어요. 중국의 나라들과 적극적으로 교류를 하면서 신라는 임금을 뜻하는 명칭을 ‘마립간’에서 ‘왕’으로, 정치 제도도 중국식을 따라 하기 시작했어요.</p><p><br /></p><p>중국과 교류하면서 당시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에 들어왔던 서역의 물건들도 신라에 들어왔어요. 지중해 연안의 로마나 아라비아에서 만들어진 유리병이나 유리잔, 녹색의 터키산 보석을 박아 만든 금팔찌, 서역 사람이 새겨져 있는 은잔 등이 바로 그러한 물건이었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2058_0973.png" title="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2058_0973.png" alt="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2058_0973.png" /><br style="clear:both;" />삼국시대 교역로</p><p><br /></p><p>또한 중국에 온 상인들을 통해 신라가 서역에 알려지기 시작했어요. 신라는 금이 많이 나고 살기 좋은 나라로 서역에 소개되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서역의 상인들이 직접 신라를 찾아오기 시작했어요. 서역 상인들은 유리, 진주, 호박, 향료, 카펫 등 귀한 물건을 싣고 중국 당나라를 거쳐 신라에 왔어요. 그리고 신라의 금과 은, 비단, 인삼 등을 사서 돌아갔어요.</p><p><br /></p><p>신라가 당과 연합해 삼국을 통일한 이후 신라와 당의 교역은 더 늘어났어요. 한때 신라인 장보고는 청해진을 중심으로 당-신라-일본 사이의 중계 무역을 장악하기도 했어요. 장보고의 청해진 시기 이후에도 더 많은 서역 상인들이 신라를 찾아왔어요. 당시 서역의 한 학자는 신라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어요.</p><p><br /></p><p><br /></p><p>중국의 맨 끝에 신라라는 나라가 있는데 금이 풍부하다. 이슬람교도가 이 나라에 상륙하면 그곳의 아름다움에 끌려서 영구히 정착하고 떠나려 하지 않는다.</p><p><br /></p><p>물건을 팔러 온 서역인들에게 땅이 기름지고 물이 많은 신라가 사막으로 가득 찬 자신들의 나라보다 더 살기 좋은 곳으로 생각되었나 봐요. 그래서 일부 서역인은 신라에 남았어요. 경주 원성왕릉(괘릉)이나 구정동 방형 무덤의 무인상은 이때 남은 서역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2109_3112.png" title="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2109_3112.png" alt="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2109_3112.png" /><br style="clear:both;" />원성왕릉(괘릉) 무사상, 구정동방형무덤 무사상, 중앙아시아 소그드인 마부상(7세기 당 제작)</p><p>경주시청, 국립경주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p><p><br /></p><p>삼국시대 역사는 우리에게 아주 먼 옛날이야기 같아요. 하지만 그때도 우리 민족은 세계의 여러 나라와 교류하며 나라의 발전을 고민하였어요. 유물을 통해 우리 민족은 어떻게 세계와 교류했는지 좀 더 알아보아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2170_723.png" title="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2170_723.png" alt="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2170_723.png" /><br style="clear:both;" /> </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1T09:03:04+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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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신라 속 세계 찾기, 서역의 유물</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600s/40</link>
<description><![CDATA[<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1739_2583.png" title="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1739_2583.png" alt="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1739_2583.png" /><br style="clear:both;" />원성왕릉(괘릉), 경북 경주시</p><p>경주시청</p><p><br /></p><p>“정지! 정지!”</p><p><br /></p><p>“작업을 마무리해야 하는데 왜 그러십니까?”</p><p><br /></p><p>“날아가는 흙더미 속에서 뭔가를 본 것 같아요.”</p><p><br /></p><p>계림로 고분을 발굴하다 말고 소동이 벌어졌어요. 흙더미 속에서 수레 모양을 한 토기가 나온 것이었어요. 신라 시대 수레 모습을 짐작할 수 있는 국보급 토기였어요. 수레형 토기가 나오고 주변의 다른 고분에서는 뜻하지 않게 황금보검(경주 계림로 보검)도 출토되었어요.</p><p>그런데 황금보검은 신라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었어요. 그럼 황금보검은 누가 만들었을까요? 황금보검은 왜 신라 고분에 묻힌 것일까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1T08:55:54+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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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죽어서도 신라를 지키기를 바라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600s/39</link>
<description><![CDATA[<p>문무왕은 당의 군대를 한반도에서 몰아내고 삼국 통일을 완성했어요. 삼국 통일 후 문무왕은 바다를 통해 침입해 올 왜구를 걱정했어요. 그래서 부처님의 힘으로 왜구의 침입을 막고자 동해 바다 가까운 곳에 절을 세우고자 했어요. 아버지의 뜻을 이어 받은 신문왕은 절을 모두 지은 후에 문무왕의 은혜에 감사한다는 뜻으로 이름을 감은사라 지었어요.</p><p><br /></p><p>문무왕은 죽은 후에도 바다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고자 했어요. 그래서 화장을 하여 동해 바다에 장사를 지내달라고 유언을 남겼어요. 신문왕이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서 장사를 지낸 곳이 바로 감은사와 가까이에 있는 대왕암이에요.</p><p><br /></p><p>삼국을 통일하고 죽어서도 나라를 걱정했던 문무왕! 문무왕이 꿈꾼 신라는 어떤 모습이었을까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1557_7254.png" title="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1557_7254.png" alt="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1557_7254.png" /><br style="clear:both;" />문무대왕릉(경북 경주시)</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1T08:52:48+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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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매소성과 기벌포에서 당에 크게 이기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600s/38</link>
<description><![CDATA[<p>석문 전투 이후 신라와 당은 서로 눈치를 보며 임진강을 중심으로 서로 대치하고 있었어요. 당군은 칠중성과 매소성을 점령한 후 지금의 의정부 방면으로 남하하는 전진 기지로 삼았어요. 신라군은 3차례에 걸쳐 매소성을 공격했으나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어요. 신라군이 매소성을 정면으로 공격한다는 것은 승산이 없는 일로 보였어요.</p><p>그러나 신라군에게 당군을 꺾을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 남았어요. 이때 당군은 멀리 당으로부터 식량과 무기를 보급 받고 있었는데, 이 보급을 효과적으로 차단한다면 매소성의 당군을 고립시킬 수 있었어요. 신라는 임진강 하구에 위치한 천성에 함대 1백 여척을 집결시키고 당 보급 함대를 기다렸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1365_6132.png" title="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1365_6132.png" alt="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1365_6132.png" /><br style="clear:both;" />쇠뇌와 청동방아쇠뭉치</p><p>쇠뇌는 방아쇠 장치를 이용해 화살을 발사하는 무기로 기원전부터 여러 전쟁에서 사용되었다. 신라에서 제작된 천보노는 쇠뇌를 개량한 것으로 1천 보나 화살을 날릴 수 있을 만큼 성능이 뛰어나 당의 황제도 탐을 냈다고 한다. 쇠뇌는 방아쇠 장치를 이용해 화살을 발사하는 무기로 기원전부터 여러 전쟁에서 사용되었다. 신라에서 제작된 천보노는 쇠뇌를 개량한 것으로 1천 보나 화살을 날릴 수 있을 만큼 성능이 뛰어나 당의 황제도 탐을 냈다고 한다.</p><p>국립경주박물관</p><p><br /></p><p><br /></p><p>675년, 당의 산둥 반도에서 군량미를 실은 당의 보급 함대가 출발했어요. 보급 함대는 칠중성에 주둔하던 당군과 서로 만나기로 약속되어 있었지요. 그러나 당 보급 함대가 만난 것은 뜻밖에도 신라군이었어요. 천성에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던 신라군은 당의 보급 함대를 공격했어요. 신라군의 공격에 당의 함선은 모두 불타고 말았어요.</p><p><br /></p><p>이 전투에서 신라는 당군 1천 4백 명을 죽이고, 병선 40척을 빼앗았어요. 말 1천 마리도 얻었지요. 당군 총사령관 설인귀도 신라군의 포위를 뚫고 간신히 도망갈 정도였어요.</p><p><br /></p><p>당시 매소성에 주둔하고 있던 당군은 겨울에 접어든 시기에 보급의 어려워지자 매우 불안해했어요. 당군의 사기가 떨어진 것을 알아챈 신라군은 매소성을 기습 공격해 순식간에 빼앗았어요.</p><p><br /></p><p>매소성을 빼앗긴 당군은 20만의 군사를 동원해 다시 공격해 왔어요. 그러나 이에 맞선 3만 명의 신라군은 죽을힘을 다해 싸워 물리쳤어요. 원술도 이 전투에 참가해 힘껏 싸워 지난날의 치욕을 씻고 큰 공을 세웠지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1432_3465.png" title="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1432_3465.png" alt="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1432_3465.png" /><br style="clear:both;" />매소성 전투</p><p><br /></p><p>신라군의 공격에 당군은 말 3만 여 필과 많은 무기를 버리고 허겁지겁 북쪽으로 군대를 돌렸어요. 매소성 전투로 당군은 큰 피해를 입었어요. 신라군도 여러 차례 큰 희생을 치르기는 했으나 매소성 전투를 고비로 전세는 신라에게 유리해졌지요.</p><p><br /></p><p>당군은 매소성에서 패한 뒤로는 육로로 신라의 임진강 방어선을 돌파하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하였어요. 그래서 육로 대신 금강의 입구인 기벌포를 통해 신라의 측면을 공격하려 하였어요. 기벌포를 장악하면 서해 지역을 모두 장악할 수 있었기에 기벌포는 아주 중요한 군사 요충지였어요. 당군은 백제를 공격할 당시 13만 명에 이르는 대규모 병력을 상륙시켰던 경험도 있어 전투에 자신만만해 했어요. 신라도 이에 맞서 함선 1백 여척을 이곳에 배치시켜 준비하고 있었지요.</p><p>676년, 드디어 설인귀의 당 수군이 기벌포로 내려오자, 신라군도 함선을 이끌고 기벌포 앞바다로 나아가 맞서 싸웠어요. 그리고 크고 작은 전투 수 십 차례를 치렀지요. 전투 결과 신라군은 당의 수군 4천여 명의 목을 베고 크게 승리하였어요. 이렇게 해서 문무왕 10년부터 16년까지 7년간에 걸친 참으로 길고도 험난한 당과의 전쟁은 신라의 승리로 끝이 났어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1T08:50:44+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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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신라, 당과 맞서 싸우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600s/37</link>
<description><![CDATA[<p>672년 평양에서 황해도 배천까지 남쪽으로 내려온 당군은 신라군의 공격으로 다시 석문으로 올라갔어요. 석문은 황해도에 있는 넓은 들판으로 임진강을 건너 평양으로 가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었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1128_7611.png" title="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1128_7611.png" alt="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1128_7611.png" /><br style="clear:both;" />신라 장창 보병의 모습</p><p><br /></p><p>신라군은 석문 들판의 남쪽에서 북쪽의 당군을 바라보며 진을 쳤어요. 신라군은 이곳에서 당의 기병을 방어하기 위해 장창 보병을 이용하였어요. 당 기병들이 신라군 진영으로 돌격해오자 신라 장창 보병들 앞에 서있던 궁수들이 화살을 한꺼번에 쏘았어요. 쓰러진 기병들을 넘어 다른 기병들이 가까이 접근하자 궁수들이 뒤로 빠지고 장창 보병들이 이들을 대적했어요.</p><p><br /></p><p>장창 보병들은 병사를 노리지 않았어요. 대신 이들은 긴 창을 땅에 지지해 세우고 달려오는 말을 겨냥했어요. 맨 앞의 말과 병사가 우루루 쓰러지자 뒤따르던 기병들의 움직임이 둔해지기 시작했어요. 이때를 놓치지 않고 도끼를 든 부월수와 칼을 든 검수들이 주춤하고 있던 기병을 포위하여 하나씩 제거해 갔어요. 이 전투에서 장창을 활용한 신라군은 당군 3천명을 사로잡았어요.</p><p><br /></p><p>장창 보병들은 병사를 노리지 않았어요. 이들은 긴 창을 땅에 지지해 세우고 달려오는 말을 겨냥했어요. 맨 앞의 말과 병사가 쓰러지자 뒤따르던 기병들의 움직임이 둔해지기 시작했어요. 도끼를 든 부월수와 칼을 든 검수들이 주춤하고 있던 기병을 포위하여 하나씩 제거해 갔어요. 이 전투에서 장창을 활용한 신라군은 당군 3천명을 사로잡았어요.</p><p>기분 좋은 승리였어요. 승리에 취한 신라군은 도망가는 당군을 계속 쫓아가며 공격을 했어요. 그러나 너무 정신없이 쫓다 적진 깊숙이 들어가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어요. 이번에는 상황이 역전되어 거꾸로 당군의 공격을 받은 신라군은 대부분의 병사를 잃는 큰 피해를 입었어요.</p><p><br /></p><p>김유신의 아들 원술도 화랑으로 이 전투에 참가하고 있었어요. 원술은 신라군이 밀리고 있을 때 남은 군사를 이끌고 적진으로 뛰어들려 했어요. 이때 부하가 말의 고삐를 붙잡고 원술을 말렸어요.</p><p><br /></p><p>“대장부가 죽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죽을 곳을 택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이룬 것 없이 죽기보다 살아서 나중에 공을 세우는 것이 참다운 무사의 용기일 것입니다.”</p><p><br /></p><p>“남아는 구차하게 살지 않거늘, 장차 무슨 면목으로 아버지를 뵙겠는가?”</p><p><br /></p><p>원술이 말을 채찍질하여 달려 나가려고 하였지만, 부하가 고삐를 놓아 주지 않았어요. 이 때 총사령관의 후퇴 명령이 떨어졌고, 원술도 눈물을 삼키며 다른 군사와 함께 후퇴를 하였어요. 석문 전투에서 신라군이 크게 졌다는 소식은 문무왕에게 전해졌지요. 왕은 신하들을 모아 대책 회의를 했어요.</p><p><br /></p><p>“석문 전투의 패배를 어찌 하면 좋겠소?”</p><p>석문 전투의 패배로 크게 걱정을 하는 문무왕 앞에 김유신이 나서서 말했어요.</p><p><br /></p><p>“당군의 세력이 크니 요충지에 성을 쌓고 장수와 군사들로 하여금 그곳을 지키게 하옵소서. 비록 신이 늙었으나 직접 적 앞에 나아가 방비할 터이니 너무 심려 마십시오. 다만 원술은 왕명과 가문을 욕되게 하였으니 본보기로 목을 베어 주옵소서.”</p><p><br /></p><p>“원술에게 무슨 죄가 있겠소. 혼자에게만 무거운 형벌을 내릴 수는 없소.”</p><p><br /></p><p>왕은 원술의 죄가 없다고 했으나 김유신은 자신의 아들이 아니라며 원술을 보려 하지 않았어요. 원술은 부끄럽고 두려워 감히 아버지를 보지 못하고 시골에 숨어 살았다고 해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1T08:45:47+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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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아버지 태종무열왕과 함께 삼국 통일에 나서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600s/36</link>
<description><![CDATA[<p>신라와 당은 군사 동맹을 맺고 백제와 고구려를 함께 공격하였어요. 두 나라는 전쟁 이후에 백제 땅과 대동강 남쪽의 고구려 땅은 신라가 차지하고, 대동강 북쪽의 고구려 땅은 당이 차지하기로 약속했어요. 그러나 백제를 멸망시킨 후 당은 약속과 달리 백제 땅에 자신들의 관청을 설치하고 직접 통치하려 했어요.</p><p><br /></p><p>661년 문무왕은 아버지 태종 무열왕에 이어 신라의 왕이 되었어요. 이 무렵 당은 한걸음 더 나아가, 문무왕을 계림주 대도독에 임명하였어요. 이는 신라를 독립된 나라의 왕이 아닌 당이 임명한 관리가 다스리는 나라로 만들겠다는 속셈이었어요. 즉 당나라의 영토로 삼겠다는 것이었어요.</p><p><br /></p><p>신라는 당의 속셈을 알아채고,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당과의 전쟁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지요. 그래서 고구려와의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피할 수 없는 당과의 전쟁을 차근차근 준비하였어요.</p><p><br /></p><p>고구려가 패망한 뒤 곧바로 고구려의 각지에서 부흥군이 크게 일어났어요. 치밀하게 전쟁 준비를 마친 신라가 670년 고구려 부흥군과 연합해 총 2만의 병력으로 요동 지역의 당군을 공격하면서 신라와 당의 전쟁도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어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1T08:42:45+09:00</dc:date>
</item>


<item>
<title>문무왕, 삼국 통일을 완성하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600s/35</link>
<description><![CDATA[<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0861_5603.png" title="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0861_5603.png" alt="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0861_5603.png" /><br style="clear:both;" />감은사지(경북 경주시)</p><p><br /></p><p>“내가 왕이 된 후 지금까지 돌이켜보면 대부분의 나날이 전쟁의 연속이었던 같소.”</p><p><br /></p><p>“덕분에 우리 신라가 고구려를 멸망시켰고, 또 당을 몰아내고 통일을 이룬 것 같습니다.”</p><p><br /></p><p>“경들이 그렇게 생각한다니 다행이오. 이제 내가 죽으면 화장을 해서 동해에 장사를 지내주시오. 죽어서 바다의 용이 되어 신라를 지키겠소.”</p><p><br /></p><p>681년 신라의 한 왕이 바다의 용이 되겠다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어요. 이와 같은 유언을 남긴 신라의 왕은 누구일까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1T08:41:18+09:00</dc:date>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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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연개소문이 죽고 고구려가 멸망하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600s/34</link>
<description><![CDATA[<p>660년, 신라와 당이 연합하여 백제를 공격하였어요. 안시성에서 고구려에 크게 패한 당은 작전을 바꿔 신라를 이용하기로 한 것이지요. 당군은 바다로, 신라군은 육지에서 백제를 공격하였어요. 두 나라의 갑작스러운 공격에 백제는 크게 저항도 못하고 멸망하고 말았어요.</p><p>백제가 멸망하고 얼마 되지 않아 고구려에도 큰일이 벌어졌어요. 당과 끝날 것 같지 않은 전쟁 속에서 고구려를 굳건히 이끌던 연개소문이 세상을 떠난 것이에요(666년). 연개소문은 세 아들에게 물에서 사는 고기처럼 서로 도우며 살 것을 유언으로 남겼어요.</p><p><br /></p><p>그러나 연개소문이 죽고 대막리지 자리를 이어받은 큰아들 남생은 아우들이 정변을 일으키자 도망쳐 당으로 망명을 하였고, 이후 당군이 고구려를 침략해 올 때 앞장서서 길을 안내했어요. 셋째 남산은 수도인 평양성의 성문을 열고 보장왕과 함께 당군에 항복했고요. 형을 몰아내고 막리지가 되었던 둘째 남건은 당군에 맞서 싸웠으나 끝내 실패해 포로가 되었어요.</p><p><br /></p><p>연개소문의 아들들은 아버지의 뜻을 따르지 않고 서로 권력 다툼을 벌이다 결국 고구려를 망하게 했어요. 연개소문의 빈자리를 채우기에 아들들의 능력은 너무 부족했고, 연개소문의 마지막 유언은 지켜지지 못했죠.</p><p><br /></p><p>조선 시대의 한 기록에는 연개소문을 이렇게 쓰고 있어요.</p><p><br /></p><p><br /></p><p>연개소문은 비록 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빼앗은 도적이기는 하나 그래도 맞서 싸울 상대가 없는 사납고 용맹스러운 영웅이다.</p><p>정변으로 권력을 잡은 연개소문이 죽고 2년 만에 고구려는 당에 멸망하고 말았어요. 연개소문이 살아있었다면 당의 침략을 막아낼 수 있었을까요? 아니면 연개소문의 정변으로 고구려의 힘이 약해져 멸망하게 된 것일까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1T08:38:10+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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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나라의 운명을 걸고 당과 전쟁을 하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600s/33</link>
<description><![CDATA[<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0505_5389.png" title="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0505_5389.png" alt="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0505_5389.png" /><br style="clear:both;" />당의 공격과 고구려의 반격</p><p><br /></p><p>644년,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당 태종은 왕을 시해한 연개소문을 벌한다는 명분으로 50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고구려를 침략해 왔어요. 수의 침략 때와는 달리 병사의 수는 적었으나 훈련이 잘된 병사들로 이루어진 군대였어요. 당군의 공격에 고구려의 국경선을 지키던 요동성과 백암성 등이 차례로 무너졌어요. 당군은 이어 안시성을 향했어요.</p><p>안시성은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공격이 쉽지 않은 요새였어요. 연개소문도 15만 명의 군사를 보내 안시성의 고구려군을 돕게 했어요. 그러나 안시성을 향하던 고구려군이 당군의 유인 작전에 말려들어 크게 패하고 말았어요.</p><p><br /></p><p>구원병도 없이 포위된 안시성 성주와 백성들은 하나가 되어 목숨을 걸고 당군과 맞서 싸웠어요. 당군이 포차라는 투석기로 성벽을 무너트리면 통나무로 다시 벽을 쌓아 적을 막았어요. 당군이 안심하고 한눈을 팔고 있으면 고구려군이 직접 성을 나와 공격하기도 했지요.</p><p><br /></p><p>한 달 가까운 공격에도 안시성이 무너지지 않자 당 태종은 초조해졌어요. 부족한 식량은 먼 길을 온 당군에게 가장 큰 걱정거리였어요. 당 태종은 하루에도 6~7회씩 안시성의 서쪽을 공격하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성의 동남쪽에 흙을 쌓아 성벽보다 높은 산을 쌓게 하였어요.</p><p><br /></p><p>60일 동안 쌓은 토산의 꼭대기는 안시성보다 더 높아 성안을 내려다보며 공격할 수 있었어요. 그런데 갑작스러운 폭우로 완성된 토산이 무너져 성벽을 덮쳤어요. 토산을 이용한다면 당군은 손쉽게 성벽을 넘을 수 있었어요. 안시성의 가장 큰 위기였죠. 그러나 고구려군은 재빨리 이 틈을 이용했어요. 거꾸로 성문을 열고 나와 그 토산을 점령해 버렸지요.</p><p>공들여 쌓은 토산을 고구려군에게 빼앗기자 당 태종은 불같이 화를 냈어요. 그리고 토성을 다시 빼앗기 위해 3일 밤낮으로 맹렬히 공격했어요. 하지만 고구려군의 끈질긴 저항으로 당 태종은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어요.</p><p><br /></p><p>토산을 빼앗긴 당군에게는 더 큰 문제가 있었어요. 안시성에서 발목이 잡힌 지 어느덧 90여 일, 겨울이 오고 있었어요. 날이 추워지고 식량이 부족해지자 당 태종은 어쩔 수 없이 안시성의 포위를 풀고 당으로 도망을 갔어요. 고구려군은 도망가는 당군의 뒤를 공격하여 큰 전과를 올렸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0538_2537.png" title="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0538_2537.png" alt="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0538_2537.png" /><br style="clear:both;" />당군이 쌓은 토산을 점령한 고구려군</p><p><br /></p><p>중국 역사에서 최고의 황제 중 한 명이라 평가받는 당 태종은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크게 패한 후 4년 만에 병을 얻어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어요.</p><p><br /></p><p>“나의 자식들은 고구려를 공격하지 마라. 너희들이 이길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p><p><br /></p><p>당 태종의 유언에도 불구하고 뒤를 이은 당 고종은 고구려와의 전쟁을 멈추지 않았어요. 고구려를 이기지 못하고서는 당이 천하의 중심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p><p><br /></p><p>고종은 당 태종의 실패를 교훈 삼아 대규모 군대보다는 규모가 작은 군대를 자주 보내 고구려를 공격했어요. 이 작전으로 고구려의 국력을 조금씩 없애려는 속셈이었지요. 20년이 넘는 오랜 기간 고구려는 전쟁에 시달렸고, 고구려 백성들도 지쳐만 갔어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1T08:35:54+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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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em>
<title>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잡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600s/32</link>
<description><![CDATA[<p>연개소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고구려의 고위 관리인 대대로였어요. 고구려는 여러 귀족들이 모여 나라의 중요한 일을 협의하고 결정했어요. 이때 대대로는 귀족 회의의 대표로서 왕을 보좌하고, 나랏일을 총괄하는 자리였지요.</p><p>대대로 집안 출신으로 연개소문은 아버지가 죽고 그 자리를 물려받으려 했어요. 그러나 다른 귀족들은 연개소문이 너무 잔인하고 포악하다는 이유로 반대하고 나섰어요. 연개소문 집안이 계속해서 대대로 자리를 맡게 할 수 없다는 이유도 들었지요.</p><p><br /></p><p>“당은 점점 힘이 커가고 있고, 평화가 오래갈 수 없다는 것을 나도 알고 있소.”</p><p><br /></p><p>“폐하! 당의 침략에 대비하셔야 합니다.”</p><p><br /></p><p>“맞소, 장군께서 천리장성 쌓는 일을 맡아주세요. 당을 막기 위한 최선의 방책이 될 것이오.”</p><p><br /></p><p>영류왕은 자기 뜻에 반대하며 당과 전쟁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연개소문을 평양에 가만히 둘 수가 없었어요. 게다가 그는 왕이나 귀족들이 무시못할 정도로 큰 세력을 형성했어요. 그래서 당의 침략을 대비하기 위해 쌓고 있던 천리장성의 감독관으로 연개소문을 임명했어요. 고구려의 중심인 평양에서 멀리 요동 변방으로 보내버리려는 속셈이었죠. 그리고 여러 귀족과 은밀하게 논의해 연개소문을 죽이고자 했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0282_3195.png" title="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0282_3195.png" alt="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0282_3195.png" /><br style="clear:both;" />정변을 일으키는 연개소문</p><p><br /></p><p>연개소문은 이러한 영류왕의 속셈을 미리 눈치챘어요. 그래서 천리장성 감독관으로 일하던 어느 날 자신이 거느린 군사들을 동원해 정변을 일으켰어요(642년).</p><p><br /></p><p>연개소문은 영류왕과 그를 따르는 100여 명의 귀족을 죽이고 정권을 잡았어요. 그리고 보장왕을 허수아비 왕으로 세우고, 연개소문은 스스로 가장 높은 관직인 대막리지가 되어 군사권과 인사권을 독차지하였어요. 왕을 제치고 고구려의 제1인자가 된 것이에요. 그리고 자기 아들들에게도 높은 관직을 주어 고구려를 다스리게 했어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1T08:31:37+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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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em>
<title>고구려, 당과 화해정책을 펼치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600s/31</link>
<description><![CDATA[<p>중국의 수가 고구려 침략에 실패한 이후 멸망하고, 당이 다시 중국을 통일했어요. 당을 세운 고조는 수가 멸망한 까닭을 생각하며 고구려와 화해 정책을 펼쳤어요. 고구려에서는 수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영양왕이 죽고 영류왕이 왕이 되었어요.</p><p><br /></p><p>영류왕도 당과 화해 정책을 펼쳤어요. 비록 수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지만, 고구려의 피해도 상당했기 때문에 외교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어요. 수와의 전쟁에서 붙잡은 포로들을 당에 돌려보내 주기도 했고, 고구려 지도를 보내면서 전쟁을 할 뜻이 없음을 밝히기도 했어요.</p><p><br /></p><p>그러나 당 태종이 황제가 되면서 분위기는 바뀌어 갔어요. 당의 서쪽에 있던 돌궐을 점령하여 근심거리를 없앤 당 태종은 영류왕의 화해 손짓에도 계속 무례한 행동을 이어갔어요.</p><p><br /></p><p>당의 강압적인 태도에 고구려는 부여성에서 비사성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쌓으며 당의 침략에 대비하였어요. 또다시 고구려에 전쟁의 기운이 커져만 갔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0086_5001.png" title="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0086_5001.png" alt="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90086_5001.png" /><br style="clear:both;" />여러 성들을 연결하여 쌓은 천리장성</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1T08:28:25+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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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em>
<title>연개소문, 당에 맞서 싸우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600s/30</link>
<description><![CDATA[<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89936_134.png" title="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89936_134.png" alt="f1e94c1f2bcb6828bcf022c26332faf6_1784589936_134.png" /><br style="clear:both;" />연개소문</p><p><br /></p><p>“폐하! 당이 화친한다고 하나 이는 믿어서는 아니 되옵니다.”</p><p><br /></p><p>“막리지! 당신은 칼을 믿지만, 나는 그렇지 않소.”</p><p><br /></p><p>“힘이 없다면 고구려가 아직 남아있겠습니까? 일찍이 수의 침략을 물리친 고구려의 힘을 믿으소서!”</p><p><br /></p><p>고구려 영류왕은 당과 화해하여 친하게 지내 전쟁을 피하고자 했어요. 그러나 연개소문은 당을 믿을 수 없다며 영류왕의 뜻에 반대했어요. 왕과 의견이 상당히 다른 연개소문은 어떤 선택을 했을까요? 그리고 자기의 생각을 펼치기 위해 어떤 일을 했을까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1T08:25:50+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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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em>
<title>역사 속 작은 이야기: 고려의 개성 첨성대</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600s/29</link>
<description><![CDATA[<p>고려의 수도였던 개성에도 첨성대가 남아 있어요. 북한의 국보 제131호로 2013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된 문화유산이지요. 고려 궁궐이었던 만월대 궁궐터 서쪽에 남아 있어요. 고려 태조 때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지금은 천문 관측기구를 올려놓았던 축대만 남아 있어요.</p><p><br /></p><p>축대는 화강암을 다듬어 만든 네모난 돌마루를 5개의 기둥이 받치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어요. 돌마루까지의 높이는 3미터가량이 되요. 4개의 기둥이 서 있는 곳이 바로 동서남북을 가리키지요.</p><p><br /></p><p>기둥 아래에는 주춧돌이 놓여 있는데, 주춧돌에는 크고 작은 구멍들이 뚫려 있어요. 돌마루에도 구멍이 나 있고요. 이 구멍에 관측기구를 놓고 고정시킨 것으로 추측하고 있어요. 계단을 만들어 관측대 위로 올라가 관측했던 것 같아요. 고려는 개성의 천문대를 중심으로 고대부터 이어진 천문 관측 기술을 발전시켰을 거예요.</p><p><br /></p><p>지금도 천문을 관측하고 우주로 나아가려는 노력이 이어지고 있지요. 그런데 이런 노력이 1300여 년 전 신라에서도 이루어지고 있었다니 놀랍지 않나요? 이제 경주 첨성대에 담긴 의미와 놀라운 건축 기술을 생각하며 경주 첨성대를 보게 된다면 실망하기보다는 저절로 감탄사가 나오게 될 거예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68786_2079.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68786_2079.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68786_2079.png" /><br style="clear:both;" />개성 첨성대</p><p>국립중앙박물관</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1T02:33:17+09:00</dc:date>
</item>


<item>
<title>지진에도 무너지지 않은 경주 첨성대</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600s/28</link>
<description><![CDATA[<p>경주 첨성대는 놀랍게도 1,300여 년이 지났는데도 원래 모습 그대로 보존되고 있어요. 더 놀라운 것은 지진과 같은 강한 충격에도 무너지지 않았다는 점이에요.</p><p>2016년 경주에서 진도 5.8의 강진이 발생했어요. 땅이 갈라지고 한옥 기와가 무너져 내리기도 했어요. 천년의 도읍지 경주에 있는 문화유산들도 일부 훼손되었어요. 경주 첨성대도 2cm 정도 기울었고, 돌 틈이 벌어지기도 했어요.</p><p><br /></p><p>하지만 진도 5.8이라는 강진의 규모에 비해 피해가 크지 않은 편이었어요. 전문가들은 어떻게 강한 지진에도 큰 피해 없이 온전할 수 있었는지 다시 한번 깜짝 놀랐어요. 조사를 통해 내진 설계가 잘 되어있음을 알게 되었지요.</p><p><br /></p><p>과학 기술과 건축 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삼국 시대에 어떻게 내진 설계를 했을까요? 먼저 받침대를 만들기 전 땅을 깊게 파고 흙과 돌을 번갈아 넣어 땅의 지반을 단단하게 다졌어요. 원형의 몸체를 만들기 위해 돌을 안쪽으로 조금씩 규칙적으로 들여쌓아 균형감을 갖게 했지요. 그리고 직선이 아닌 원형으로 쌓아 안정적인 구조로 만들었어요.</p><p><br /></p><p>무엇보다 큰 역할을 한 것은 정자석과 비녀돌이에요. 꼭대기에 쌓은 정자석은 서로 맞물려 좌우로 흔들림을 방지해 주고 있어요. 그리고 경주 첨성대 몸통에는 삐죽 나와 있는 돌이 있어요. 이것이 바로 비녀돌이에요. 몸통 사이에 끼워 넣은 돌로 몸체를 잡아주며 안정성을 더해주고 있지요. 이러한 치밀한 설계 덕분에 강한 충격에도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답니다.</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68653_5762.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68653_5762.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68653_5762.png" /><br style="clear:both;" />첨성대의 정자석과 비녀돌</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1T02:31:13+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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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em>
<title>평지에 세워져 있는데 천문대라고?</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600s/27</link>
<description><![CDATA[<p>천문대는 모두 높은 곳에 있어야 할까요? 물론 현대에 천문대는 대부분 높은 산에 있어요. 전문가의 이야기에 따르면 도시의 평지에서는 높은 빌딩에 시야가 가려 하늘을 관측하기 쉽지 않다고 해요. 또 반짝이는 네온사인 불빛도 천문 관측을 방해한대요.</p><p><br /></p><p>하지만 옛날에는 평지에서도 천문 관측이 가능했어요. 높은 빌딩도 반짝이는 불빛도 없었으니까요. 경주 첨성대가 있는 곳을 잘 살펴보세요. 주위에 높은 산도, 큰 나무도 없어 하늘을 관측하기 안성맞춤이지요. 약 10m 높이의 경주 첨성대 위에 올라가면 사방을 둘러보며 하늘의 행성과 별자리를 잘 관측할 수 있었을 거예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1T02:27:52+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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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em>
<title>경주 첨성대에 담겨 있는 비밀</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600s/26</link>
<description><![CDATA[<p>경주 첨성대는 작은 규모의 건축물이지만, 여러 가지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 있어요. 이를 통해 경주 첨성대의 기능도 추측할 수 있지요.</p><p>경주 첨성대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요. 네모난 받침대와 둥근 몸체, 꼭대기 우물 정(井)자 모양의 정자석으로 구분할 수 있어요. 네모난 받침대는 땅을, 둥근 몸체는 하늘을 의미하지요. 정자석은 남북을 가로지르는 자오선의 표준이 된다고 해요. 정자 모양의 돌의 각 면이 동서남북의 방위를 가리키고 있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68388_9852.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68388_9852.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68388_9852.png" /><br style="clear:both;" />첨성대의 구조</p><p><br /></p><p>경주 첨성대를 만드는 데 사용된 돌의 개수는 총 365여 개라고 해요. 이는 음력 1년 날 수와 같아요. 받침은 네모난 2단의 기단을 쌓았어요. 기단 한 단은 땅속에 있지요. 둥근 몸체는 27단이고, 땅 위의 기단 한 단을 더하며 모두 28단이에요. 기본 별자리 28수를 의미해요. 몸통 가운데 네모난 창이 나 있는데 창을 기준으로 아래로 12단, 위로 12단이에요. 합하면 24단이지요. 각각 12달과 24절기를 의미해요.</p><p><br /></p><p>네모난 창은 남쪽을 향하고 있어요.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의 길이에 따라 계절의 변화를 알 수 있어요. 춘분과 추분 때에는 햇빛이 창을 통해 경주 첨성대 안 바닥까지 비추지요. 반면 하지와 동지에는 햇빛이 비치지 않아요. 이 하나의 건축물에 천문과 역법의 원리가 다 담겨 있다니, 놀랍지 않나요?</p><p><br /></p><p>경주 첨성대가 천문대라면 과연 어디서 하늘을 관측했을까요? 학자들은 경주 첨성대 꼭대기에 있는 정자석 아래에 판을 걸쳐 놓고 그곳에서 하늘을 관측했다고 추측해요.</p><p><br /></p><p>그렇다면 어떻게 경주 첨성대 안으로 들어갔을까요? 첨성대 안에는 계단이 없답니다. 몸체 중간에 나 있는 네모난 창에 사다리를 걸쳐 놓고 올라가 경주 첨성대 안으로 들어간 다음, 다시 그 안에 놓인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던 거지요.</p><p>경주 첨성대는 작은 규모이지만 그것이 가지고 있는 상징성은 특별해요. 고대 건축 기술이 얼마나 발전했는지도 보여주고 있어요. 네모난 기단과 정자석, 둥그런 몸통을 통해 직선과 곡선의 조화가 주는 아름다움도 느낄 수 있지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1T02:26:44+09:00</dc:date>
</item>


<item>
<title>천문 관측을 중요하게 여긴 이유는?</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600s/25</link>
<description><![CDATA[<p>아주 오랜 옛날부터 천문 관측은 무척 중요하게 여겨졌어요. 농업이 국가 경제의 근본이었던 시대에 하늘의 움직임을 살펴 계절의 변화와 날씨를 예측하는 일은 무척이나 중요했거든요. 농사짓는 백성들에게 언제 씨를 뿌리고 수확을 해야 하는지 그 시기를 정확히 알려주는 것이 왕의 임무라고 생각했지요.</p><p>계절의 변화와 농사 시기를 예측하려면 역법서(달력)가 필요했어요. 그러기 위해 해와 달, 별들의 움직임을 관측해야 했지요. 중국이나 우리나라 등 동아시아 국가들은 천문학을 왕이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 꼭 필요한 학문으로 여겼어요. 천문 관측을 담당한 기관은 왕실에서 직접 관리했어요.</p><p><br /></p><p>가뭄이 들거나 홍수가 나면 왕이 나라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해서라고 여겼지요. 그러다 보니 왕은 천문 관측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이를 발전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였어요. 하지만 우리나라의 자체적인 역법(달력)을 만들기는 정말 어려웠답니다. 고대부터 연구되던 천문학은 조선 세종 시대에 이르러 더욱 발전했고, 비로소 우리 실정에 맞는 달력을 만들 수 있게 되었어요</p><p><br /></p><p>삼국 시대에도 천문학을 중요하게 여겼다는 기록과 증거들이 발견되고 있어요. 그중 하나가 바로 경주 첨성대예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1T02:23:38+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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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경주 첨성대는 무엇일까요?</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600s/24</link>
<description><![CDATA[<p>경주 첨성대는 과연 무엇일까요? 『삼국유사』에는 경주 첨성대가 천문대라고 기록되어 있어요. 하지만 경주 첨성대를 어떻게 이용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없어, 정말 천문대가 맞나?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해요.</p><p><br /></p><p>경주 첨성대를 천문대로 보기 어렵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어요. ‘사람이 드나들며 천문 관측하기에 너무 비좁다. 천문대는 보통 높은 지역에 있는데, 신라의 첨성대는 평지에 있어 천문대로 보기 어렵다. 기록에 나온 첨성대가 현재의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해요.</p><p><br /></p><p>현재 경주 첨성대를 무엇으로 볼 것인가에 대한 의견은 세 가지 정도로 모아져요. 첫 번째는 4계절과 24절기를 측정하기 위해 세운 천문대라는 의견이지요. 두 번째는 국가에서 나라의 앞날을 점치며 제사를 지내던 제단이라는 의견이에요. 세 번째는 선덕여왕의 권위를 보여주기 위한 상징물이라는 의견이 있어요.</p><p><br /></p><p>여러 의견이 분분하지만, 현재까지 경주 첨성대는 하늘의 움직임을 살피고 별자리를 관측하기 위해 만들어진 천문대라는 의견이 더 힘을 얻고 있답니다.</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68110_0285.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68110_0285.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68110_0285.png" /><br style="clear:both;" />첨성대 앞에서 하늘을 보고 있는 신라 선덕여왕</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1T02:22:02+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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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신라의 과학과 건축 기술을 보여주는 경주 첨성대</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600s/23</link>
<description><![CDATA[<p>경주 첨성대는 국보 제31호로 신라 천년의 도읍지 경주에 있는 문화유산이에요. ‘별을 관측하는 천문대’라는 뜻이지요. 신라 궁궐이 있던 월성과 왕릉급 무덤들이 모여 있는 대릉원 사이 벌판에 자리하고 있지요. 동양에 남아 있는 것 중 가장 오래된 천문대라고 하죠.</p><p><br /></p><p>동궁과 월지와 함께 야경이 아름다운 곳으로 꼽혀요. 사진으로만 보던 경주 첨성대를 직접 본 사람들은 실망한 표정을 짓고, 의구심을 갖기도 하지요.</p><p><br /></p><p>“생각보다 규모가 작네요. 엄청 클 줄 알았는데…”</p><p><br /></p><p>“천문대가 산에 있어야지, 왜 이렇게 낮고 평평한 곳에 있어요?”</p><p><br /></p><p>그런데 경주 첨성대의 상징성과 건축의 비밀을 알게 되면 이런 이야기는 쏙 들어가게 될 거예요. 규모도 작고 특별해 보이지 않는 경주 첨성대가 국보로 지정된 이유는 무엇일까요?</p><p><br /></p><p>가장 큰 이유는 1,300여 년이 지났는데도 원래 모습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지요. 또 신라의 과학 기술과 문화 수준을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요.</p><p>『삼국유사』와 『세종실록』에 따르면 7세기 중엽 선덕여왕 때 경주 첨성대를 만들었다고 해요. 하지만 구체적으로 왜 쌓았는지, 무엇을 하던 곳인지에 대한 기록이 자세하지 않아 학자마다 경주 첨성대의 기능과 역할에 대한 의견이 분분해요.</p><p><br /></p><p>돌을 잘 다듬어 28단으로 쌓아 올린 높이 10미터가량의 굴뚝 모양의 건축물. 이 문화유산에는 어떤 비밀이 담겨 있을까요? 지금부터 경주 첨성대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며 궁금증을 해결해 볼까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67978_4201.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67978_4201.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67978_4201.png" /><br style="clear:both;" /> </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1T02:19:48+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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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신라 문화와 과학 기술의 결정체, 경주 첨성대</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600s/22</link>
<description><![CDATA[<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67808_116.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67808_116.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67808_116.png" /><br style="clear:both;" />경주 첨성대(경북 경주시)</p><p>문화재청</p><p><br /></p><p>“360여 개의 돌을 다듬어 쌓아 올리도록 할 것이오.”</p><p><br /></p><p>“몸통에 작은 창을 내도록 하시오.”</p><p><br /></p><p>“되도록 평지에 세우면 좋겠소.”</p><p><br /></p><p>360여 개의 돌을 다듬어 쌓아 만든 이것은 바로 경주 첨성대에요. 신라 제27대 왕인 선덕여왕(재위 632~647) 때 만들어진 것으로 보여요. 그렇다면 경주 첨성대는 무엇을 하던 곳일까요? 왜 넓은 벌판에 세워졌을까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1T02:17:13+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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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원효, 아시아의 큰 스님이 되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600s/21</link>
<description><![CDATA[<p>‘원효’(‘효’는 우리말로 ‘새벽’이라는 뜻)라는 이름은 ‘불교를 새로 빛나게 하다’라는 뜻을 갖고 있어요. 원효의 깨달음은 신라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도 전해져 많은 스님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어요.</p><p><br /></p><p>원효가 쓴 책은 그가 죽은 후에도 다시 만들어지곤 했는데, 이중에 하나는 멀리 떨어진 중국의 돈황에서 발견되기도 하였어요. 무덤에서 깨달음을 얻은 원효가 아시아의 큰 스님이 된 것이지요.</p><p>지금의 서울에 있는 원효로나 원효대교, 경산시의 원효로도 바로 원효의 큰 업적을 기리기 위해 그의 이름에서 따왔어요.</p><p><br /></p><p>수많은 책과 많은 가르침을 남기고 원효는 70세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어요. 신라의 대학자였던 아들 설총은 원효의 유골을 분황사에 모시고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아침저녁으로 정성을 다해 모셨다고 전해집니다.</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67146_3724.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67146_3724.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67146_3724.png" /><br style="clear:both;" />원효와 의상</p><p>일본 교토 고잔지(高山寺) 소장</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1T02:06:00+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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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백성들, 원효와 함께 나무아미타불을 외치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600s/20</link>
<description><![CDATA[<p>신라로 돌아온 원효는 분황사 등에 머물다가 저잣거리를 누비며 백성들을 만났어요. 심지어 주막의 술꾼이나 거지들과도 어울리며 자신의 깨달음을 전하고자 했어요. 물론 다른 승려들은 원효가 난폭하고, 예의가 없으며, 상식의 선을 넘었다고 비난했어요. 하지만 자신들과 가까운 곳에서 쉬운 말로 불교의 깨달음을 전하는 원효에게 백성들은 열광하고 환호했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67015_276.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67015_276.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67015_276.png" /><br style="clear:both;" />거리에서 깨달음을 전하는 원효</p><p><br /></p><p>“대사님! 저희와 같은 천한 사람도 극락세계에 갈 수 있을까요?”</p><p><br /></p><p>“천한 것과 귀한 것은 정해져 있지 않아요. 그 구분은 오직 사람의 마음속에만 있는 것이에요. 하찮은 가축 속에도 부처는 있답니다.”</p><p><br /></p><p>“어찌하면 우리도 극락세계에 갈 수 있나요?”</p><p><br /></p><p>“극락세계에 가려면 부처처럼 행동해야겠지요. 부처의 마음으로 행동하면 부처가 되고, 도둑의 마음으로 행동하면 도둑이 됩니다.”</p><p>원효는 글을 모르는 백성들이 쉽게 불경을 배울 수 있도록 ‘무애가’란 노래도 만들었어요. 무애가는 장애나 차별이 없는 세상을 꿈꿨던 부처님의 가르침을 노래로 만든 것이에요. 원효는 직접 거리를 돌아다니며 표주박 모양의 그릇을 들고 춤을 추면서 이 노래를 불렀어요. 마치 광대 같기도 하고, 노래를 부르며 구걸하는 거지같기도 했어요. 원효와 함께 많은 백성들이 무애가를 따라 불렀어요. 밭가는 노인들도 콧소리로 흥얼거리며 무애가를 불렀다고 해요.</p><p><br /></p><p>그리고 ‘나무아미타불’이란 말을 외치면 천한 백성들도 극락세계에 갈 수 있다고 가르쳤어요. 그때 신라의 많은 백성들이 따라 하면서 지금 우리들에게도 익숙한 불교 용어가 되었지요.</p><p><br /></p><p>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신라에 받아들여진 불교는 왕권을 강화하고 정신적으로 백성들을 단결시키는 역할을 했어요. 그러나 원효가 활동하던 시기의 신라 불교는 주로 귀족들과 부자들이나 믿는 종교였어요. 가난하고 글자를 모르는 백성들에게는 먼 나라의 이야기처럼 가까이 배울 수 없었지요.</p><p><br /></p><p>이런 상황 속에서 살아있을 때 노력하면 누구나 극락세계에 갈 수 있다는 원효의 가르침은 오랜 전쟁과 배고픔, 그리고 질병에 시달리던 백성들에게 큰 희망을 주었어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1T02:03:55+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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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em>
<title>무덤에서 얻은 깨달음</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600s/19</link>
<description><![CDATA[<p>당시 삼국은 중국을 통해 불교를 받아들였어요. 불교를 깊이 배우려면 지금의 중국에 있던 당으로 유학을 가야 했어요. 더 많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원효는 의상과 함께 유학길에 올랐어요. 두 사람은 당항성에서 뱃길을 이용해 당으로 가고자 했어요.</p><p>당항성으로 가던 원효와 의상은 늦은 밤 폭풍우를 피해 작은 굴속에서 잠을 자게 되었어요. 번개가 치고, 비바람이 몰아치던 험한 밤이었지만 굴속에서 편하게 잠을 잘 수 있었어요. 아침에 눈을 뜬 원효는 깜짝 놀라고 말았어요.</p><p><br /></p><p>“아니, 우리가 잔 곳이 무덤 속이라니?”</p><p><br /></p><p>“스님,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어제는 어두워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거든요.”</p><p><br /></p><p>“그러게 말이에요. 그런데 여전히 비바람이 멈추질 않으니 이를 또 어찌 한단 말입니까?”</p><p><br /></p><p>“이 비바람을 맞으며 길을 갈 수는 없으니 어떻게든 하룻밤은 참아보시지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66869_7835.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66869_7835.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66869_7835.png" /><br style="clear:both;" />무덤에서 잠을 자는 원효와 의상</p><p><br /></p><p>폭풍우가 멈추지 않자 어쩔 수 없이 두 사람은 하룻밤을 더 무덤 속에서 지내야 했어요. 첫날밤은 그렇게 편안하던 굴이 무덤이란 것을 알게 된 원효는 쉽게 잠들지 못했어요. 설핏 잠이 든 원효는 꿈속에서 귀신을 보기까지 했지요.</p><p>아침에 눈을 뜬 원효는 깊은 생각에 잠겼어요.</p><p><br /></p><p>“똑같은 곳에서 잠을 잤는데 어찌 마음은 이렇게 서로 다르단 말인가? 마음이 바뀌면 사물도 바뀌는 법!”</p><p>오랜 생각 끝에 원효는 세상 만물은 똑같으나 사람의 마음먹기에 따라 생각도, 사물도 달라진다는 깨달음을 얻었어요. 원효는 무덤에서 얻은 깨달음을 백성들에게 전해야겠다는 결심을 했어요. 그리고 당 유학을 포기하고 신라로 돌아갔지요. 원효와 달리 의상은 뜻을 굽히지 않고 당으로 유학을 떠났어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1T02:01:22+09:00</dc:date>
</item>


<item>
<title>밤나무 밑에서 태어난 원효, 승려가 되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600s/18</link>
<description><![CDATA[<p>원효 아버지의 성은 설씨였어요. 어머니가 별이 떨어져 품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원효를 가졌다고 해요. 산달이 가까워진 어느 날 어머니가 마침 마을 밤나무 밑을 지나다가 갑자기 아기를 낳게 되었어요. 너무나 급해서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남편의 옷을 밤나무에 걸고 그 속에서 아기를 낳았어요. 밤나무 밑에서 태어난 이 아기가 바로 원효에요. 원효가 태어났던 밤나무의 열매는 신기하게도 보통 나무와는 달리 매우 컸다고 해요.</p><p><br /></p><p>원효는 총명하게 무럭무럭 자라났어요. 원효가 커가던 이 시기는 고구려, 백제, 신라 사이에 치열한 전쟁이 끊이지 않던 때였어요. 많은 백성이 전쟁터에 끌려가 허무하게 죽는 경우도 많았죠. 죽음이 흔한 시기에 원효는 오랫동안 삶과 죽음을 고민했어요. 고민이 깊어지자 모든 재산을 뒤로 하고 집을 나와 승려가 되었어요. 그리고 황룡사에 들어가 여러 불교 서적들을 읽으며 공부에 전념하였어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1T01:58:32+09:00</dc:date>
</item>


<item>
<title>원효, 불교를 백성들에게 널리 전하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600s/17</link>
<description><![CDATA[<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66632_0187.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66632_0187.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66632_0187.png" /><br style="clear:both;" />분황사(경북 경주시)</p><p><br /></p><p>“여보게, 웬 괴짜 스님이 술을 먹고 저잣거리에 춤을 추고 있다더군. 구경이나 한번 가보세.”</p><p><br /></p><p>“스님이 술을 먹는다고? 이상한 스님이 아닌가?”</p><p><br /></p><p>“그런데, 그 스님의 말씀이 예사롭지가 않아서 사람들이 크게 즐거워한다네.”</p><p><br /></p><p>무덤에서 큰 깨달음을 얻었다는 원효는 자신의 깨달음을 백성들에게 전하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어요. 원효가 백성들에게 전하고자 했던 깨달음은 무엇이었을까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1T01:57:23+09:00</dc:date>
</item>


<item>
<title>을지문덕, 살수에서 수 별동대를 물리치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600s/16</link>
<description><![CDATA[<p>수 군대는 진영을 갖추고 자기 나라로 돌아가기 시작했어요. 그러나 을지문덕은 수 별동대를 가만 두지 않았지요. 기화를 놓치지 않고 군사를 보내 돌아가는 수 별동대를 사방에서 공격하게 하였어요. 수 군사들은 싸우고 행군하기를 반복하면서 더욱 지쳐갔어요.</p><p><br /></p><p>고구려군에게 쫓겨 수 군대가 살수(청천강)에 이르러 강을 반쯤 건넜을 때였어요. 을지문덕의 명령을 받은 고구려군이 수 군대의 뒤쪽을 공격하였어요. 수 군대의 앞과 뒤가 잘리고, 많은 군사가 강물을 건너는 도중에 공격을 받자 수 군대의 진영이 흐트러져 무너지기 시작했어요. 줄을 지어 질서 있게 움직이던 행렬이 일단 무너지자 당황한 수 군대는 싸울 힘을 잃고 허둥거리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하나둘씩 고구려군의 칼날 아래 하나둘식 쓰러졌어요. 살수 주변으로 수 군사들의 비명소리가 가득했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66445_3029.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66445_3029.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66445_3029.png" /><br style="clear:both;" />을지문덕과 살수대첩</p><p>전쟁기념관</p><p><br /></p><p>수 별동대는 순식간에 많은 병사를 잃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어요. 살아남은 장수와 군사들은 고구려군의 추격을 피해 모두 북쪽으로 도망치기에 바빴지요. 하루 밤낮 동안 도망쳐 압록강에 도착했는데 그 거리가 450리(177km)나 되었어요. 수 군사들이 얼마나 다급하게 도망을 갔는지 짐작할 수 있는 장면이죠.</p><p><br /></p><p>처음 수 별동대가 압록강을 건넜을 때 군사가 약 30만 명이었는데, 요동성에 되돌아온 군사는 단지 2천 7백 명에 불과했어요. 수많은 갑옷과 창검, 군수 물자를 모두 잃고 난 후였지요. 별 성과 없이 몰살을 당하고 돌아온 별동대를 보자 수 황제는 크게 화를 냈어요. 그리고 간신히 살아 돌아온 장수들을 쇠사슬에 묶어 수로 돌아갔어요.</p><p>고구려는 이후에도 두 차례나 더 수의 침략을 받았어요. 물론 그때마다 고구려는 모든 백성들이 힘을 모아 수의 침략을 물리쳤지요. 여러 차례의 고구려 원정에 실패한 수는 고구려 원정 때문에 나라의 곳간이 텅텅 비고, 황제의 잘못된 통치에 반대해 일어난 반란으로 일어나 결국 멸망하고 말았답니다.</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1T01:54:27+09:00</dc:date>
</item>


<item>
<title>을지문덕, 수 별동대를 유인하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600s/15</link>
<description><![CDATA[<p>수 30만 별동대가 압록강에 도착했어요. 수 별동대의 빠른 이동에 당황한 고구려는 긴급 회의를 열었어요. 고구려 영양왕이 근심어린 표정으로 말문을 열자 을지문덕이 이에 답을 하였어요.</p><p><br /></p><p>“적의 선봉대가 벌써 압록강에 도착했다는 급한 소식이 왔소. 이를 어쩌면 좋겠소?”</p><p><br /></p><p>“폐하! 소장이 직접 적진에 들어가 적의 상황을 살펴보고 오겠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p><p>“장군이 적진에 간다면 적장은 분명 장군을 가둘 것이요. 어찌 한 나라의 대장군을 그리 쉽게 적에게 넘겨준단 말이오?”</p><p><br /></p><p>“먼 길을 급히 달려온 적은 분명 지쳐있을 것입니다. 적의 약점을 알면 반드시 이길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폐하! 허락해 주소서!”</p><p><br /></p><p>간신히 왕의 허락을 받은 을지문덕은 거짓으로 항복하여 수군 진영으로 갔어요. 보급 부대 없이 먼 길을 급히 온 수의 군사들은 배고프고 지친 기색이 분명했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66293_5654.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66293_5654.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66293_5654.png" /><br style="clear:both;" />수의 침입로</p><p><br /></p><p>이보다 앞서 우중문은 수나라 황제의 명령을 받았어요.</p><p><br /></p><p>“만일 왕이나 을지문덕이 오게 되면 반드시 그를 사로잡으라.”</p><p><br /></p><p>우중문은 황제의 명령에 따라 을지문덕을 붙잡아 두려고 했어요. 그러나 부하 장수가 나서서 강하게 말렸어요.</p><p>“항복을 하러 온 적장을 붙잡는 것은 이전 역사에는 없던 일입니다. 장군! 도리를 지키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p><p><br /></p><p>부하 장수의 말에 마음이 약해진 우중문은 고민에 빠졌어요. 게다가 을지문덕이 우중문에게 항복을 약속하자 어쩔 수 없이 을지문덕을 놓아줄 수밖에 없었어요. 수 군영을 빠져나온 을지문덕은 압록강을 건너 고구려로 돌아갔어요. 우중문은 눈앞에서 고구려 최고의 장수를 놓친 걸 두고두고 후회했어요. 을지문덕을 풀어준 수 군대는 압록강을 건너 고구려군을 쫓기 시작했어요.을지문덕은 수 군사들이 지쳤다는 걸 간파하고 그들을 더욱 지치게 만들고 싶었어요. 그래서 매번 싸울 때마다 쉽게 져주며 평양 쪽으로 도망을 갔지요. 우중문은 하루 동안에도 7번 싸워 모두 이겼고, 승리에 취해 을지문덕의 계책을 알아차리지 못했어요.</p><p><br /></p><p>수나라 군대는 살수(청천강)를 건너 평양성으로부터 30리 떨어진 곳에 도착해 군영을 세웠어요. 이때 을지문덕은 우중문에게 시 한편을 보냈어요.</p><p><br /></p><p><br /></p><p>그대의 신기한 전략은 하늘의 이치를 알았고</p><p>오묘한 계획은 땅의 이치를 깨달았구려.</p><p>전쟁에 이겨서 그 공이 이미 크니</p><p>여기에 만족하고 전쟁을 멈추는 것이 어떠하오.</p><p>을지문덕의 시는 우중문을 희롱하고 비꼬는 내용이었어요. 그러나 우중문은 많은 승리에 취해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어요. 게다가 우중문은 답장을 보내 을지문덕을 타이르기까지 했어요.</p><p><br /></p><p><br /></p><p>수 대군이 싸울 때마다 승리하며 평양성 코앞까지 왔다.</p><p>고구려의 운이 다했으니 예를 갖춰 항복을 하라.</p><p>그러면 그대의 왕과 신하들의 목숨만은 보존해 줄 것이다.</p><p><br /></p><p>을지문덕은 다시 우중문에게 편지를 써 보내 다시 한 번 항복을 약속했어요.</p><p><br /></p><p><br /></p><p>만약 장군께서 군사를 돌리신다면 마땅히 왕을 모시고</p><p>수 조정에 들어가 황제를 뵙겠습니다.</p><p><br /></p><p>우중문은 오랜 전투로 군사들이 지친 것을 보고 고구려군과 다시 싸우기는 힘들겠다고 판단했어요. 또한 평양성이 높고 험하여 함락시키기 어렵다는 생각도 하였지요. 마침 을지문덕이 항복한다는 약속은 우중문에게 군대를 돌릴 명분을 만들어 주었어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1T01:51:48+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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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고구려, 요동에서 수나라에 맞서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600s/14</link>
<description><![CDATA[<p>마침내 수의 군대가 요하를 건너 요동성에 도착했어요. 고구려군이 성문을 닫고 굳게 지키자 수나라 군대는 성을 겹겹이 포위하였어요. 그리고 당시 가장 발달한 공성 무기들을 사용해 요동성을 공격하였어요.</p><p><br /></p><p>수의 군대는 맹렬하게 공격했지만 요동성의 고구려군과 백성들은 효과적으로 잘 막아냈어요. 요동성이 오랫동안 함락되지 않자, 수나라 황제는 베주머니 백만여 개를 만들어 보냈어요. 그 베주머니에 흙을 채우고, 그것을 쌓아올려 성의 높이와 같게 해 공격하게 하였어요. 그러나 이 방법으로도 요동성을 함락시킬 수는 없었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66039_5492.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66039_5492.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66039_5492.png" /><br style="clear:both;" />고구려군의 항전</p><p><br /></p><p>요동성에서 몇 달간 발목이 잡힌 수나라 대군은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어요. 가장 시급한 것은 식량이었어요. 수 황제는 많은 수의 병사들을 동원한다면 빠른 기간 안에 고구려의 항복을 받을 수 있으리라 예상했지요.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전쟁이 길어지면서 식량이 가장 큰 문제가 되었던 거예요.</p><p><br /></p><p>수 황제는 어쩔 수 없이 요동성을 돌아서 평양성을 직접 공격하기 위한 별동대를 만들었어요. 수나라 별동대는 약 30만 명 정도였어요. 여유가 없었던 수나라 별동대는 보급 부대 없이 군사들 각자가 100일치 식량을 짊어지고 평양성 공격에 나섰어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1T01:47:41+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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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고구려, 수 113만 대군의 침략을 받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600s/13</link>
<description><![CDATA[<p>중국은 한나라가 멸망한 이후 여러 나라로 나뉘어 있었어요. 수는 분열되었던 중국을 300여 년 만에 다시 통일하였지요. 중국을 통일한 수는 나라를 안정시켜 가면서 강한 나라를 만들어 갔어요. 나라가 안정되자 수는 주변의 여러 나라를 지배해 나갔어요. 돌궐과 멀리 베트남까지 지배할 수 있었지만 고구려만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어요. 수는 눈의 가시와 같았던 고구려를 없애기 위해 전쟁을 선택하였어요. 수나라 황제가 말했어요.</p><p><br /></p><p>“하찮은 고구려가 어리석고 불손하게도 우리 수에게 머리를 조아리지 않는다. 지금 명령을 내리니 출정하여 오만한 고구려를 번개같이 쓸어버려라.”</p><p><br /></p><p>612년, 수 황제는 고구려 공격을 명령하였어요.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 떠난 수나라 군대는 모두 113만 명에 달했어요. 군량 등을 운반하는 사람들은 그 배나 되었지요. 매일 군대를 이어서 보냈는데 40일만에야 출발이 완료될 만큼 어마어마한 크기의 규모였어요. 군대의 대열이 끝없이 이어졌는데, 그 길이가 무려 960리(약380km)에 이를 정도였다고 해요.</p><div><br /></div>]]></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1T01:45:14+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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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em>
<title>을지문덕, 살수에서 수를 물리치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600s/12</link>
<description><![CDATA[<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65834_6392.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65834_6392.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65834_6392.png" /><br style="clear:both;" />전쟁기념관(서울 용산구)</p><p><br /></p><p><br /></p><p>그대의 신기한 전략은 하늘의 이치를 알았고</p><p>오묘한 계획은 땅의 이치를 깨달았구려.</p><p>전쟁에 이겨서 그 공이 이미 크니</p><p>여기에 만족하고 전쟁을 멈추는 것이 어떠하오.</p><p><br /></p><p>을지문덕은 고구려를 침략한 수의 장수 우중문에게 한가롭게 시를 써서 보냈어요. 전쟁이 한창일 무렵이었어요. 시에 담긴 을지문덕의 의도는 무엇일까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1T01:44:07+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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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역사 속 작은 이야기 : 온달 장군은 어디서 전사했을까?</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600s/11</link>
<description><![CDATA[<p>왕의 허락을 받은 온달 장군은 군대를 이끌고 죽령의 서쪽 땅을 되찾으러 떠났어요. 그리고 아단성 아래에서 용맹하게 싸우다가 날아온 화살에 맞아 전사했어요. 전사한 온달 장군을 백성들이 모셔 장사지내려 했으나 관이 바닥에 붙어 움직이지 않았어요. 이때 소식을 듣고 달려온 평강공주가 관을 어루만지면 말했어요.</p><p><br /></p><p>“삶과 죽음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편히 돌아가세요.”</p><p><br /></p><p>평강공주의 말이 끝나자 관이 움직여 장사를 지낼 수 있었어요. 이로써 한강을 되찾으려던 온달 장군의 노력은 끝이 났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65644_7925.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65644_7925.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65644_7925.png" /><br style="clear:both;" />아단성을 공격하는 온달 장군</p><p><br /></p><p>고구려 온달 장군이 전사한 아단성은 과연 어디일까요? 그 위치를 둘러싸고 서로 다른 주장이 있어요. 첫 번째는 온달산성이라는 주장이에요. 온달 장군이 죽령 서쪽 땅을 되찾기 위해 출전하였는데, 죽령 근처의 산성 이름이 고구려 때 ‘을아단(乙阿旦)’이라고 불렸대요. 그래서 온달산성이 아단성이라고 주장하고 있어요.</p><p><br /></p><p>두 번째는 아차성이라는 주장이에요. 고구려와 신라는 주로 한강 하류 지역에서 전투를 벌였기 때문에 남한강의 온달산성은 너무 거리가 멀어 온달 장군의 접근이 어려웠으리라 추측하고 있어요. 한자도 아차성(阿且城)과 아단성(阿旦城)이 매우 비슷하고요.</p><p>『삼국사기』‘온달전’ 속 이야기는 당시 한강 지역을 둘러싼 고구려와 신라의 치열했던 대결을 담고 있어요. 온달 산성처럼 고구려, 백제, 신라가 나라의 운명을 걸고 대결했던 장소를 또 찾아보아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1T01:41:09+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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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em>
<title>한강을 차지한 신라, 삼국을 통일하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600s/10</link>
<description><![CDATA[<p>진흥왕 이후 신라는 귀족들의 권력 다툼과 자연재해로 국력이 약해지고 있었어요. 한편, 신라의 배신으로 영토와 왕을 잃은 백제는 울분에 차 있었지요. 그래서 백제는 고구려와 손을 잡고 신라를 공격하였어요. 신라는 더욱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어요.</p><p><br /></p><p>관산성에서 크게 패한 후 백제의 국력은 약해졌지만, 무왕의 노력으로 빠르게 회복되었어요. 의자왕 때는 소백산맥을 넘어 대야성을 비롯한 수십 개의 성을 빼앗기도 했지요. 그리고 고구려도 군대를 정비하여 동쪽의 많은 땅을 되찾기도 했어요. 결국 백제와 고구려의 협공으로 신라는 큰 위험에 빠졌어요.</p><p>신라는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운 상황에서 당과의 연합을 추진했어요. 선덕여왕의 명을 받은 김춘추는 한강 하류의 당항성을 통해 바다를 건너 당으로 갔어요. 김춘추는 신라와 당의 연합을 이루어 냈지요. 이에 660년 신라군과 당나라군은 백제의 수도 사비(부여)를 공격했고, 나당 연합군의 공격을 이겨내지 못한 백제는 결국 멸망하고 말았어요.</p><p><br /></p><p>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 간의 전쟁에서 아주 중요했던 지역을 떠올릴 수 있지요? 바로 한강입니다.</p><p><br /></p><p>한강은 한반도의 중심에 있는 큰 강이지요. 지금 서울 중심부를 흐르고 있지요. 이 한강과 그 주변 지역은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에요. 넓은 강 유역은 농사짓기에도 좋았고, 북한강과 남한강에 연결되어 교통로 역할도 했지요. 삼국 시대에는 한강 유역을 어느 나라가 차지했는지가 국력에 큰 영향을 주었답니다. 결국 신라는 한강을 차지하면서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지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65469_4739.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65469_4739.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65469_4739.png" /><br style="clear:both;" />7세기 초 삼국의 영토</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1T01:38:01+09:00</dc:date>
</item>


<item>
<title>신라, 나제동맹을 깨고 한강을 모두 차지하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600s/9</link>
<description><![CDATA[<p>백제는 고구려의 공격으로 수도 한성을 빼앗겼던 치욕을 당했기 때문에 옛 수도와 한강 유역 지역을 되찾는 일이 매우 중요했지요. 백제는 신라, 가야와 동맹을 맺고 꾸준히 국력을 키웠고, 고구려의 혼란은 한반도 남쪽 여러 나라에게 절호의 기회가 되었어요.</p><p> 진흥왕은 한강 전체를 차지할 욕심에 동맹을 깨고 백제군을 공격하였어요. 갑작스러운 공격에 백제군은 한강 하류 지역을 모두 잃었어요.</p><p><br /></p><p>신라의 배신에 분노한 백제 성왕은 태자를 총사령관으로 삼아 신라를 공격하게 했어요. 백제군과 신라군은 지금의 충청북도 옥천에 있던 관산성에서 만났어요. 관산성은 남쪽으로 추풍령이라는 고개만 넘으면 신라 수도 금성(경주)으로 갈 수 있는 곳으로 군사적 요충지였죠. 그곳에서 두 나라는 일진일퇴를 반복하며 치열한 전투를 벌였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65323_5675.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65323_5675.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65323_5675.png" /><br style="clear:both;" />보은 삼년산성</p><p>한국문화원연합회</p><p><br /></p><p>백제 성왕은 계속된 전투에 지친 군사들을 위로하고 응원하기 위해 약간의 호위병만 거느리고 관산성으로 갔어요. 그런데 삼년산성에 있던 신라군이 이를 눈치채고 기습하여 성왕을 사로잡았어요.</p><p><br /></p><p>안타깝게도 성왕은 목숨을 잃고 말았어요. 왕을 잃은 백제군은 관산성에서 크게 패하였고, 한강 하류 지역도 신라의 땅이 되었어요. 한강을 모두 차지한 신라 진흥왕은 크게 기뻐하며 북한산에 순수비를 세웠어요. 이 비석을 세워 한강 지역이 신라의 땅임을 확실히 증명하려는 것이었지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1T01:35:41+09:00</dc:date>
</item>


<item>
<title>백제, 신라와 연합하여 한강을 되찾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600s/8</link>
<description><![CDATA[<p>강성했던 고구려는 왕의 자리를 놓고 귀족들이 다툼을 벌이면서 흔들리기 시작했어요. 편을 나눠 싸우고, 이긴 편이 진 편의 무리를 없애버리곤 했어요. 고구려 국내 정치가 혼란한 틈을 타 신라는 죽령을 넘어 지금의 단양과 충주 지역을 차지했어요. 새로 차지한 단양의 적성에 비석을 세워 이 지역이 신라 땅임을 세상에 알렸어요. 그리고 남한강을 따라 북쪽으로 계속 나아갔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65124_4351.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65124_4351.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65124_4351.png" /><br style="clear:both;" />단양 적성에서 바라 본 소백산맥과 죽령</p><p><br /></p><p>백제도 그 기회를 틈타 한강 지역을 되찾기 위해 북쪽으로 군대를 보냈어요. 백제와 신라의 동맹군은 고구려군과의 싸움에서 계속 승리하였지요. 그 결과 백제는 한강 하류 6개 군을, 신라는 한강 상류 10개 군을 차지했어요. 고구려군은 한강 북쪽으로 크게 밀려났어요. 하지만 고구려는 북쪽 국경에 촉각을 세워야 해서 바로 반격할 수가 없었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65155_2939.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65155_2939.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65155_2939.png" /><br style="clear:both;" />충주 고구려비, 단양 신라 적성비, 서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p><p>문화재청, 국립중앙박물관</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1T01:32:47+09:00</dc:date>
</item>


<item>
<title>고구려, 한강 유역을 차지하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600s/7</link>
<description><![CDATA[<p>475년, 고구려 장수왕은 백제의 수도인 한성을 공격해 차지하였어요. 당시 백제 개로왕은 고구려의 공격을 피해 달아났다가 고구려군에게 잡혀 아차산 아래로 끌려가 죽임을 당했어요. 백제의 수도를 차지한 고구려군은 남한강을 이용해 남쪽으로 계속 나아갔어요. 현재 충주 고구려비라는 비석이 남아 있는데, 이를 보면 당시 고구려가 남한강 주변 지역까지 차지했음을 알 수 있어요.</p><p><br /></p><p>백제는 한성을 빼앗기고 웅진(공주)으로 수도를 옮겼어요. 금강을 이용해 고구려군을 막았지요. 신라도 험준한 소백산맥을 방패로 삼아 강성한 고구려에 맞섰어요. 그러나 결국 위기에 빠진 백제와 신라는 군사 동맹을 맺어야 했지요. 백제와 신라가 힘을 합쳐서 맞서자 고구려도 남쪽으로 더 내려오지는 못했어요. 백제와 신라의 군사 동맹은 100년이 넘게 계속되었어요. 고구려의 진격을 막은 백제와 신라는 안으로 나라를 정비하고,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며 국력을 키워나갔어요.</p><div><br /></div>]]></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1T01:29:34+09:00</dc:date>
</item>


<item>
<title>삼국의 한강유역 쟁탈 - 한반도의 중심, 한강을 차지하라!</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600s/6</link>
<description><![CDATA[<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64719_2263.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64719_2263.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64719_2263.png" /><br style="clear:both;" />온달산성(충북 단양군)</p><p><br /></p><p>“신라가 한강 이북의 우리 땅을 빼앗아 다스리니 백성들이 울분에 차 있습니다.”</p><p><br /></p><p>“신라가 기세등등하여 우리 고구려를 압박하니 이를 어찌한단 말인가?”</p><p><br /></p><p>“대왕께서 저를 어리석다 여기지 마시고 군사를 주신다면 한걸음에 나아가 우리 고구려 땅을 다시 찾아오겠습니다.”</p><p><br /></p><p>온달 장군은 죽령 서쪽 땅을 되찾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임금께 맹세하고 남쪽으로 출전하였어요. 온달 장군이 말한 죽령 서쪽 땅은 어디일까요? 고구려는 왜 이곳을 되찾으려 했을까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1T01:25:43+09:00</dc:date>
</item>


<item>
<title>김유신이 대야성을 되찾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600s/5</link>
<description><![CDATA[<p>648년, 김춘추가 당에 원군을 요청하러간 사이 김유신은 대야성을 공격하였어요. 잘 훈련된 군사들을 이끌고 대야성에 이르자 백제군이 미리 준비해 성을 수비하고 있었지요. 여러 차례 성을 공격하던 김유신은 이기지 못하고 도망치는 체하며 백제군을 옥문곡으로 유인하였어요. 백제군은 신라군을 가볍게 여겨 한꺼번에 많은 병사들을 거느리고 쫓아왔어요.</p><p><br /></p><p>옥문곡에 백제군이 당도하자 매복하고 있던 신라군이 앞뒤에서 일어나 돌을 굴리고 활을 쏘며 공격하였어요. 예상하지 못한 매복에 걸린 백제군은 우왕좌왕 하다 크게 패하였어요. 백제 장수 8명이 사로잡히고 죽거나 포로가 된 병사가 1천명에 달했어요. 대야성을 되찾은 김유신은 백제군 진영에 사자를 보내서 협상을 요구했어요.</p><p><br /></p><p>“대야성 성주 김품석과 그의 아내가 너희 나라 감옥에 묻혀 있다. 그런데 너희 장군 8명이 나에게 잡혀 엉금엉금 기면서 살려 달라고 청하는 것을 보니, 나는 여우나 표범도 죽을 때는 머리를 제 살던 곳으로 향한다는 뜻이 생각나 차마 죽이지 못하고 있다. 이제 너희가 죽은 두 사람의 뼈를 보내 살아 있는 여덟 사람과 바꾸는 것이 어떠한가?”</p><p><br /></p><p>극적으로 대야성과 김춘추의 사위와 딸의 유골을 되찾은 김유신은 승기를 타고 백제 땅으로 들어가 20성을 공격하여 빼앗았어요.</p><p>대야성을 잃었던 신라는 김춘추와 김유신의 노력으로 성도 되찾고 당의 원병도 얻을 수 있었어요. 대야성을 되찾는 과정에서 김춘추와 김유신은 신라를 이끄는 대표적인 인물이 떠올랐어요. 신라를 이끈 두 사람의 활약으로 대야성에서 시작된 백제와 신라 사이의 전투는 결국 백제의 멸망으로 마침표를 찍었어요.</p><p><br /></p><p>신라군이 백제의 수도 사비성을 함락하였을 때 김춘추의 아들 법민이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을 말 앞에 꿇어앉히고 얼굴에 침을 뱉으며 말하였어요.</p><p><br /></p><p>“예전에 너의 아비가 나의 누이를 억울하게 죽여서 옥중에 묻은 적이 있다. 그 일은 나로 하여금 20년 동안 마음이 아프고 골치를 앓게 하였는데 오늘 너의 목숨은 내 손안에 있구나!”</p><p><br /></p><p>무령왕으로부터 시작해 성왕, 무왕, 의자왕을 이어오며 오랜 기간 준비한 백제의 부활도 이렇게 끝이 났어요. 대야성을 차지하며 신라보다 더 강한 나라를 만들었던 백제는 왜 신라에게 멸망을 당했을까요? 신라의 위기 속에서 내린 김춘추의 결정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나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23:53:37+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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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고구려와 당에 구원을 요청한 김춘추</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600s/4</link>
<description><![CDATA[<p>김춘추는 대야성에서 김품석과 함께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큰 충격에 빠졌어요. 게다가 이 시기에 신라는 제대로 힘 한번 써보지 못한 채 백제에게 많은 성을 빼앗기고 있었어요. 크나큰 신라의 위기였어요.</p><p><br /></p><p>김춘추는 나라의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깊은 고민에 빠졌어요. 먼저 떠오른 생각은 예전처럼 강한 백제군을 고구려군의 도움을 받아 물리치는 것이었어요. 김춘추는 죽음을 무릅쓰고 고구려로 가 구원병을 요청했어요.</p><p><br /></p><p>“포악한 백제가 군대를 몰아 우리 신라를 침범했습니다. 대왕의 군대를 얻어 백제를 몰아내고 치욕을 씻고자 합니다.”</p><p><br /></p><p>“죽령은 본래 우리 땅이니 그곳을 돌려준다면 군사를 보내줄 것이오.”</p><p><br /></p><p>“대왕께서는 이웃의 어려움을 도와 이웃과 잘 지낼 뜻은 없고, 다만 사신을 위협하여 땅을 요구하십니다. 지금 저에게는 죽음이 있을 뿐 입니다.”</p><p>죽령 이북 땅을 돌려달라는 고구려의 요구는 신라 입장에서는 들어주기 힘든 조건이었어요. 김춘추가 고구려의 요구를 거절하자 연개소문은 그를 별관에 가두었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9095_2428.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9095_2428.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9095_2428.png" /><br style="clear:both;"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하는 김춘추</p><p><br /></p><p>나라를 구하러 왔던 김춘추는 자칫 목숨을 잃을 판이었어요. 위험에 처한 김춘추는 마침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에서 영감을 얻고는 보장왕에게 '신라로 돌아가 선덕여왕께 청해서 고구려의 요구를 들어 주겠다'는 거짓 약속을 하였어요.</p><p>마침 고구려 첩자가 들어와 김유신이 군사를 이끌고 김춘추를 구하기 위해 국경을 넘으려 한다는 정보를 연개소문에게 알렸어요. 당의 위협 속에서 신라와의 전쟁을 치룰 여유가 없었던 연개소문은 어쩔 수 없이 김춘추를 신라로 돌려보냈어요.</p><p><br /></p><p>가까스로 신라로 돌아온 김춘추는 고구려의 도움을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다고 확신했어요. 고구려를 버린 김춘추는 당과의 연합을 모색하였어요. 당시 당 태종은 안시성 전투에서 고구려에게 패하고 울분을 삭이고 있는 중이었지요.</p><p><br /></p><p>거친 바닷길을 건너 당에 도착한 김춘추는 당 태종을 만난 고구려 정벌에 앞서 백제를 칠 것을 제안했어요. 안시성에서 패했던 당의 입장에서도 고구려를 정벌하기 위해서는 남쪽에서 신라의 협공이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요. 김춘추는 당 태종에게 군사적 지원을 약속 받는 대신 대동강 이북의 고구려 땅을 당에 주기로 약속하고 신라로 돌아왔어요.</p><div><br /></div>]]></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23:52:10+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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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대야성을 백제가 빼앗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600s/3</link>
<description><![CDATA[<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8837_716.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8837_716.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8837_716.png" /><br style="clear:both;" />의자왕 시기 백제의 영토</p><p><br /></p><p>642년, 의자왕은 윤충을 보내 합천에 위치한 대야성을 공격하게 하였어요. 대야성은 80년 전 진흥왕 때 멸망한 대가야의 옛 성으로, 사방이 강과 해자로 둘러싸인 천연의 요새였지요. 또한 신라의 심장부였던 대구·경주로 바로 이어지는 요충지였어요. 백제로부터 경주에 이르는 가장 짧은 길이기도 했지요. 때문에 신라로서는 꼭 지켜야하는 곳이었어요. 대야성의 성주는 김춘추의 사위 김품석이었어요.</p><p><br /></p><p>“성주님, 1만쯤 되어 보이는 백제군이 양쪽으로 나뉘어 오고 있다 하옵니다.”</p><p><br /></p><p>“뭐시라? 1만이 되는 군대가 대야성 코앞까지 올 동안 무엇을 했단 말인가?”</p><p><br /></p><p>“송구하오나 적들이 험한 산길로 돌아와 수비병들이 보지 못한 듯합니다. 적의 장수는 윤충이라 하옵니다.”</p><p><br /></p><p>“윤충은 백제가 자랑하는 천하의 명장이니, 맞서 싸우기 보다는 성을 지키는 것이 상책이다. 성문을 닫고 모두 성벽에 올라 지키도록 하라.”</p><p><br /></p><p>얼마 되지 않아 대야성은 완전히 포위되었고, 백제군의 거센 공격이 계속되었어요. 신라군은 성을 지키려고만 했지 감히 성문을 열고 나아가 백제군에 맞서 싸우려 하지 않았지요. 신라군은 성에 의지하며 구원군을 기다렸어요.</p><p>김품석에게는 검일이란 부하 장수가 있었어요. 검일은 얼마 전 성주에게 그의 아내를 빼앗겨 깊은 앙심을 품고 있었지요. 대야성이 포위되자 검일은 백제군과 내통하여 성에 있는 곡물 창고에 불을 질렀어요. 검일의 배신으로 성 안의 군량미가 모두 없어지고 싸울 의지가 꺾인 병사들과 백성들 사이에서 항복하자는 소리가 흘러 나왔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8904_5006.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8904_5006.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8904_5006.png" /><br style="clear:both;" />대야성 전투(합천박물관)</p><p><br /></p><p>김품석은 부하를 시켜 윤충에게 말했어요.</p><p><br /></p><p>“만약 장군이 우리를 죽이지 않는다면 성을 바치고 항복하겠습니다.”</p><p>“항복한다면 그대와 백성의 목숨은 보전해 줄 것이오. 태양을 두고 맹세합니다.”</p><p><br /></p><p>윤충의 말을 믿고 김품석은 백성들을 이끌고 성 밖으로 나가려 했어요. 그러자 부하 장수 죽죽이 길을 막고 말했어요.</p><p><br /></p><p>“백제는 말을 쉽게 바꾸는 나라입니다. 윤충은 필시 우리를 유인하여 포로로 만들 것입니다. 쥐새끼처럼 숨어서 사는 것보다 호랑이처럼 싸우다 죽는 편이 낫습니다.”</p><p><br /></p><p>김품석은 죽죽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백제와의 휴전에 동의하고 성문을 열어주고 말았어요. 그러자 윤충은 약속을 어기고 항복하러 나온 신라 군사들을 죽이기 시작했어요. 이 소식을 들은 김품석은 크게 후회하며 아내와 함께 자살하고 말았어요. 김품석이 죽고 죽죽도 남은 군사들을 모아 백제에 맞서 싸우다 전사하고 말았어요. 결국 대야성은 백제 땅이 되었어요.</p><p><br /></p><p>윤충은 김품석의 머리를 백제로 가져가 감옥 바닥에 묻고 죄수들이 밟고 다니게 하였어요. 이것은 관산성에서 죽은 성왕의 머리를 신라 북쪽 관청 계단 밑에 묻었던 옛일에 대한 복수였어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23:49:04+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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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흔들리는 신라, 강해지는 백제</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600s/2</link>
<description><![CDATA[<p>진흥왕이 한강을 차지한 이후 신라의 사정은 계속 나빠졌어요. 고구려와 백제는 끊임없이 신라를 공격하였고, 신라 귀족들 사이의 권력 다툼이 커져 반란을 일으키는 경우도 생겨났어요. 게다가 가뭄과 흉년이 자주 와서 백성의 생활도 이전과는 크게 달라졌어요.</p><p><br /></p><p>성왕의 죽음과 관산성 전투의 대패로 흔들렸던 백제의 국력은 무왕의 노력으로 빠르게 회복되고 있었어요. 무왕과 그의 아들 의자왕은 회복된 군사력을 바탕으로 신라를 집요하게 공격하여 40여 개의 성을 빼앗았어요. 그리고 고구려와 연합해 신라가 당으로 가는 바닷길의 관문인 당항성을 공격하였어요.</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8615_1996.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8615_1996.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8615_1996.png" /><br style="clear:both;" />백제군의 모습</p><p>백제군사박물관</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23:43:48+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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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김춘추, 삼국통일의 초석을 쌓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xyz/ancient_600s/1</link>
<description><![CDATA[<p><img src="http://www.koreahistory.xyz/data/editor/2607/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8364_1008.png" title="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8364_1008.png" alt="63315d6c2d73b8572f9fc2bce837ddaa_1784558364_1008.png" /><br style="clear:both;" />대야성(경남 합천군)</p><p><br /></p><p>“춘추공! 대야성이 함락되었다고 합니다.”</p><p><br /></p><p>“대야성이! 그곳에 있던 내 딸과 사위는 어찌 되었다 하는가?”</p><p><br /></p><p>“백제군에게 목숨을 잃었다고 합니다.”</p><p><br /></p><p>“아! 내 딸 고타소야!”</p><p><br /></p><p>대야성에서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김춘추는 사람이 자기 앞을 지나가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크게 슬퍼했어요. 딸을 잃은 슬픔과 다급한 신라의 위기 앞에서 김춘추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요? 김춘추의 결정은 어떤 결과를 가져왔을까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7-20T23:39:43+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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